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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피터] 신분증을 제시해주세요 1

토니의 아이를 데리고 도망치는데 처음부터 들킬 위기에 처해지는 피터의 이야기

안녕하세요. 혹시 신 되시나요? 제 이름은 피터 벤자민 파컨데요. 평소에 한 번도 찾지 않아서 엄청 괘씸하실 건 아는데, 그래도 제가 예수님을 열렬하게 따르던 열 두 사제들 중 리더격 됐던 사람이랑 동명이인이니까 제 질문 하나만 받아주실래요.

  피터는 부질 없는 생각을 하며 눈 앞에 놓인 하얀 구체를 한 손가락만을 내밀어 톡 밀어보았다. 손끝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맞닿은 구체, 아니 구라고 하기에는 가로보다 세로로 더 기니까 그보다는 계란형 물체라고 하는 게 맞는 그것은—피터가 낮게 한숨을 쉬며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그래, 누굴 속여. 원래 스스로를 속이는 것에는 젬병이어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대한 책임감을 끝까지 지고 가려고 마음 먹기까지 한 자신이 이렇게까지 정신승리를 하려 들다니.


  그러니까... 이건 누가 봐도 알이었다. 


  머리를 거칠게 흩뜨린 피터가 이마로 내려와 달라붙는 앞머리를 느끼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침착해. 어차피 처음 낳은 알도 아니잖아. 거미에 물린 직후는 아니지만, 스파이더맨 활동을 본격적으로 매일 하기 시작한 15살의 한 시점부터는 꽤 꾸준하게 낳았었다. 아마 그때쯤 무언가 때문에 호르몬이 다르게 작용되었나보다 하고 당황스러운 와중에도 어떻게든 납득하기까지 세 달이 걸렸었던 게 벌써 삼 년 전의 일이다. 삼 년동안 한 달에 한 번씩 반투명한 알을 낳아왔으니까 분명 다르게 느껴져서는 안 되는데, 그러니까 이렇게 손발을 덜덜 떠는 게 비이성적인 건데. 피터는 충혈된 눈에서 눈동자만 치켜들어 다시 학교에 가기 전에 자신이 낳은 알을 관찰했다. 


  신에게 묻고 싶었던 단 한 가지의 질문은 바로 그거였다. 혹시 저를 많이 미워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제가 이렇게 불행을 끌어당기는 자석일 리가 없는데.


  알은 눈밭만큼 환한 흰색이었다. 안이 전혀 들여다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흰색의 매끈한 표면을 가지고 있었다. 피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내일 모레가 졸업식이고 다음주에는 메이와 여행을 떠나기로 했던, 수많은 계획들이 잡혀 있고 약속된 미래가 있는 날이었다.











  토니가 기다리지 않으려고 한 건 아니었다. 정말 아니었긴 했는데, 뉴욕 시에서 성적자기결정권을 갖게 되는 나이는 17세였고, 졸업을 하는 건 18세였고. 열 입곱 살이 되는 순간 토니의 품에 뛰어든 피터 때문에 졸업할 때까지 기다려주겠다는 다짐이 무력해졌을 뿐이었다. 오늘 끝까지 가지 않으면 놔주지 않겠다는 기세로 상기된 볼을 하고 쳐다보는 자신을 토니는 마지못해 받아주는 것 같았지만, 그도 내심 기대하고 기다려왔을 거라고 피터는 확신했다.


  그래서 그 날의 첫 관계는 굳이 말할 것도 없이 끝내줬다. 피터는 당연히 토니 스타크의 명성을 들어왔고, 토니 주위에 끊기지 않는 그 다양한 수위의 루머들을 토니는 딱히 부정하거나 숨기려 들지도 않았으니 자연히 피터의 기대도 매우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대가 충족되고도 남을 정도였으니. 침대 헤드에 머리를 기대고 숨을 고르게 쉬려 노력하며 헉헉대며 애꿎은 침대시트만 잡고 늘어지던 기억이 선했다. 토니가 분명 시작하기 전에 다정하게 입을 맞추며 처음이니까 아플 거라고 했는데, 깊은 밤이 되서는 처음에 아팠는지 아닌지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저 유달리 예민한 감각 탓에 온 몸에서 차오르는 쾌락에 거의 울 기세로 얼굴을 구기고 토니, 토니, 하며 이름을 부르며 신음을 내는 것에 토니가 웃으며 여유롭게 응? 하던 얼굴이 조금 얄미웠는데 차마 미워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던 것밖에 기억이 안 나서. 그리고 그 와중에도 멈추지 않는 행위에 죽을 것 같았던 것도.


  어쨌든 그 날이 첫 날이었고 당연하게도 마지막 날은 아니었다. 피터는 섹스가 좋았다. 아니, 다른 사람과 섹스를 해본 적이 없으니까 섹스가 좋은지 아닌지는 잘 구분이 안 갔지만 토니와 하는 섹스는 확실히 좋았다. 그 온몸을 뒤흔드는 쾌감 뿐이 아니라 그저 토니 스타크가 자신과 이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한껏 차올랐다. 14살인지 15살인지 구분도 못 하고, 너는 애니까 빠지라는 말을 서슴치 않고 해대던 그 토니 스타크가 자신을 꼬마가 아니라 '피터 파커'로 봐주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좋아 'kid'라는 호칭도 어린 나이를 무시한다기보다는 애칭처럼 느껴졌다. 은근히 자신의 어린 나이에 묘한 컴플렉스를 느끼고 있던 피터 파커는 토니 스타크의 거짓도 없고 복잡하지도 않은 직선형 애정을 받고 오히려 어린 나이를 감쌀 정도로 성장했다는 거다. 그래서 졸업을 한 달 반 가량 앞둔 그는 토니의 펜트하우스 침대에 누워 이런 농담도 할 수 있었다.


  "고등학생이랑 할 수 있는 기회 얼마 안 남은 거 알죠? 오늘을 충분히 즐기셔야 해요, 토니!"


  넥타이를 풀던 토니는 못 말린다는 듯 눈을 한번 굴리더니 말했다.


  "너야말로 그거 정말 하나도 흥분되지 않는 말이라는 거 알지? 나는 페도파일이 아니거든, kid. 박애주의자로서 특정 연령대에 구애받지 않고 모두를 고르게 사랑하는 것을 지향하고 있어."

  

  나름 연상 애인을 유혹하는 멘트랍시고 던진 게 먹히지 않자 피터가 입술을 비죽였다. 그걸 흘끗 곁눈질로 본 토니는 결국 웃으며 침대에 누워있는 피터에게 손을 까딱였다. 그것만으로도 좋다고 강아지처럼 부리나케 달려가서 안기는 피터의 허리를 감싸안고 농도 짙게 키스하며 토니는 그를 슬금슬금 다시 침대로 몰아갔다.


  "뭐예요, 다시 침대로 끌고 갈 거였으면서 왜—"

  "허니, 내가 저번에 뭐라고 했더라?"


  입을 떼고 투덜거리는 피터의 목에 입술을 묻으며 토니가 물었다. 피터는 벌써 터져나오는 신음에 얼굴을 살짝 찌푸리고 눈을 꾹 감았지만 저번에 토니가 했던 말을 생각해보니 웃지 않을 수 없어 결국 빙긋 웃었다. 대답을 할 때는 꽤 해맑은 말투였다.


  "음, 섹스할 땐 쓸 데 없는 소리 안 하기?"

  "그래."

  "하지만 쓸 데 없는 소리의 정의가 뭐— 으앗!"


  결국 더는 못 들어주겠다는 듯 침대로 피터를 넘어뜨린 토니가 피터가 숨 돌릴 새도 없이 바로 그의 상의 밑으로 손을 넣었다. 곧바로 다시 맞물려오는 입술을 상대하던 피터는 그 손이 판판한 가슴을 쓰다듬듯 올라오는 감각만으로도 벅차 숨이 가빠오는 것을 느꼈다. 잠깐만, 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지만 저번에 한창 달아올라 애무하던 토니에게 잠깐만요, 저 잠깐만 타임! 하고 외쳤다가 어이 없다는 듯이 허 웃는 토니에게 몇 배로 더 공격 받은 기억이 나서 그 말은 꾹 삼켰다. 대신 피터는 으응, 하는 신음을 입술 새로만 흘리며 토니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 손길에 낮게 웃은 토니가 곧 피터의 바지로 손을 내렸다.








   



   

  언제나 다툼은 고질적인 이유로 시작되었다. 그런 면에서 그들은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너는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어. 아니, 오히려 수트를 뺏어가지 말라고 징징거리던 열 다섯 살의 네가 더 성숙해 보이는 수준이라고."

  

  그래, 이번에도 예의 그 '책임감이 없다, 그러다 주변인물은 물론이고 너까지 크게 다칠 수 있는데 대체 왜 그 생각을 못 하냐'는 이유였다. 평소의 빙빙 돌리고 꼬아 말하는 화법에 비해 훨씬 직설적이어서 하마터면 없는 비아낭을 찾아 헤맬 뻔도 했다. 하지만 토니의 생각과 다르게 피터는 결코 열 다섯 살의 그 소년이 아니었다. 울먹이며 제발 뺏지 말아달라고 빌기에는 토니와 함께 지낸 2년여의 시간이 너무 길었다. 피터는 대신 방금 치료받은 관자놀이의 상처 위에 붙어있는 거즈를 만지며 무의식적으로 토니를 노려보았다.


  "왜요, 또 수트 뺏을까말까 하면서 협박하시게요? 대체 왜 항상 책임감을 논하세요? 제가 왜 이 짓을 하는데요, 왜 친절한 이웃으로 남아있겠다 자처했는데요! 다 책임감 때문이잖아요, 제 말이 틀렸어요?"

  "넌 네가 질 수 있는 부분에서만 책임을 지려 하잖아! 책임이라는 건 선택적으로 지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네 영향이 닿은 모든 부분을 관리하는 거야. 그러니까 넌, 아직 고등학생 신분에 불과한 넌 책임을 질 수 없다고, 그게 그렇게 이해하기 힘들어?"

  "그러는 토니는요? 애초에, 2년 전의 그 빅버드 아저씨가 범죄를 시작한 이유에 토니도 간접적으로 영향이 있었잖아요! 그게 토니가 지는 '책임'인가요?"

  "나한텐 또 수트로 협박할 거냐고 물어놓고는 본인이 더 레파토리가 단조로우시네, 스파이더링. 2년 전의 사실에 집중하면서 내게 화살을 돌리느라 회피하지 말고, 오늘, 당장 오늘 네 무책임에 대해 이야기해야지. 학교에서 논리적 오류에 대해 안 배웠나?"


  토니는 본인도 모르는 것 같았지만 화가 나면 날 수록 더 나이를 들먹이며 피터를 긁는 경향이 있었다. 하필 전혀 고칠 수도 없고 컴플렉스가 있던 부분을 대놓고 건드리니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것 같아, 자신의 성장이 부정당하는 것 같아 눈물이 맺혔다. 이러면 더 애처럼 보일 뿐이라는 걸 아주 잘 아는데도. 불과 일주일 전, 토니의 펜트하우스 침대에 누워서 장난도 치며 뜨거운 시간을 보냈던 것은 꿈결이었다는 듯 토니는 단호했고 또 싸늘했다. 게다가 업스테이트 내부의 병원 시설의 침대에 앉아서 급하게 갈아입은 티셔츠를 입은 피터와는 대조되게 토니는 편안하고 큰 의자에 앉아 깔끔한 수트를 완벽하게 차려입고 있어서 안 그래도 느껴지는 멀찍한 거리감을 더 부각되게 했다.


  "...제가 무책임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연인을 대하기보다는 정말 후배 히어로 '스파이더맨'을 대하는 태도였다. 그 태도가 달가울 때도 있었지만, 동시에 사십대 후반 히어로에게 혼나는 틴에이저 히어로라는 자각이 절실하게 들어서 토니가 그 태도를 취할 때는 진심으로 무서워지기도 했다. 토니 말마따나 열 다섯 살,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인 걸 알면서도 왜 아무런 연락도 안 했는데? 혼자 해결하려는 생각을 버리라고 했잖아. 네가 네 자의식 채우느라 혼자 다 해결하려다 네가 보지 못 한 시민들도 다치고, 너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어쩔 거냐고. 오늘만 해도 열 명 넘는 사람들이 경상을 입었고, 그보다 네 꼴을 봐! 피 질질 흘리면서 들어와놓고 내가 웃으면서 받아주길 바랬어?"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었어요, 진짜로! 오늘— 그냥 오늘 컨디션이—"

  "또 시작이네, 왜 도움이 필요하다는 걸 인정하지 못 해? 아주 론 레인저가 따로 없어."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니까! 피터는 그렇게 소리 치는 대신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손바닥으로 누르며 진정하려 애썼다. 이건 자의식 따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차라리 상황 착오라고 하는 게 맞았다. 분명 평소같으면 잘만 처리했을 일인데도 이상하게 몸이 따라주지 않아서 일을 그르쳤으니까. 토니 입장에서 그 변명이 얼마나 미숙하게 들릴 지는 알았지만 피터 입장에서는 결국 빌런을 잡기도 했고 최대한 할 수 있는 대로 경찰을 도와 처리하고 난 뒤에 듣는 말이었으니 묘하게 억울했다. 게다가 분명 몸이 안 좋다고 이야기했는데 그건 듣지도 못 한 것처럼... 피터가 가만히 있는 동안 토니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여전히 가시 돋힌 목소리였다.


  "그렇게 이해하기 어려우면, 너랑 가까운 예시를 들어줄까. 그래, 네가 kid니까 딱 아기로 예시를 들어줘야겠군. 생각해봐, 네가 아이가 있어. 너는 무척이나 좋은 사람이고 아기를 무척이나 사랑하지만 너도, 네 배우자도 모종의 이유로 아기를 키우기는 적합하지 않다고 하지. 그래, 뭐 가난하다고 쳐."


  가난하다고 칠 필요 없이 충분히 가난한데요. 피터는 그 상황에도 입을 놀리려다 다물었다. 일단 토니 스타크의 애인인 이상, 그래도 그의 돈을 받고 가난을 탈출하는 건 최대한 피해왔지만, 가난하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조금은 죄책감이 들어서.


  "기저귀도 살 수 없고, 분유도 살 수 없고,  또, 젠장, 내가 육아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필요한 건 다 못 산다고 가정해. 그럼 이때 너는 아기를 최선을 다해 키워야 할까?"

  "...그래야죠. 아기를 혼자 둘 수는,"

  "아니. 너는 능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속히 인정하고, CPS (Child Protection Service, 아동 보호 단체)에게 연락해서 입양 가능한 가정을 찾아봐야지. 물론 그 전에 능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자각하고 아이를 위해서라도 낳지 않는 게 최선이었겠지만."


  피터가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던 손을 떼고 토니를 바라보았다. 토니는 단호한 말과는 달리 꽤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동자는 평소보다 훨씬 진해서 까매보이기까지 했다. 어려서부터 표정을 감추는 것을 배워온 결과는 얼굴에 드러났지만, 히어로로서의 수많은 경험들은 그 시선 속에 차곡차곡 쌓여 압축된 것처럼 보였다. 피터는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토니가 겪었을 그 산더미와도 같은 책임감을 요하는 사건들에 태클을 걸 수 없음을 직감했지만 이대로 항복하기에는 이른 것 같아 토니가 든 예시를 걸고 넘어지기로 했다.


  "말은 쉽게 할 수 있겠지만요, 토니, 정말 사람 마음이 담겼을 땐 그럴 수가 없잖아요. 의도가 중요하다고요. 자신의 아이를 끝까지 사랑하려는 그 마음가짐이 부모를 만드는 거 아닌가요? 토니 애라면 아마,"

  "그렇게 하는 게 맞는거지. 그래서 내가 평생 부모가 될 생각이 없는 거고! 난 바쁘고, 아버지라고 있는 작자한테서는 못된 것만 배워서 애를 잘 돌볼 자신이 없어서 애초에 애같은 건 생각하지도 않았어." 


  토니가 피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게 내가 아는 '책임'이야. 동화책에나 나올 미담이 아닌 현실의 책임은 그렇게, 자신을 지워가면서라도, 모두 알맞게 잘라내는 거라고. 세상에는 좋은 의도만으로는 풀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거든."


  그 말을 하고 토니는 일어나 수트 자켓을 한 번 펴서 정리하더니 피터가 앉아있는 방을 나섰다. 피터는 멀어지는 토니의 구두의 굽 소리를 들으면서 한 번 '토니!'하고 불러보았지만, 들었을 게 분명함에도 분노가 더 컸던 건지 그는 그날 다시 피터에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날은 그 주가 되고, 그 주는 그 달이 되는 것은 토니와 피터 둘 다 예상한 바였다. 쉽게 해소되지 않을 갈등인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달이 몇 년이 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졸업식을 3주 반 정도 앞둔 날이었다.






  





  쿵. 쿵. 피터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진정해, 진정해. 피터는 배낭 속에 들어있을 알이 깨지지 않게 배낭을 앞으로 매고 꼬옥 안은 채로 걷고 있었다. 중간에는 버스도 타고 택시도 탔지만 아무래도 안 보이는 골목에서 걸어가는 게 제일 안전할 것 같았다. 스파이더맨이니까 꽤 오랜 거리를 종종걸음으로도 걸을 수 있어서, 쓰고 있는 모자와 후드까지 합하면 들키지 않을 확률은 꽤 높다고 느껴졌다.


  피터는 도망을 치고 있었다. 15살 때의 그 귀여운 해프닝 이후로 토니가 일부러 수트에서 추적기를 뗄 수 없게 만들었다는 걸 알아서 홈메이드 수트 외에는 챙길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마저도 스파이더맨 활동을 더 할 수 있어서 챙겼다기보다는... 피터가 입술을 말아넣으며 배낭을 더 품 안으로 깊숙히 넣어 안았다. 그냥, 없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얼마나 오래 떠나있을지도 몰랐고, 아마 평생 떠나있을지도 몰랐는데 그 시간동안 스파이더맨이 아닌 자신으로만 지내야 한다는 생각은 하고 싶지도 않았다.


  피터는 정말 도망을 치고 있었다. 알이라는 걸 알았을 때는 멀쩡했고, 평소와는 다른 색깔과 윤택에 그 안에 정말 살아있는 생명체가 있다는 것을 실감했을 때는 몸이 움직여지지도 않았는데 머릿속에 한 생각이 스쳐지나간 후에는 몸이 이미 나서서 짐을 싸고 메이에게 남길 쪽지를 쓰고 있었다. 


  아마 이 안에 든 생명체는, 인간이든 뭐든, 토니와 자신의 아이라는 것.

  그리고 피터는 토니가 말할 '책임'을 빌어먹을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피터는 평소에 아이를 유난히 좋아한 적도 없고, 누구나 그렇듯 어린 아기들을 귀여워했지만 자신의 아이를 키운다는 상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피터의 알 속 생명체는 아이일지, 거미일지, 외계 생명체처럼 생긴 뮤턴트인지도 불분명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간적인 충동으로 피터로 하여금 믿을 수 없는 행동력을 발휘해 달아나게끔 한 이유는... 토니의 아이니까. 자신의 아이인 동시에 토니의 아이라는 궁극적인 연결 고리니까. 그래, 절박하다면 절박한 거고 구질구질하다면 구질구질한 이유였다. 이 아이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아이는 자신이 그렇게도 목말라하는 토니의 애정의 증표와도 같았다. 


  이 아이를 죽이고도, 혹은 이 아이를 보내버리고도 피터는 토니가 자신을 사랑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토니가 차갑게 아이를 포기하는 말을 들을 때에도 피터는 무너지지 않을 수 있을까? 

  

  피터는 그에 대한 답이 없었다. 어쩌면 피터에게는 이렇게 믿지 못할 타이밍에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보다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더 불운처럼 느껴졌을 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토니한테 이 아이를 키우라고 종용하기에는 피터는 자신이 이 아이에 대한 책임이 그보다 크다고 느낄 만한 이유도 있었다. 그래서 내린 충동과도 같은 결정이 '도망'이었다. '토니에게 들키지 않고 아이를 키우면 포기할 필요가 없다'라는 어쩐지 허접하지만 지금의 피터에게는 바이블이나 다름 없는 생각의 흐름. 토니 스타크와 어벤져스의 레이더에 걸리지 않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지금의 피터는 솔직히 토니가 그렇게까지 열심히 자신을 찾을 거라는 확신도 들지 않았고... 그렇게 나가버리고 연락이 한 달 동안이나 없었던 걸 보면 이번에야말로 정말 정이 떨어진 것일지도 몰랐다. 그럴 때가 됐기도 했다. 어쨌든 만약 굳이 적선하는 셈 찾으려고 드신다고 해도... 피터는 어두운 거리를 눈을 찌푸리고 쳐다봤다. 밤에 출발해서 벌써 새벽녘이었지만 이미 오랜 거리를 왔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 작은 거미는 숨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다는 소리다.


  순간 피터는 처음으로 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당황한 피터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드문드문 건물이 있는 거리였지만 도심은 아니었고, 씨씨티비 없는 조용한 골목이 널려있었다. 그 중 하나로 뛰어간 피터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가방을 지익 하는 소리와 함께 열고 알을 조심조심 꺼냈다. 지금 부화...하는 건 아니겠지? 진통같은 개념이겠지? 


  그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알에는 다음 순간 빠직 하는 소리와 함께 금이 갔다. 세상에, 이거 어떻게 해야하는 거야? 따뜻하게 품어줘야 하나? 아니, 그건 알이 부화하기 전에 하는 거였던가? '부화'가 맞는 말이긴 한가? 어정쩡하게 알을 반쯤은 안고 반쯤은 손으로 받쳐든 자세로 전전긍긍해하던 피터의 품에서 알이 쪼개지는 소리와 함께 자그마한 아기 손 하나가 튀어나왔다. 앗, 사람이다. 피터는 속으로 조금 안도했다. 네가 어떤 생명체든 간에 사랑해줄게, 아가, 같은 부성애 넘치는 생각을 하기에는 아직 '도망'에 더 초점을 맞춘 터여서 스스로도 거미나 영화 '에일리언'에 나오는 생명체같은 뮤턴트가 나왔을 때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자신은 없었어서. 알이 깨지기 쉽게 남아있는 조각들을 조금씩 깨서 치워주던 피터의 얼굴에는 저도 모르는 작은 미소가 서려 있었다.


  문제는 다음 순간. 아이의 얼굴이 알에서 나와 피터를 똑바로 쳐다본 그 순간. 문자 그대로의 신생아임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두 눈이 피터를 보며 와앙 울어제낀 그 순간이었다.


  보통 산모들은 아이를 낳고 처음 얼굴을 봤을 때 기뻐서 아무 말도 안 나온다던데, 피터의 입은 그 순간에도 쉬지 않았다. 사실 몇 시간동안 쉬다가 이제야 첫 기회를 얻은 것에 가까웠다. 아이를 보고 처음 나온 말이 전혀 긍정적이지 않은 것에 대한 피터가 그나마 할 수 있는 변명이었다.


  "...망했.....다."


  아이의 얼굴은, 정말 누가 봐도. 길거리에서 찰나에 스쳐지나간 사람이 봐도, 원래 그 얼굴을 잘 모르는 사람이 봐도, 백 미터 달리기를 하느라 전속력으로 뛰고 있는 사람이 지나가다 흘끗 봐도.


  누가 봐도 토니 스타크의 어릴 적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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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편 내외로 끝날 짧은 단편 

RHP 11편 번역이 끝나기도 전에 다 써뒀는데 퇴고할 용기가 안 나서 보류하다가 그냥 대충만 수정해서 올립니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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