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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피터] 신분증을 제시해주세요 3

토니의 아이를 데리고 도망치는데 처음부터 들킬 위기에 처해지는 피터의 이야기

토니는 단 한 순간도 낭비할 마음이 없었다. 아밀리아 세라노가 끼고 있는 안경에 달린 카메라로 상황을 주시하던 그는 눈 앞에서 덩치 큰 남자 한 명이 피터라는 사람을 못 봤으며 여기 들른 사람은 네드라는 애 뿐이라고 말하자마자 그녀가 차고 있는 블루투스 이어폰에 들리도록 입을 열었다.


 "백 퍼센트 여기야. 뚫고 지나가."


  이 와중에도 토니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헛웃음이 터져나와서였다.
  거짓말은 영 꽝이라고 생각했는데, 피터, 이름으로 거짓말을 치는 건 꽤 신빙성 있게 잘 했나보네. 하지만 한참 멀었어, 그렇게 절친 이름을 대버리면 나같은 사람은 단번에 너라는 걸 알잖아. 스타크 씨에게는 말하지 말라는 발칙한 으름장에 이 서툰 거짓말을 더하니 고작 이런 걸로 자신을 막으려 들었다는 게 기분 나빠질 정도였다. 너 네가 세계 최고의 천재들 중 한 명이랑 연애하고 있다는 걸 알고는 있는 거야?


  그러나 하필 헬기장에 대기하고 있던 보안 요원이 스타크 인더스트리에서도 고지식하기로 유명한 아밀리아 세라노였다는 게 화근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꽤 강단이 있는 요원으로 안 그래도 소문이 난 그녀는 토니의 명령보다도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른 수사 원칙을 따라버리기로 한 것인지, 토니의 말에도 그저 굵게 웨이브 진 검은 머리를 어깨 너머로 휙 쳐서 넘기는 걸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문을 가로막고 선 남자를 똑바로 보며 말을 이었다.


  - 하지만 핸드폰 위치 시그널이 여기서 잡히는데요. 여기 피터 파커의 핸드폰이 있지 않다면 잡힐 수가 없는 시그널입니다.
   "저기, 아밀리아? 그냥 무시하고 들어가라니까."
  - 확인해도 허탕만 칠 겁니다, 여기는 없다니까요. 오늘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라는데도 그러네."
  "세라노!"
  - 그럼 정말 확인하봐도 되겠—저기, 좀 기다려주실래요? 영장이 있는 것도 아닌데 허락은 받아야 할 거 아니에요!"
  - 네?
  - 아, 그쪽한테 한 말이 아니고. 어쨌든 들어가봐도 되겠습니까?"


  안 된다고 하려는 듯 입을 열던 남자는 아밀리아가 날카롭게 그를 쏘아보자 주눅이 든 듯 석연찮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빠른 몸짓으로 남자를 지나쳐간 아밀리아가 곧바로 현관문과 이어져 있는 거실로 돌입했다. 토니는 이제서야 움직인 그녀에게 '꾸물대다가 거북이한테 경주를 져버린 토끼 이야기 못 들어봤어?'라고 쏘아붙이려 입을 열었지만 곧 카메라로부터 전송되어오는 화면에 할 말을 잃었다.


  거실은 마치 돌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만 같았다. 누군가가 뭔가를 잔뜩 집으려고 한 것처럼, 마치 타임 챌린지를 하는 좀도둑이라도 든 것처럼 온갖 것들이 뒤집어져 있었다. 순간 토니는 피터가 도망을 치기 위해 금품이라도 필요로 했나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거실 안에 몇 되어보이지도 않는데다가 겁도 없이 척 보이는 곳들에 놓여져있는 금품들은 누가 가까이 가지도 않은 듯 멀쩡했다. 대체 뭘 그리 열심히 챙겼나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을 때쯤 아밀리아가 먼저 선수를 쳤다.


  - 혹시 뭔가 없어진 물품 없으십니까?
 
  아밀리아를 따라 거실로 들어온 남자가 거실의 상태를 지금에서야 확인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뒷목을 긁적이던 손도 뻣뻣하게 굳은 채로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려 상태를 확인하던 그가 아, 하고 앓는 것 같은 탄식 소리를 냈다. 토니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을 때는 아밀리아와 같은 타이밍이었다.


  "왜 저래?"
  - 왜 그러십니까?
 
  남자는 일순간 아밀리아가 아직 있었다는 걸 잊었던 사람처럼 어깨를 움찔하며 놀라더니 순순히 입을 열었다.


  - 없어진 게... 있네요. 옷이... 먹을 것도 좀 없어졌고...
  - 그렇다네요, 어떻게 하실래요?


  토니는 대답을 하려 입을 열었지만, 역시나 입술 새로 나오는 말이 없어 멍하니 아밀리아의 안경에서 전해져오는 피드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 유명한 토니 스타크를 하루에 두 번이나 할 말을 잃게 하는 사람은 그의 인생에서는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었는데, 게다가 10분도 안되는 시간에 두 번이나 할 말이 없게 하는 사람은 없다시피 했는데, 어째선지 이 열 여덟밖에 안 된 남자애는 첫만남부터 해서 매번 그 대단한 일을 해내고는 했다. 그리고 토니는 머릿속에서 그 대단한 남자애가 황급히 음식과 옷가지를 쓸어담는 모습을 불가피하게 떠올리며 아까부터 줄곧 묻고 있던 그 질문을 다시 머릿속에서 던졌다. 이번에는 또 어떤 위험에 스스로를 아낌없이 던질 생각이길래 서민들을 도우며 살고 싶다던 그 피터 파커가 남의 옷과 먹을 것들을 챙겨 달아나게 되었냐고. 이 와중에도 막상 챙긴 게 고작 그것들이라는 사실은 너무도 피터 파커 다워서 화마저 났다. 도망을 칠 거면 좀 제대로 된 걸 챙겨서 달아나란 말이야, 돈도 없으면서 옷이랑 먹을 거 몇 개로 얼마나 어떻게 살려고. 친절한 이웃은 때로는 그 '친절함'에 필요 이상으로 가치를 두는 것 같았다.


  - Boss?


  아밀리아의 독촉에 속으로 듣지도 못할 피터에게 잔뜩 화풀이하고 있던 토니가 움찔하며 다시 화면을 날 선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래, 그러고 보면 도망 친 애를 잡기 위해 이 짓을 하고 있는데 왜 도망치면서 제대로 챙기지 않느냐고 짜증을 내는 건 앞뒤가 맞지 않았다. 일단 찾고 나서 피터에게 인생의 교훈이든 뭐든 해줄 수 있는 것이다. 찾고 나면 인생의 교훈보다도 먼저 해야 하고 들어야 할 말들이 산더미였지만.


  - 아, 잠깐. 이 핸드폰, 당신 겁니까?


  아밀리아의 말에 토니의 눈이 화면의 정중앙으로 들어온 검은 핸드폰 하나를 찾아냈다. 그리고 그걸 보자마자 토니는, 남자의 의외로 솔직한 부정을 들을 필요도 없이 그녀의 질문에 단번에 대답해줄 수 있었다. 거미줄처럼 깨지다 못해 부서진 화면에 요즘은 찾아나서려 해도 잘 보이지도 않는 구형 아이폰 모델. 토니가 아는 사람 중 저런 핸드폰을 들고 다니는 사람은, 애인이 바꿔준다고 몇 번이고 말해도 기어코 아직 고장 안 났으니까 괜찮다고 끈질기게 사양하는 남자애 한 명밖에 없었다.


  "프라이데이, 스캔해. 마지막으로 사람 손이 닿은 게 언제야?"
  [화면 속의 휴대폰은 약 3시간 24분 간 디스플레이가 꺼져있었으며, 약 5분 37초 전 외부의 충격으로 인해 전원이 꺼졌습니다. 따라서 잔류열 및 휴대폰 기기의 기종을 종합하였을 때 마지막으로 사람의 손이 닿은 것은 18세 남성의 손의 온도의 범위를 고려하였을 때 약 8.87초 가량의 오차 범위로 5분 35초와 5분 38초 사이입니다.]


  토니가 손을 뻗어 아밀리아의 이어피스로 연결되는 마이크를 껐다.


  "베이비 모니터링 프로토콜 속의 스파이더맨의 평균 속도를 고려했을 때 5분 37초동안 갈 수 있는 거리는?"
  [Running, walking, web-slinging 중 어느 수단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뛴다고 치지."
  [약 2.167 킬로미터입니다.]


  역시 누가 메타휴먼 아니랄까봐 무진장 빠르네. 아니, 메타휴먼 치고는 그렇게 빠른 것도 아닌건가. 하긴 거미의 힘 중에 빨리 달리기는 없기는 한... 아니, 다시 집중. 토니는 머리가 지끈거려와 관자놀이에 검지와 중지를 대고 힘을 주어 원을 그리듯 문질렀다. 그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은 게 의아했던지 아밀리아의 화면에서는 몇번 시야가 휙휙 바뀌더니 다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토니가 손짓으로 다시 마이크를 켰다.


  - 어떻게 하실 거예요?
  "좀 많이 늦은 모양이야. 벌써 2 킬로미터 정도는 갔겠다던데."


  아밀리아가 휘익 휘파람을 부는 소리에 토니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 촉 진짜 좋나보네. 진작 도망친 거잖아요? 아님 엄청 빠르거나. 동서남북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니까 제가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그래, 인간이 잡기에는 좀 한계가 있는 애지. 좀 여러모로 엄청나거든. 프라이데이?"
  [Yes, boss?]
  "네가 잡은 반경 내를 위에서 줌으로 당겨서 데이터 베이스에 등록된 피터 파커의 신체와 제일 알맞은 인물들을 추려내. 근방 CCTV 영상도 모두 분석하고. 피터 파커가 확실히 아니라는 증거를 찾기 전까지는 현재 브루클라인에 있는 갈색 머리 남자애란 남자애한테는 모두 붙어서라도 찾아내."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 와, 그렇게까지? 브루클라인의 브루넷 남자애들은 죄도 없이 몽땅 사생활 침해 당하게 생겼네. 대체 피터 파커라는 애가 누군데 그렇게 중요해요?
 
  그러게. 그 애는 대체 뭐하는 애길래. 가장 쉽지만 가장 할 수 없는 대답은 그 애는 스파이더맨이고 또 뉴욕의 친절한 이웃이기 때문에 뉴욕 시민들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잡아와야 한다는 것이었고, 동시에 차라리 타인에게 해주기에는 더 쉬운 말이지만 토니가 입 밖으로 내기에 가장 어려운 대답은 그 애가 토니에게 가지는 무게를 설명해주는 것이었다. 다만 벤 다이어그램이 겹쳐지듯 두 대답을 머릿속에 동시에 떠오르니 교차점은 너무도 선명했다.
  뉴욕 시민에게든 토니에게든 간에, 항상 곁에 있어주던 그 스파이더맨이, 그 피터 파커가 갑자기 없어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게.
  그러나 그것을 입 밖에 내뱉는 건 양쪽으로 자살 행위일 게 뻔해, 토니는 아밀리아가 '전 여친 아들이라도 되나?'하며 궁금해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나타샤가 보면 또 어울리지 않게 그 말 많은 입을 다물고 있다고 무슨 일이냐고 물을 만큼 조용히 있던 그는 프라이데이의 홀로그램에서 순간 뭔가 붉게 반짝여 미간을 좁혔다.


  "아빠를 기쁘게 해줘, 프라이데이."
  [반경 내에 피터 파커와 신체가 대체로 일치하는 인물 네 명을 찾아냈습니다. 동북 방향 0.98 킬로미터 부근에 한 명, 동서 방향 1.72 킬로미터 부근에 한 명, 남서 방향 2.04 킬로미터 부근에 한 명이 위치해 있습니다.]
  "좋아, 각 방향으로— 잠깐, 네 명이라며?"
  [말씀 드리는 동안 한 명이 용의선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용의자라니, 무슨 범죄라도 저지른 사람 같잖아. 자비스였다면 일부러 건방지려고 용의자라고 장난을 쳤겠지만 프라이데이는 그런 장난을 치는 성격으로 프로그래밍해놓은 것도 딱히 아니어서 토니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


  "왜?"
  [동년배로 추정되는 여성의 옆에서 신생아를 안고 걷고 있는 뒷모습이 포착되었습니다. 피터 파커는 미혼에 자녀가 없는 것으로 기입되어 있는 것을 감안해 결과에서 제외했습니다.]
 
  토니가 한숨을 내쉬며 한 손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뭔가 특이사항이 있는 것 같아서 순간 의심해봤더니 고작 평범한 고등학생 정도 나이의 동년배 커플이라니. 아밀리아가 사생활을 침해하는 거라고 반쯤 장난을 쳤을 때는 원래 타고나기를 사생활이 없던 마당에 본인마저 갖지 못한 남들의 사생활을 딱히 지켜주는 편도 아닌터라 아무렇지 않게 넘겼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남들의 연애 생활마저 염탐하고 싶지는 않았다. 예쁜 사랑하게 내버려 드려야지. 그동안 나도 내 예쁜 사랑 좀 전진해보자고.


  "그래, 그럼 그 세 명을 좀 추적해봐. 네가 말하는 그 '용의선상'에 한 명만 남을 때까지. 그동안 보안 요원 한 명씩 따라붙으라고 하고."
  [스타크 인더스트리의 가장 빠른 헬리콥터로 이동할 시 48분이 소요됩니다.]


  그럼 기다릴 수밖에.
  그 애는 날 기다리지 않겠지만.


 
 






 
 
 


 


  "스펙타클 섬이요?"
  "네, 그게 진짜 섬 이름이에요. 게임에서도 나오는 것 같지만, 아무튼 진짜로 보스턴 하버에서 배 타고 가시면 나오거든요? 되게 티켓도 싸고—"


  아이의 입에서 터져나온 커다란 울음소리가 말을 끊은 건 한순간이었다. 아직 적응이 덜 된 피터가 순간 화들짝 놀라 아이를 한 손으로 받친 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배낭을 열었다. 분유병을 꺼낸 뒤 미안한 눈빛으로 방금까지 함께 대화하고 있던 여자를 흘끗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죄송해요, 얘가 배고픈가 봐요."
  "괜찮아요, 천천히 하세요. 근데 아기 그렇게 받치시면 위험하지 않아요?"


  아, 맞다! 피터가 서둘러 아이를 두 손으로 안고 그중 한 손으로는 안전하게 아이의 목을 받치며 입에 젖병을 물렸다. 브루클라인에서 진정한 '친절한 이웃'들을 많이 뵙네. 분발해야겠어. 젖병을 문 아이는 다행히 이번에도 배가 고파서 열심히 분유를 받아먹어 피터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길거리에서 기저귀를 갈아야하는 불상사가 아직 등장하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했다. 푸른 하늘에서는 딱히 헬리콥터니 제트기니 하는 기체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아파트를 나섰을 때, 아이를 최대한 안전하고 안 보이게 껴안은 채로 종종걸음으로 걸음을 재촉하던 피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생각할 틈도 없이 재빨리 걸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CCTV를 최대한 피해서 걸어야하고, 또 최대한 멀리 걸어야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으니 주위를 살필 새도 없었다. 아이를 안고 후드를 뒤집어쓰고 큼지막한 배낭을 맨 채로 빠르게 걸어가는 소년이 이상했던지 몇몇 사람들이 힐끔거리기는 했지만, 누군가가 직접 말을 걸었을 때는 열심히 뛰듯 걷기 시작한지 5분은 족히 지난 뒤였다. 저기요! 하며 부르는 목소리에 잠깐 뒤돌아본 피터는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젊은 여자를 저도 모르게 경계하는 눈으로 쳐다봤지만, 그녀는 진심으로 걱정되는 눈빛으로 뭔가 도와줄 수 있는 길은 없냐고 물어볼 뿐이었다. 피터는 그에 눈을 몇 번 깜빡이며 가장 가까운 버스 정류장이 어딘지를 물어봤고, 그녀는 자신도 가는 길이었다며 선뜻 데려다주겠다 나서기까지 했다.


  그녀와 함께 걷는 10분동안 피터는 꽤 많은 정보를 알아냈다. 우선 그녀가 나쁜 의도로 데려다주겠다고 나선 것은 아닌 것 같다는 단정은, 피터가 CCTV가 있을 것 같아보이는 골목이 나올 때마다 움찔하며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웅크리기에 급급한 것을 보면서도 의아한 눈으로 볼 뿐 딱히 개입하지 않는다는 근거를 바탕으로 내려졌다. 피터는 그에 더불어 그녀가 꽤 말이 많고 활발하다는 점이나, 퍼스널 스페이스가 작은 편인지 피터의 옆에 꽤 가까이 붙어서 걷는다는 사실도 관찰해냈지만, 첫만남에서 남의 침대에 덥썩 앉을 만큼 퍼스널 스페이스가 작은 남자가 생각나서 그 점은 재빨리 머릿속에서 비웠다. 그리고 나서 나온 대화 주제가 바로 저것이었다. '스펙타클 섬.'


  피터는 다 쓴 분유병을 대충 가방에 쑤셔넣으며 '섬'이라는 선택지를 고려했다. 우선 말 그대로 '지나가는 행인'이 알 정도라면 규모도 꽤 큰데다가 관광 사업도 어느 정도 성행하는 섬일테니 직업이나 숙박은 구하려면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열 여덟 살짜리 남자애가 대체 무슨 수로 직업을 구하고, 호텔이 대부분일 관광지에서 어떤 돈으로 숙박을 하고, 또 가장 중요하게도 어디에 아이를 맡길지는 눈앞이 캄캄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뭘 하나 제대로 해보려 해도 아무것도 못 하는 데다가, 잘 사는 건 고사하고 살아남기조차 버거운 환경이었다. 피터가 초조하게 눈을 굴리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하지만 또 다르게 생각해보면 섬이라는 게, 내륙보다는 들킬 확률도 확연히 적어지는 데에다가 위에서 나열한 문제들은 섬이고 자시고 어딜 가나...


  "저기요?"
  "네?"
  "다 왔어요."


  제 버스도 곧 올 것 같고. 그렇게 덧붙이며 앞을 가리키는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가 보자 과연 도시의 외곽에서 관리도 없이 10년은 족히 홀로 버텨온 것 같은 작은 버스 정류장이 세워져 있었다.그래도 보스턴이라는 규모가 꽤 큰 도시에 속하는 브루클라인의 정류장이라서인지 멀쩡히 달려있는 전광판에는, 2146번이라고 쓰여있는 버스가 1분 후 도착한다는 말이 깜빡이고 있었다. 그게 그녀의 버스라는 것을 직감한 피터가 아이의 머리를 단단히 받치며 제 쪽으로 조금 끌어오고는 팔자눈썹을 한 얼굴로 그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정말로요. 하마터면..."
  "천만에요. 근데 하나 물어봐도 돼요?"


  피터의 어깨가 굳었다. 상대는 큰 눈을 깜빡이며 순진무구한 얼굴로 물어온 질문이었지만 공교롭게도 피터에게는, 이런 순간마다 자신이 '도망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수밖에 없는 피터에게는 전혀 순진하지 않은 질문이어서 그랬다. 보통 저런 식으로 서두를 여는 말 뒤에는 지극히도 개인적인 질문이 따라붙었고, 또 피터는 그런 질문에 전혀 답해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갑자기 품 안에 안겨 얌전하게 눈을 깜빡이고 있는 아이의 존재가 무겁게 느껴진 피터가 바싹 메마른 입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그는 수트를 입고 있든 말든 간에, 언제나 예외 없이 '친절한 이웃'이었기 때문에.


  "그럼요."
  "애 이름이 뭐예요?"


  왜 알의 색이 다르지? 이 알 속에는 뭐가 들어있을까? 아이는 왜 우는 걸까? 배고픈 아이에게는 뭘 먹여야 할까? 기저귀는 대체 어떻게, 언제 갈아야 하는 걸까? 내가 기저귀를 태연히 잘 갈 수 있기는 할까? 나 지금 돈은 충분할까? 이 아이를 누구에게도, 특히 한 사람에게 들키지 않고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되고, 또 그래서 일생일대의 선택을 하게 되고, 또 버스와 택시를 타고 오밤중에 도망친 도시에서 처음 만난 사람을 믿고, 태어나서 한 번도 해보지 못 했던 아이에게 분유를 먹이는 일이나 옷을 입혀주는 일을 하면서 피터는 아이를 이미 꽤 오랜 시간동안 머릿속에서 한 번도 빠뜨리지 않았지만, 아이 때문에 머릿속을 잠식하던 저 수많은 질문들 중에 저렇게 마음 편하고 태연한 질문은 없었다. 저 질문은 마치 산부인과에서 출산하고 지친 안색으로 행복하게 아이를 받아드는 산모에게 들어오는 질문과도 같았고, 그에 대한 답은 산모가 그 자리에서 임기응변으로 대답해야 할 것이 아니라... 아. 피터가 갑자기 머릿속을 침투하듯 비집은 생각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형적인 가정에서의 저 질문에 대한 답변은 산모가 출산 한참 이전에 배우자와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정해둘 만한 그것이었다. 이 아이의 얼굴이 누구를 더 닮았으면 좋겠는지, 성격은 어땠으면 좋겠고 또 어쩌면 어린이집은 어디를 보내고 싶은지 따위를 이야기하며 예쁘게 뜻을 붙여주며 평생 달고 살 이름을 열심히 고를 그 순간에. 배우자와 함께, 최소한 파트너와 함께.
  피터는 마치 찬물을 뒤집어쓴 것만 같았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아이를 안고 부모라면 이렇게 아이를 보기만 해도 행복한 걸까 하고 고민하던 과거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 와중에도 앞에 서있는 여자는 피터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순간 피터는 머리를 재빨리 굴렸다. 얼굴만 보면 '토니 스타크 주니어'같은 이름을 붙여도 아무도 항의하지 못 하겠지만 그 이름은 분명 논외였고, 그럼 대체 뭐라고 대답해줘야.... 토니 미들 네임이 뭐였지? 에드워드. 어, 그럼, 음—


  "어, 음, 에드?"
  "에드요? 예쁜 이름이네요!"


  네가 평생 달고 살 만한 이름을 이렇게 정해서는 안 되는 건데. 이렇게 초췌한 얼굴로 어젯밤부터 갈아입지도 못 한 큼지막한 후드티를 뒤집어쓰고 낡은 버스를 기다리며 어딘지도 잘 모르겠는 섬을 향해 가려는 순간에 둘러대듯 대충 지으면 네게 너무 미안해지는데. 피터가 파르르 떨리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억지로 웃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조금은 거칠게 멈춰선 버스를 흘끗 보던 여자가 피터에게 미소를 지으며 목례했다. 따라 엉겹결에 고개를 살짝 숙인 피터는 뒤이어 들려오는 그녀의 말에 딱딱하게 굳었다.


  "그럼, 에드 보호자님, 안녕히 가시고요. 다음부터는 에드 얼굴 좀 더 잘 가려주세요, 숨기시는 분 답지 않게 너무 무방비하시네."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것이 피부로도 느껴질 정도였다.
  품 속에서 꼼지락대는 아이를 더 깊게 안은 피터는 그 말과 함께 여자가 버스에 타버린 모습을 홀린 듯이 바라보다가, 심장이 너무 빨리 뛰는 바람에 아이에게도 닿을까봐 갑자기 걱정이 되어 아이를 조금 더 멀찍이 떨어뜨렸다. 그러다가 또 애 얼굴을 더 잘 가리라는 그 충고일지 경고일지 모를 말을 상기해서 다시 아이를 꼭 안기를 반복하던 피터는 결국 아이가 너무 움직임이 많아져 칭얼거릴 때쯤에야 그 바보같은 짓을 멈출 수 있었다.


  들킨 걸까? 저 선량하다고 생각했던 여자가 사실 피터가 다시 들키게 되는 함정이었던 것은 아닐까? 피터가 텅 비어서 바람소리만 들리는 도로에 다시 시선을 돌렸다. 묘하게 내리막길로 이어지는 도로가 자신의 처지를 암시하는 것만 같아서, 고작 1일 천하로 끝나는 초라한 도피의 막을 상징하는 것 같다고 생각한 피터의 속눈썹이 찬바람에 파르르 떨렸다.


  그런데... 왜 이대로 들켜도 썩 나쁘지 않은 것 같지?


  피터는 굉장히 지쳐 있었고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그만 두고 싶었다. 얼굴은 더러워져 있었고, 씻지도 못 한 몸이 찝찝했고, 후드티와 겉옷은 추위를 견디기에는 너무 얇았다. 메타휴먼이라서 빨라진 신진대사 때문에 배가 고파 퀸즈의 달마르 샌드위치가 생각이 났고, 메이가 타겟에서 세일을 하길래 사왔다는 체크무늬 셔츠가 입고 싶었다. 즉, 피터는 CCTV를 피해서 도망치는 불법 체류자같은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 열 여덟 살의 미드타운 고등학생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졸업식을 끝마쳐 숙모와 환하게 웃으며 카메라를 보고, 더이상 못 볼 친구들에게 작별을 고하며 마지막으로 다같이 한 번 식사를 하고, 조금 늦은 시간에 패트롤을 돌기 시작해 끝났을 때는 아무도 없는 방으로... 오는...


  저절로 숙여진 피터의 고개는 피터의 눈을 얄궂게도 품 속에 안겨있는 아이의 눈과 마주치게 했다. 그렇네. 퀸즈로 돌아간 피터 파커의 삶에는 이 아이가 없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다시 토니와 마주친다고 가정했을 때, 토니도 없었다. 토니가 강경히 내세운 입장에 반대되는 아이를 낳고 도망친 피터는 토니가이 아이도 자신도 받아주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없는 방'으로 그가 말 그대로 거미처럼 기어들어가는 그 삶에서는 아이는 어딘가의 입양 시설에, 토니는 억만장자 플레이보이로서 자신의 타워에, 피터는 퀸즈의 작은 아파트에 모두 따로 있었다. 지금의 삶에서 피터가 그나마 함께할 수 있는 아이조차도 없고, 그때나 지금이나 토니는... 없을 것 같았다. 피터의 이공계에 특화된 뇌에서 이건 고민해볼 문제도 아닌, 너무나도 손쉬운 계산이었다.


  피터는 마음을 굳히며 아이를 들고 있는 팔을 조금 더 안정적으로 바꿔 들었다. 애초에 이렇게 힘든 결정을 한 이유를 잃지 말자는 생각에 되려 더 굳건해진 피터는 '너무 무방비하다'라는 충고를 되새기며 아이의 얼굴을 타인이 절대 볼 수 없을 각도로 만들기 위해 더 가까이 들며 갑자기 든 생각에 바람소리만 내며 웃었다. 그러고 보면 그 충고를 들은 게 처음이 아니라서.


  몇 달 전이었지? 열 일곱이 되기 전이었던 것도 같고. 토니가 홀로그램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클립보드를 들고 서서 뭔가에 열중하고 있을 때 피터는 그 홀로그램 디스플레이 옆에 앉아서 조잘대고 있었다. 가끔 둘이 함께 있을 때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벌리면 토니는 웃으며 부드러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여줄 때도 있었고, 짖궂은 말장난을 치며 턱을 괼 때도 있었다. 그리고 그 날의 토니는 꽤나 바빴어서 피터가 학교에서 있던 일을 이야기해도 듣는 건지 마는 건지 모를 정도로 반응을 하지 않으며 홀로그램에 손짓을 하고 있었다. 피터는 말 그대로 전세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토니 스타크라는 남자의 옆에서 제 시시콜콜한 일상 이야기나 하는 것이 얼마나 하찮은 일인지를 알아서 듣고 있다는 기대 없이 반쯤은 혼잣말로 떠들고 있던 터라 딱히 그 점이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뭐 설마 무슨 일이 있겠어 싶어서 그냥 거기 누워 있었거든요? 그런데 오늘 스페인어 시험 있었어서 공부하느라 어제 늦게 잤단 말이에요, 그래서 눈이 좀 감겼는데 좀 자려고 했더니 플래시가...'
  '아무데서나 누워서 자고 있었다고?'
  '네, 네? 네? 토니 제 말 듣고 계셨어요?'
  '너무 무방비하네.'


  지나가듯 툭 던진 말 이후로 토니는 다시 피터가 이런저런 질문을 던져도 대꾸해주지 않아서, 그냥 잠깐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가 다시 제 일과를 말해주던 피터는 그 날 밤 침대에 누워서야 토니의 말을 상기하며 온갖 난리를 쳤었다. 토니 딴에서는 그저 학교에서도 아무데서나 잠드는 습관이 스파이더맨으로서도 나타나면 위험할 수 있을 테니 해준 말이었을 수도 있지만, 애인이 남들 앞에서 그저 경계를 풀고 자고 있는 것에 대한 코멘트라고 생각하니 워낙 설레었어서. 아, 그때 앞으로는 토니 앞에서만 잘게요, 하고 플러팅했어야 했던 건데! 라며 아쉬워하기까지 했던 기억이 선명해진 피터가 힘없이 키득키득 웃었다. 그런데 재밌지도 않고, 웃기지도 않고, 그저 과거의 자신이 얼마나 머리 싸매야 할 부분이 적었는지를 생각하자 이상하게 속눈썹이 축축하게 젖어들어왔다.


  다시는 그런 말을 토니 앞에서 할 수 없겠지?


  머릿속으로 불현듯 들어온 질문에 피터의 생각 뒷편에서는 한 목소리가 물어볼 것도 없다는 듯 당연하지, 라고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한번 확인하듯 하늘로 눈을 치켜드니 여전히 푸른 하늘에는 구름만 떠다닐 뿐 아무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그게 다행인 건데, 분명 그걸 바라야 하는데.


  아무래도... 엄청 보고 싶다.


  피터가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듯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그의 유달리 예민한 귀에 곧 도로 저만치에서 낡은 버스 한 대가 느릿느릿한 속도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세상에, 토니, 하루종일 이러고 있었던 건 아니죠?"


  페퍼가 본인이 직접 말해주지 않았다면 아마 토니도 몰랐을 사실을 물어보며 불을 켰다. 불을 켜야 할 정도로 시간이 늦어진 줄도 몰랐던 토니가 갑자기 밝아진 방에 눈을 찌푸리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지금 본인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페퍼에게 티 낼 생각은 없었다.


  "지금이 몇 시인지에 따라 다르겠지. 참고로 난 24시간이 아니면 '하루종일'로 치지 않아."
  "당신의 전직 비서이자 현직 CEO로서 그런 점은 이미 알고 있었어요. 설마 그 애 때문이에요?"
 


  ...그래,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던 작전은 실패다. 토니는 페퍼의 눈을 피해 바쁘게 어떤 홀로그램을 건드리는 척 하려던 손으로 대신 주먹을 꽉 말아쥐고 신음하듯 말을 토해냈다.


  "어디 있는지 전혀 감을 못 잡겠어, 젠장... 내가 찾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건 상상도 못 했는데. 러시아에 꽁꽁 숨겨놓은 기지도 문제 없이 찾았는데 대체 열 여덟 살짜리 남자애 한 명이 왜 이렇게 찾기가 힘들지?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이야? 땅 속으로 굴을 파고 들어가지 않은 이상 이럴 수는 없는데, 아무리 거미인간이라고 해도 몸에 한계가 없는 것도 아니고 그 짧은 새에 보스턴은 커녕 주변 도시에도 없다는 게, 제기랄—"
  "진정해요, 토니!"


  진정이 될 리가 없었다. 토니는 데스크에 팔꿈치를 대고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머릿속은 여러가지 기분 나쁜 가능성들로 지배 당하고 있어서 똑바로 사고하기조차 어려웠다. 유명인도 아니고 한 단체에 연결되어있지도 않은 일반인 한 명을 추적하는 게 그 토니 스타크로서도 힘겨운 일이라니. 차라리 처음 피터를 찾았을 때는 도심에서 설치는 빨간 후드 뒤집어쓴 애를 집에 갈 때까지 추적하기만 하면 됐으니 쉬웠는데, 이제는 몇 시간에 걸려서 고도로 추적한 뒤 브루클라인은 물론이고 주변 도시에까지 그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게 전부라는 사실에 가슴이 답답해져왔다. 시각을 차단해서 외려 예민해진 귀에 페퍼가 잠시 가만히 있다 구두를 또각이며 토니에게 다가와 그가 몇 시간 전에 화풀이하듯 보드카를 따라 마신 글라스에 손톱을 몇 번 두드리는 소리가 들어왔다. 피터랑 분명히 술을 끊기로 약속했어서 그 다짐을 지키기 위해 페퍼에게도 금주 선언을 했으니 이상할 법도 했다. 잠깐의 정적 끝에 페퍼가 입을 열었다.


  "경찰에 신고하면 엠버 경보(AMBER Alert)를 띄워줄 텐데요."
  "유괴범의 차량 번호판이 필요하잖아. 제 발로 걸어나간..."


  젠장, 그 자각은 여전히 힘겨웠다.


  "납치가 아니라고 어떻게 확신해요? 그 애 숙모랑 이야기해 보니 가출할 이유로 짐작되는 것도 없었다던데."
  "우선 가방을 가져갔다고 했고, 걔 성격 상 또 누군가를 구하겠다고 나섰을 게 더 가능성이 높아."
  "그럼 늦어도 내일 돌아올 텐데 이렇게까지 찾을 이유가 있어요?"
  "이렇게 아예 쪽지까지 두고 간 건 처음이라. 또 허튼 짓 하다가 다치기 전에 데려와야 된다고."
  "지금 그 애 안전 때문에 이러고 있다는 소리예요?"


  페퍼가 떨떠름한 얼굴로 되묻는 것에 되려 토니가 눈썹을 찡그리며 손에서 얼굴을 뗐다. 당연히 안전을 위해서지, 그게 최우선이잖아? 충분히 타당한 그 말에도 페퍼는 아리송한 듯 인상을 쓰며 토니를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그런 것 치고는 너무 초조해보이는데요."
  "자칫하다가는 내가 끌어들인 미성년자 히어로가 죽게 생겼는데 초조해하는 게 미스터리라는 거야? 지구인의 사고와는 맞지 않는 논린데."
  "아뇨, 토니. 나는 당신의 '시민들의 안위를 걱정하느라 초조한' 표정을 아주 잘 알고 있어요. 눈이 커지면서도 눈꼬리는 단단해지고, 눈동자가 흔들리고, 이를 악무느라 살짝 입술이 벌어지죠. 그런데 이건 좀 다른 종류의 초조함이에요."


  페퍼가 말하기를 망설이는 듯 주저하며 손에 들고 있던 글라스를 데스크 위에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도로 올렸다. 데스크에 양손을 올리고 몸을 기댄 그녀가 한숨을 한 번 푹 쉬더니 곁눈질로 토니를 바라보았다. 진심으로 토니의 안위를 걱정하는 듯한 그 표정에 토니는 페퍼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더 이야기해보라는 뜻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토니, 당신의 눈동자가 전혀 흔들리지 않고 있어요. 왜 그런 거예요?"


  왜 눈동자가 흔들리지 않고 있냐니. 토니는 그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는 질문에 대해 해줄 말이 없었다. 애초에 제 눈동자가 언제 흔들렸고 언제는 흔들리지 않았는지를 알아챌 틈도 없었는데 그 이유를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 말 그대로 눈동자를 움직이지 않으며 계속 페퍼를 쳐다보니 그녀는 한숨을 토해내듯 덧붙였다.
  제 생각에는, 당신은 지금 그 애의 건강 말고도 다른 걸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아요. 당신과 더 직접적으로 연결된 무언가를.
  그 애가 건강한 것만큼 내게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토니는 사실 지금 페퍼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또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를 알 것도 같았다. 그리고 토니의 빌어먹을 정도로 회전이 빠른 두뇌는 이미 무의식 중에 어렴풋이 그녀가 암시하고 있는 질문에 대한 답도 준비해놓은 것도 같았다. 다만 그게 뭔지는 몰라도 지금 당장 마주하면 골치 아파질 것 같아서, 대신 스스로 이미 마스터하다시피 한 자기 자신을 속이는 수법에 열중해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여전히 토니는 스스로의 뇌를 뒤적여가며 그 대답을 찾을 생각이 없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적어도 페퍼 앞에서는.
  토니는 대신 척수반사 작용을 겪는 사람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놀라서 쳐다보는 페퍼의 앞에서 중대 발표를 하듯 박수를 한 번 짝 친 토니가 입을 열었다.


  "결정을 내렸어."
  "무슨 결정이요?"
  "워쳐 프로토콜 (Protocol WATCHER)을 실행하려고."


  페퍼는 토니가 지금 값비싼 미술품들을 한 번에 다 버려버리겠다고 선언했을 때 지었던 표정을 그대로 지으며 입을 떡 벌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꽤 따뜻한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그건 쉴드에서도 너무 심하다고 파기한 프로그램이잖아요! 전국민의 통신 기록을 확인하고, 미 대륙 내에 있는 감시 카메라를 모두 해킹해 두 눈으로 쓰시겠다고요?"
  "기억력 좋네, 페퍼. 그리고 너무 그러진 마, 어차피 NSA도 똑같은 짓 하는데. 우리 기술만 있었다면 걔네도 이만큼 할걸."
  "토니, 지금이 무슨 1984년 디스토피안줄 아세요? 남자애 한 명 잡겠다고 전국민의 사생활을 그렇게, 그렇게 희생할 수는 없어요! 그리고 그 데이터를 다 어떻게 분석하고 어떻게 정리하려고—"
  "프라이데이가 있잖아. 백업 AI들까지 가동하면 충분히 가능해, 그렇지?"
  "당신 히어로예요, 토니!"
  "어차피 걔가 없는 자료는 다 즉시 폐기할 거야. 오늘 하루종일 했던 걸 온라인 상으로도 하고, 더 광범위하게 할 뿐이라고. ...이게 유일한 방법이야, 페퍼."


  다시 토니를 반박하려는지 입을 열었던 페퍼가 토니의 진지한 눈빛을 마주하자 도로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하고 있는 그녀는 토니의 굳건한 표정을 보며 그의 다짐에 전혀 흔들림이 없다는 것을 눈치 챘는지 경악한 감정을 지우지 않으면서도 천천히 침착하게 말했다.


  "...미 대륙 전역을 이 잡듯 뒤질 생각이군요."
  "그렇게라도 해서 잡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왜냐하면 페퍼의 말이 맞으니까. 토니는 조금 더 직접적인 무언가를 걱정하고 있었고, 피터의 안위에 눈이 뒤집혀서 한창 찾다가 한 순간 그게 자신의 동기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버렸으니까. 그리고 무의식으로 미뤄뒀던 그 자각을 페퍼의 말로 인해 일깨워서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렸으니까. 페퍼가 등을 돌려 나가는 것을 지켜보던 토니는 그녀가 데스크에 내려놓고 간 빈 글라스를 앞으로 끌고 와 만지작거렸다. 술을 끊을 이유가 사라진 동시에 그 자체가 술을 다시 시작할 이유가 되어버렸다니. 토니는 홀로 남은 이제서야 그 미지수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토니 스타크는 피터 파커가 자의로든 타의로든 자신을 떠나는 것이 두려웠고, 그 원인이 자신이 되는 것은 더더욱 두려웠다.


   무색무취의 보드카가 든 잔을 입가로 올리며 토니는 자신이 언제쯤 다시 술을 벽장 저 너머로 치워버릴지에 대한 내기를 허공에 걸었다. 일주일 내로는 찾는다는 것에 차고의 문에서 가장 가까이 주차되어 있는 아우디를 걸지. 듣는 사람도 없는 곳에서 당당히 그렇게 선언한 그는 애매하게 남아 거슬리게 하는 침전물과도 같은 불안감을 감추듯, 프라이데이의 센서 앞에서 손짓하며 워쳐 프로토콜의 시작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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