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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피터] 신분증을 제시해주세요 4

토니의 아이를 데리고 도망치는데 처음부터 들킬 위기에 처해지는 피터의 이야기

Protocol WATCHER: D+291

 

  "아빠다, 에드."

 

  멍하니 TV를 보며 무심코 그렇게 말한 피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정했다. 아니, 내 말은, 진짜 아빠라는 건 아니고! 그냥 잊어, 에드, 아빠 아니야, 완전 모르는 사람이야! 허겁지겁 말해놓고 옆에 누워있는 에드를 쳐다보니 막상 에드는 피터에게는 관심도 없이 아기 침대의 보호 창살을 그러쥐려 애를 쓰고 있었다. 피터는 어차피 제 말을 이해도 하지 못할 것이 뻔한 애한테 토니가 아이의 아빠라는 것을 들키지 않겠다고 이렇게 버둥거리는 제 꼴이 웃겨서 한 번, 그리고 고작 이런 사안에 이렇게까지 당황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슬몃 웃었다. 등 뒤에서 타닥, 타닥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아이는 큰 소동 없이 간간히 팔다리를 움직이고, 창 밖에는 노을이 지려는 듯 하늘이 울긋불긋하게 얼룩지고 있었다. 


  이런 게 평화라는 거겠지.


  피터는 잠시만 TV에서 눈을 떼고 아이를 내려다보며 눈을 내리깐 상태로 다시 웃음을 머금었다. 이런 식의 진부할 정도로 잔잔한 평화는 더없이 소중했다. 그는 지난 10개월 가량 너무도 힘들게 살아왔으니까. 

   누군가로부터 도망 친다는 것을 쉽게 여긴 적은 없지만, 적어도 영화나 드라마에서 죽도록 반복되는 클리셰 속에서는 등장인물을 쫓는 사람이 무려 토니 스타크처럼 재력, 재능, 영향력 하나 빠지지 않는 인물일 때 주인공이 이렇게 무력한 인물은 아니었다. 아니, 정정하자면, 주인공을 쫓는 사람이 그럴 때 막상 그 주인공이 이렇게한심할 정도로 힘없지는 않았다. 주인공이 곳곳에 널려있는 CCTV로부터 얼굴을 감추기 위해 습관적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불안하게 카메라를 찾아다니거나, 제 신분을 밝힐 수 없어서 아르바이트 자리조차 구할 수 없는 그런 신세가 된다면 영화가 너무 빨리 끝나버리잖아. 토니라면 인터넷에까지 손을 댔을 게 뻔하니까 그것 또한 안심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만신창이였다. 말 그대로 '지나가던 행인'의 추천으로 도착한 스펙타클 섬은 그저 풀떼기만 자라고 있는, 가끔 앉아 쉴 벤치나 길은 있어도 집이고 호텔이고 식당이고 하는 것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일부러 그를 교란시킨 건지, 아니면 피터가 살 곳을 찾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 하고 그저 좋은 휴양지랍시고 추천해준 것인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보기 좋게 허탕을 친 셈이었다. 때문에 피터는 조금만 망연자실하게 서있다가 거의 곧바로 바로 옆에 있는, 그나마 이름이 좀 알려져 있고 사람들이 사는 페독스 아일랜드로 향했다. 하지만 이렇게 허탕을 치며 배를 두 번이나 탔기에 남은 돈은 모텔에 며칠 숙박을 하면 끝일 수준이었다. 피터는 처음 페독스 아일랜드에 도착했던 일주일의 어느 순간에는, 규모 있는 마트의 주차장에서 큰 트럭에 기대어 카메라로부터 숨으면서 아이를 안고 멍하니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잡히지 않을 리가 없다고, 제가 아주 작은 확률로 오랫동안 토니를 피하는 것에 성공한다고 해도 당장 입을 옷이, 입에 댈 음식이, 잠을 청할 집이 해결되지 않아서 곧바로 다시 기어들어갈 게 뻔하다고. 

   게다가.... 피터는 그 생각까지 한 뒤에는 마치 의례처럼 고개를 숙여 아이의 얼굴을 다시 보았었다. 처음에는 이 아이를 뺏기지 않겠다는 다짐을 재확인하기 위해서 했던 행동은 어느새 피터에게는 의식주만큼이나 중요한 니즈를 간접적으로나마 채우기 위한 행동으로 바뀌어 있었다. 게다가, 그의 얼굴을 하루도 보고 싶지 않은 날이 없는 걸.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 볼썽사납게 울면서 다시 나를 받아달라고 무릎을 꿇고, 또 그가 뭐라고 대답하든 간에 받아주기 전까지는 자리에서 버티고 싶은 충동은 그 뒤로도 무수히 찾아왔다. 그 충동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은 단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바로 피터가 섬의 가장 값싼 모텔에서 더이상 숙박비를 낼 돈이 없어서 쫓겨났던 그 가장 위태로운 순간, 그에게 또다시 평범하지만 거창한 도움의 손길이 찾아왔다는 점.

 

  "야, 나 담배 사러 갈 건데 뭐 사줘?"

 

  회상에 젖던 피터는 뭔가를 열심히 타자로 치고 있던 에디가 랩탑을 닫고 일어서며 말을 거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10개월 전 도움의 손길을 내민 사람은 대단한 자선 사업가도 아니고, 친절한 자원 봉사자도 아닌 그저 성격이 조금 거칠기로 소문 난 사이버대학 재학생인 에디 브로크였다. 당시에 가져온 돈도 떨어지고, 아이는 그나마 따뜻했던 모텔에서 쫓겨났다는 사실에 크게 울어제끼고 있던 와중, 피터는 결국 지나가는 이웃의 도움을 또다시 한 번 받아야겠다는 유일한 선택지에 희망을 걸고 지나가던 남자 한 명을 붙잡고 다짜고짜 사정했었다. 아이를 달래기 위해 부지런히 팔을 움직이며.

 

  '저기요, 혹시— 정말 제가 수상해보이는 건 이해하는데요, 정말 죄송한데 혹시— 하룻밤 묵을 곳이라거나, 급하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라거나, 그런 거 아시는 곳 있나요? 제가 사정 상 신분증같은 게 필요한 평범한 아르바이트는 무리...'

 

  아. 피터는 거기까지만 말을 하고 두뇌를 누군가가 파내는 것처럼 격렬한 두통에 인상을 찌푸렸다. 무작정 뭔가가 시끄럽다고 느껴졌지만, 아까부터 목청껏 우는 아이의 소리라기에는 고막을 울리는 소리가 아니라 두개골 안에서 배회하는 소리같았다. 피터는 팔의 솜털이 빳빳하게 서는 것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감았던 눈을 가까스레 떴다. 아이가 생긴 이후로 오작동을 하기도 하고 희한하게 예민해지기도 한 스파이더 센스라  유례 없을 정도로 난리 치는 것을 뒷받침하듯, 다시 마주한 눈 앞의 남자는 정말 기분 나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당연히 있지, 친구. 이 근처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관광이 있거든.'

 

  여러 가지 종류의 관광. 피터는 토가 나올 것만 같았다. 그것이 비단 스파이더 센스 때문만은 아니어서 그는 아이를 들지 않은 손으로 입을 막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뒷걸음질을 쳤었다. 막은 손 새로 도와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이 습관적으로 나오려는 찰나 남자는 바깥에 오래 서있어 차가워진 손으로 피터의 아이를 안은 팔을 붙잡았다.

 

  '왜 그래? 돈 필요하다며.'

  '아뇨, 생각해보니까 그렇지는...'

  

  지금껏 좋은 사람들만 만나와서 또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 게 안일했다. 행운의 여신도 뻔뻔하게 세 번까지 부탁하는 자신이 괘씸했겠지. 피터는 마치 뱀처럼 제 팔에 감겨오는 남자의 손아귀 힘을 느끼며 이를 악물어야 했다. 남자가 피터가 팔을 빼려고 힘을 주는 것을 느끼고 오히려 재밌다는 듯이 실실 웃는 것을 본 피터는 머릿속에 기도문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너는 스파이더맨이야, 너는 스파이더맨이야. 앞의 남자는 민간인이라고, 스파이더맨, 제발. 여기서 힘을 쓰면 이 남자는 엄청 다치고, 또 엄청 수상해보일 거야... 

 

  '내가 아는 곳이 있는데, 거기 딱 너같은 애들이 인기거든. 요즘은 그런 편견 없다는 거 알지? 그냥 등록금 없어서 오는 애들도 있는데 정말 급하다면, 배 조금만 타면 되는데...'

 

  은근한 목소리로 말하던 남자가 말을 딱 멈춘 것은 그때였다. 어떻게 대꾸해야할 지 감이 잡히지 않아 전전긍긍하고 있던 피터는 고개를 들어 남자가 잔뜩 찌푸려진 눈썹으로 제 팔에 들린 아이를 마주하고 있는 것을 봤다. 순간, 아주 짧은 찰나동안 피터는 그가 갑자기 물러선 이유가 이해가 가지 않아 따라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번에도 그보다는 스파이더 센스가 더 빨랐다. 팔에는 털이 다시 곤두서고 머릿속에 울리는 경보음은 다시 음량을 키웠다.

 

  '뭐야, 이거?'

  '무슨...'

  '이거... 토니 스—'

 

  후에 피터는, 그 남자의 목소리가 그 순간 어쩐지 조금 겁에 질린 것 같다고 생각한 게 정말 그 남자의 토니 스타크와 그다지도 닮은 아이를 만난 것에 대한 경악에서 비롯된 것인지, 혹은 제 두려움이 그에게 투영되어 그렇게 느껴진 것인지를 궁금해 했다. 다만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절대 들을 수 없었다. 피터가 '토니 스타크'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아니 채 듣기도 전에 경기를 일으키듯 저도 모르게 들고 있던 배낭으로 남자를 세게 쳐버렸으니까. 

 

  남자가 맥아리 없이 떨어지는 것을 본 피터는 본능적으로 주위에 누군가가 그 이름을 듣진 않았나 두리번거렸지만, 거리라고 하기도 뭐한 작은 길가는 고요했다. 스파이더 센스는 그제서야 잠잠해졌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아이의 얼굴을 제 품 깊숙히 묻은 피터는 그 안정이 찾아오고 나서야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를 깨닫고 굳었다. 저기, 혹시...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봤지만 쓰러진 남자에게선 답이 나오지 않았다. 피터는 제가 몸을 떨고 있는지도 모르다가 어느샌가 조용해져 있던 아이에게서 다시 칭얼거림이 들려오자 그제서야 제가 바들바들 떨고 있는 줄을 깨달았다. 

  법적 책임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미국의 정당방위 법의 넓은 범위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고 스파이더맨 활동을 하면서 힘을 조절하는 것은 습관이 되어 있었기에 남자가 그저 기절한 정도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다만 두려운 것은, 피터의 몸을 덜덜 떨려오게 한 것은 여상히 머릿속을 맴도는 그 끔찍한 생각이었다. 내가 또 책임감이 없는 짓을 한 걸까? 하는, 결국 토니가 했던 말이 모두 맞았고 그는 토니의 그 날카로운 지적을 피해갈 수도 그 시점에서 발전해 나갈 수도 없을 것이라는 자각. 피터는 결국 토니를 떠난 뒤 처음으로 무너졌다. 스스로가 한심해질 만큼 그가 그리웠지만 동시에 그가 했던 비난과도 같던 조언조차 들어줄 수 없는 자신은 또 한심했기 때문에, 그리고 이 모든 게 헛소용일 수도 있다는 무력한 상상 때문에.

 

  '이봐, 괜찮아, 괜찮아!'

 

  에디 브로크가 등장한 것은 그때였다.

  피터가 조용했다고 생각한 거리는 정말 그뿐이었는지 사람이 없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 거리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던 남자로 보이는 에디는 피터의 관점에서는 갑자기 튀어 나와서는 소리 내서 울고 있는 피터를 진정 시키려는 듯 어깨를 두어번 두드리고 뭐라고 더 말했다. 피터가 후에 회상하면서 안 것이지만, 에디치고는 유난스러울 정도로 따뜻했던 움직임이었다. 이후에 그는 쓰러져있는 남자를 몇 번 살핀 뒤 그가 정말 멀쩡하다는 것을 피터에게 알려주고, 따지고 보면 경찰서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지만 어차피 저쪽에서 먼저 미성년자로 보이는 소년에게 추근덕거리던 것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을 테니 그냥 냅다 나르기나 하라는 조언까지 해주었다. 피터가 멍하니 그 말을 듣더니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임과 동시에 약간의 실랑이를 불러일으킨 조언이었다.

 

  '...안 돼요.'

  '뭐가 안 돼? 내가 방금 한 말은, 저 새끼가 굳이 너 찾으려 쫓지는 않을 거란 말이었지, 니가 여기서 알짱거리는 걸 가만히 가게 내버려둘 거라는 건 아니었거든? 나도 더 관여하기 싫으니까 그냥 빨리 동생 데리고 집으로 꺼져라, 어?'

  '제가 한 일에는 책임을 지고 싶어요. 그러니까 도와주신 건 정말 감사하지만 저는—'

  '이거 봐라, 배부른 소리 하고 앉았네. 어차피 저 새끼도 지가 한 일에는 책임 안 질 걸? 집에 안 가고 싶어? 난 집에 가고 싶어 죽겠는데 괜히 껴가지고—'

 

  그리고 나선, 뭐. 단순히 말하자면, 피터는 어차피 집이랍시고 갈 곳도 없다고 신경질 섞인 말을 내뱉었고, 에디는 집이 없기는 왜 없냐고 되물었고, 피터는 대충 동생을 데리고 도망치고 있다는 이야기를 급조해서 만들었고. 그 말에 에디가 제 집을 며칠만 내준 것으로부터 시작된 인연이었다.

  토니는 피터에게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너는 정말, 참, 머리가 좋은 애야. 마치 감탄하는 것도 같고 대견해하는 것도 같은 목소리로, 스스로도 어이가 없을 정도라는 듯이 헛웃음을 치며 두 번이나 반복해서 말해서 기억에 남았지만 사실 그러지 않아도 토니의 칭찬이라면 피터의 머릿속에 각인되는 것은 당연한 절차였다. 그래서 피터는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이 똑똑하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는 제 정체성으로 삼았고, 에디의 집에 처음 갔을 때도 피터는 그 사실을 잊지 않아서 그의 집에 가는 것이, 그리고 그의 랩탑를 빌리는 것이 일종의 돌파구를 찾을 기회라는 사실을 간파했었다. 결국 며칠 뒤, 피터가 에디의 집에서 당분간 얹혀살기로 합의했을 때에는 둘 사이에는 일종의 계약이 체결되어 있었다. 인터넷에 스스로를 드러낼 수 없는 피터가 돈을 벌기 위해 자택 근무를 할 수 있는 직업을 찾고 신원이 필요할 때 에디의 신원을 빌리는 대신,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기 위해 페독스 아일랜드로 온 에디는 일종의 아르바이트를 추가하듯 피터의 수익을 일정량 나눠가지는 것으로. 처음에는 피터의 이러한 조건을 수상쩍어하면서도 피터를 동정하느라 마지못해 수락하는 듯 허튼 수작 부리면 네 동생 대가리를 깨주겠다던 에디는 이내 피터가 기업 웹사이트와 인트라넷의 보안을 점검하는 일종의 해킹 관련 직업을 따내고, 덤으로 에디의 고장났던 랩탑마저 깔끔하게 고쳐주자 점점 그를 더 신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스펙타클 섬과 페독스 아일랜드 섬에 도착한 첫 일주일은 그 후 9개월이 넘는 시간을 다 합친 것보다 훨씬, 말 그대로 스펙타클했던 셈이다. 

 

  "왜 대답이 없어?"

  "아, 그, 전 괜찮아요!"

  "맨날 그래놓고 나중에 뭐 생각났다고 미안하다고 난리를 치잖아. 아, 빨리. 나 그냥 가버린다?"

  "음... 그럼 혹시 모르니까 에드 먹을 것 조금만 사주실래요?"

 

  에디는 인상을 팍 찌푸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겉옷을 들고 현관으로 나섰다. 피터는 미안하다는 듯 미약하게 웃어주고는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 나른한 시간대의 지역 방송에서는 이 지역과는 거리가 먼 남자가 기자들에게 여유롭게 웃어주며 스타크 타워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이 송출되고 있었다.

 

  토니에게 단박에 달려가지 않을 수 있었던 두번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피터 입장에서는 토니를 매우 자주 볼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본 토니는 정말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았다는 점. 피터 없이도 정말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았다는 그 사실이었다.

 

 - 스타크 씨, 이번에 소개하신 이진법 증강 기억 조작 기술을 발전시켰을 시 시간 여행이 가능하다고 보시나요?

 - 이런 곳에서 들을 법한 질문은 아니지만, '어젯밤에 그 파티에서 그러셨을 때는 맨정신이었나요?' 류의 질문이 아니라 신선하긴 하군요. 질문에 답변해 드리자면 시간 여행은...

 

  카메라를 들이대며 급히 질문하는 기자에게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서 간단히 답변해주는 토니는 여느 때처럼 단정하게 슈트를 갖춰 입고 머리도 깔끔하게 쓸어넘긴 채였다. 혈색도 무척 좋아보였고 짓는 표정 하나하나가 유려하다는 것을 체크한 피터는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처음 에디의 집에서 TV를 켜서 토니를 봤을 때는 기함할 뻔했다. 화면 속의 토니의 모습이 가끔 토니가 악몽을 꾸고 한밤중에 벌떡 일어났을 때의 그 창백한 혈색과 새하얀 얼굴과 거의 완전히 일치했기에. 그때쯤 토니도 피터가 사라진 것을 모를 리가 없었고, 또 비록 관계에서 여러 일이 있었다고 해도 그의 그런 상태는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어 피터는 그날 그 얼굴을 보고 심장이 땅 끝으로 꺼지는 것만 같았다. 압박과도 같은 죄책감이 휘몰아쳐 와서, 당장이라도 토니에게 돌아가서 미안하다고, 내가 잘못했다고 엉엉 울어버리고 싶었다. 거의 습관적이게 되어 버린 '돌아가야 할까'하는 생각의 흐름을 다시 타면서 끊임없이 잠을 설치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흐름을 막아준 것은 역시나 TV 속의 토니였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TV와 인터넷은 여느 때처럼 변함 없이 토니 스타크의 또다른 스캔들을 실었고, 피터는 그 스캔들의 진위 여부와는 상관 없이 기사 속에서 토니가 그 여성을 파티에서 만났다고 하는 것에 안도했다. 그래도 이제 파티를 다니기는 하는구나, 하고. 물론 이런저런 생각에 속이 쓰려서 하루종일 우울해하는 모습에 에디가 무슨 일 있냐고 다그쳤던 것도 맞고, 그날 밤 유달리 뒤척이며 어쩐지 모르게 억울했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그날은 피터가 토니를 떠나고 처음으로 잠을 제대로 청한 날이었다.

 

  TV 속의 토니는 점점 더 안정감을 찾아갔다. 처음에는 답지 않게 스캔들이 나올 때마다 바로 반박 기사가 실리던 것도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원래처럼 무시하는 태세를 취하기도 했다. 그건 정말 다행이었다. 10개월 전만 해도 모든 언론사에서 토니 스타크가 요즘 이상하다고 난리를 치던 것도 잠잠해져서, 차라리 토니 스타크의 잠깐의 일탈보다는 스파이더맨의 부재를 더 다뤘다. 피터는 가끔 에디조차 '뉴욕 타임즈는 오늘도 스파이더맨인가 뭔가 하는 놈에 대해 쓰네'하고 중얼거리는 말을 들을 때마다 토니도 그가 사라진 것을 그 언론사들만큼 신경 써줄지에 대해 고민했다. 아예 잊어버리지는 않았겠지. 그래도 자신이 그 정도 위치는 됐고, 어느 순간 토니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받은 것도 맞다고 생각하니까, 가끔 가다 문득 생각해주는 때도 있지 않을까? 그런 놈도 있었지, 싱겁게 사라져 버려서 내가 좀 고생했지만, 책임감 없고 철 없는 자식이었어, 하는 식으로라도. 그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계속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그 정도로 토니의 인생에서 그의 시간을 많이 차지하지는 않았지만, 그 정도는 바라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의 끄트머리에는 애상처럼 그래도 정말 좋아했긴 했었지 하는 생각을 덧붙여도 좋을 것이다. 

  물론 토니는 매우 바빴고... 피터는 굳이 그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어리고 어리기만 한 피터를 그렇게까지 생각하리라 가정하는 게 욕심일 것 같기도 했다. 가끔은 연애를 했던 시간마저 부정하듯, 언제나 그의 눈에는 성가신 열 다섯 살이 아니었을까 하는 불안함도 들었다. 

 

  "나 간다? 애는 자?"

  "네, 그런 것 같아요."

 

  현관문을 열던 에디의 표정이 순간 묘한 빛을 띄었다. 일그러지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더 궁금해하는 것 같고 그보다는 더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은 느낌에 피터는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것이 TV 화면에 꽂힌 것을 확인하고 다시 에디를 쳐다보니 이번엔 그의 시선은 에드의 얼굴에 아주 잠깐 닿았다 급하게 떨어졌다. 에디는 괜히 나 간다! 라는 말을 다시 반복하며 이번에는 정말로 문을 완전히 열고 나갔다.

 

  에디의 신세를 진다는 것은 그에게 에드의 얼굴을 완전히 공개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리고 에디는 미국 시민권자이자 지구인이었기 때문에 토니 스타크를 모를 리가 없었다. 처음 그가 에드의 얼굴을 확인했을 때의 표정은 피터가 미처 알지 못 했지만, 에디는 이따금씩 이런 식으로 TV에 나오는 토니 스타크의 얼굴과 에드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뭔가를 열심히 생각하고는 했다. 그들의 사연을 대강 지레짐작하려는 것 같은 그 눈빛은 불가피했겠지만 그래도 에디는 피터를 배려하기 위해서인지 단 한번도 그 궁금증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거친 언사와는 비교되게는 따뜻한 배려였다.

 

  "으아!"

 

  에드가 갑자기 낸 소리에 피터가 급히 시선을 돌렸다. 보호 침대 위에 앉아있던 에디가 창살을 쥐고 벌떡 일어나 피터의 쪽을 보고 있었다. 헉, 에드, 방금 혼자 일어난 거야? 피터는 괜히 호들갑을 떨며 에드에게 다가가 작은 두 손을 마주잡고 칭찬하듯 조금 흔들었다. 자신이 그렇게 손을 맞잡아주자 에드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보고 피터는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 뭐지, 저 표정? 가끔 토니의 얼굴에서 봤던, 그래, '성취감'이라고 할 법한 표정이었다. 애초에 소리를 낸 것도 나 일어섰으니까 다가와서 칭찬해줘, 그런 뜻이었던 걸까? 에드는 아이 치고 무척 똑똑한 것은 물론이고, 제 아들이라지만 꽤 영악한 부분이 있었으니까 아예 비약적인 생각도 아닌 것 같았다. 이미 얼굴이 공인 인증 마크 수준인데도 이렇게 행동으로까지 누구 아들인지를 티내다니. 이런 식으로 그가 누구의 아들인지를 실감할 때마다 피터는 에드의 얼굴에 뽀뽀를 수백번 쏟아부어주고 싶었다. 반은 에드 몫, 반은 에드가 그다지도 닮은 사람의 몫으로.

 

  피터는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토니의 소식이 끊긴 화면 속에서는 방송사에서도 딱히 내보낼 내용을 찾지 못했는지 인터넷 상에서 화제가 된 동영상을 틀어주고 있었다. 모두가 평화로운 셈이었다. 스파이더맨이 없는 뉴욕도, 에디 브로크라는 선한 사마리아인을 만난 피터도, 피터 파커가 없는 토니 스타크도. 

 

  그러니 피터는 행복해야 했다.

 

 

 

 

 

 

 

Protocol WATCHER: D+847

 

  랩을 지나쳐 침실로 향하려던 토니는 붉게 깜빡거리는 그 숫자에 발걸음이 붙잡혔다. 매일매일 지나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숫자인 동시에 바쁜 일상 속에서는 뒷자리가 바뀌든 앞자리가 바뀌든 신경 쓸 겨를도 없는 숫자인데 웬일인지 하필 딱 눈을 마주쳐버렸다. 팔백 사십 칠. 작게 되내이던 토니는 이윽고 거칠게 마른 세수를 하고 홀로그램 앞에 의자를 빼들고 앉았다. 

 

  "프라이데이. 위스키 한 잔만."

  [혈중 알코올 농도를 확인하시겠습니까?]

  "너 페퍼가—아니, 됐어. 술. 당장."

 

  잠깐의 침묵이 감돌더니 옆에서 위이잉 하는 소리와 함께 Dum-E가 토니에게 병과 글라스를 건넸다. 병을 들고 글라스에 술을 따르던 토니는 제 처지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사할 때나 쓰는 식으로 강등 당했던 더미를 다시 들인 건 언젠가 피터가 지나가는 말로 토니가 자신의 나이였을 때 지은 저 로봇이 정말 마음에 든다고 했던 게 기억 나서였다. 그게 아마 워쳐 프로토콜 가동 5주쯤 되었을 때였다. 절박감이 피크에 올랐던 그 전 주, 그러니까 피터가 사라진지 딱 한 달쯤 됐었을 때 토니는 어느날 충동적으로 차를 돌려 메이의 집을 찾아갔었다. 반쯤은 굳건하고 반쯤은 포기한 표정이던 그녀의 허락을 받고 피터의 방으로 가자 피터의 스파이더맨 슈트는 곱게 개여 책상에 얌전히 올려져 있었다. 그녀가 슈트를 개며 어떤 생각을 했을지 토니는 알 것 같았지만 반대로 메이가 자신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할지는 미지수였다.

 

  그에게는 매일매일이 전쟁이었다. 처음 1년 간은 세계대전도 아니고 거의 우주 전쟁이라고 불려야 할 장대한 소용돌이들이 매일매일 머릿속을 괴롭혔다. 희한하게도 쿼블러-로스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5단계'와도 같은 과정이 그를 장악했다. 그 애가 사라진 게 아니라고, 곧 다시 돌아올 거라는 '부인'은 2주를 갔던 것 같다. '분노' 단계는 정말 오래 갔다. 너무 오래 가서 나중에는 '협상' 단계와의 구분이 옅어졌다. 애인에게도, 보호자에게도 말을 안 하고 사라지는 되바라진 행동은 누구한테서 배웠냐고 있지도 않은 피터에게 분개하며 물어보고, 집요하게 워쳐 프로토콜의 결과를 확인하면서도 피터가 저를 떠난 이유가 될 수 있는 것을 지우면 피터가 다시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스스로와 협상했다. 컨트롤 프릭이 아닌 척 느슨하게 살아보기도 했고, 혹시 잦은 스캔들에 질렸나 싶어 관심을 줄 가치도 없는 저렴한 기사들을 꾸준히 반박했다. 마음 한 켠으로는 그 애가 절대 이런 일로 떠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나날들이 이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토니는 그 모든 것을 놔버렸다. 우울이었다. 그 시기에 재정립된 습관 때문에 페퍼는 토니 몰래 토니가 술을 달라고 하면 혈중 알코올 농도를 확인하라는 알림이 들어오는 프로토콜을 설정해놓기까지 했다. 피터가 실종된 지 2년 여가 넘는 시간동안 우울은 점점 옅어져 갔지만 토니는 아직 제가 그 다음 단계에 도달하지는 않았다고 느꼈다. '수용'. 실제로 페퍼가 조용히 종용한 적도 있기는 했다. 

 

  '토니. 믿기 힘든, 아니 믿고 싶지 않은 가능성인 것은 알고 있지만...'

  '무슨—젠장, 말도 제대로 안 나오는군. 무슨 그— 무슨, 그, 무슨 소리야?"

  

  맞다, 아직 '우울' 단계였을 때였지. 당시에 토니는 무슨 종류의 술을 마시고 있었더라.

 

  '그 아이가... 그 소년이... 살아있지, 않을... 가능성은 고려해봤나요?'

  '......'

  '다음 주면 1년째예요. 숙모도 아무 소식도 듣지 못 했다고 하고... 그녀도 어느 정도 포기한 것 같고요. 의도적으로 피한다기에는 히어로 생활에 아무리 신물이 난대도 그렇지는 않을 것 같고... 사실 그럴 이유가 없잖아요? 그리고 어디에 있든 살아있다면 지금쯤 돌아왔을...'

 

  그렇게 말을 하던 페퍼는 토니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보고 어째선지 입을 다물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표정이 어땠는지는 몰라도 토니는 사실 페퍼의 말에 설득되지는 않았다고 생각했으니. 페퍼는 토니와 피터의 관계가 히어로 멘토-멘티의 관계보다 훨씬 더 깊게 뻗어간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피터가 의도적으로 그를 피하는 것이라는 선택지를 완전히 배제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애인으로서 토니 스타크를 피할 이유는 아주 많지, 안 그래? 입맛이 쓴 생각이었지만 거짓말도 아니었다. 토니는 피터가 처음 사라졌을 때만 해도 그렇게도 피하고 싶던 자신 때문에 그가 떠났다는 선택지를 오히려 생명줄을 붙들듯 간절히 잡고 있었다. 

 

  차라리 나를 피해, 피터. 나를 피하려고 발버둥치고 도망을 쳐. 물론 놔줄 수는 없어. 그래도 차라리 그렇다면 언젠가는 다시 만나서 왜 피했는지 이야기를 할 수도, 아주 잘 하면 납득마저 할 수는 있겠지.

  그게 중요했다. 언젠가 다시 만나는 것. 다른 것은 다 뒷전이었다. 그래서 토니는 그렇게 답했다.

 

  '죽었다면.'

  '......'

  '시체라도 찾아야지.'

 

  그때까진 멈추지 말아야지.

  그래서 토니는 멈추지 않았다. 다만 매일매일 피터를 그리며 사는 것은 버거웠고, 그는 토니 스타크였기에 잠시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게라도 다른 사람을 찾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매일 피터의 생각이 조금씩 옅어지고 우울이 옅어지는 것과 별개로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연애를 할 상대를 찾자니 곱슬머리 브루넷만 찾고 있었다. 파티에서 술잔을 내려놓는 웨이터가 피터와 머리스타일이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이름표를 유심히 보는 스스로를 눈치 채고 나니 토니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피터가 아니면 안됐다. 잠깐 함께한 18살짜리 남자애가 토니 스타크의 인생에서 흔치 않은 장기 프로젝트였다는 말이다. 그래서 토니는 대신, 피터와 함께 있을 때처럼 일에 몰두하기로 했다. 그게 피터를 잊는 최선의 방법인 동시에 인생의 디폴트라고 느껴질 정도로 손쉬운 방법이기도 했다. 그는 정말... 바빴다. 항상 그랬다. 


  그게 참 잘 먹히는 건 줄 알았는데 말이지. 토니는 자조하며 글라스를 입술로 올렸다. 참 잘 먹히는 줄 알았는데, 결국 이렇게 다시 피터 파커에게 붙잡혀버렸다. 스스로 생각할 겨를도 없이 미친듯이 살았더니 효과적으로 그 애를 잊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스트레스를 누적하듯 그 애를 향한 그리움을 차곡차곡 쌓아둔 것이었다. 그게 와르르 무너지자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사진이나 동영상은 얼마 있지도 않은 것을 다 외워 버렸다. 같이 찍자고 할 때 일하느라 바쁘다고 하지 말고 잘 찍어줄걸, 하는 후회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디나이얼에 빠진 청소년처럼 머릿속 저편으로 미뤄뒀다. 하지만 그래봤자 더이상 피터의 흔적을 느낄 수 없는 데에서 오는 상실감은... 아. 토니가 순간 든 생각에 탄식하는 소리를 내며 상체를 세웠다.

 

  "프라이데이."

  [또 주문하시겠어요, 손님?]

  "농담은 좀 더 연습하고. 스파이더맨의 슈트 AI와 연결해."

  [Yes, boss.]

  "불도 끄지."

 

  공연의 막이 오르기 직전처럼, 랩 안의 불이 모두 소리 없이 꺼졌다. 이내 토니의 앞에는 파란색과 붉은색 전류들로 이루어진 구체와도 같은 형상의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토니는 자비스를 향한 조금의 향수와 아직도 약간 섬뜩하게 하는 울트론의 기억을 동시에 느끼며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오랜만이야, 피터. 보고 싶었어. 오늘은 나를 조금 다른 형태로 부르는 것 같은데, 슈트는 질린 거니?]

 

  이렇게 애틋하게 프로그래밍했었나? 안 그래도 감상적이다 못해 녹아내릴 것 같은 상탠데 나보다 더 하는군. 토니는 피터가 언젠가 캐런이 자신 보고 키스하라고 부추킨 적도 있다고 투덜댔던 것을 회상하며 헛웃음을 지었다. 

 

  "실망시켜서 미안하지만 피터가 아니야."

  [아. 죄송해요, 스타크 씨. 슈트를 입으셔야 얼굴을 감지할 수 있어서 인식하지 못했어요.]

  "그래, 그렇겠지. 지금의 너는 홀로그램이니까."

 

  다시 술 한 모금. 2년이 훌쩍 넘는 시간동안 한 번도 피터의 AI와 대화를 하지 않았던 이유는, 토니는 AI와 대화를 하기보다는 명령을 주고받는 관계에 더 익숙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피터가 처음 '캐런'이라며 좋아라하고 떠벌거리는 것을 들었을 때는 쟤는 이게 프로그램에 불과하다는 건 알고는 있는 거지? 싶기도 했었는데, 그 짓을 제가 직접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많은 경험 시켜주는군, 미스터 파커. 그나저나 이쪽은 정 없게도 부르네, 나름 아빤데. 자비스에게는 sir을, 프라이데이에게는 boss라는 호칭을 설정해놓은 반면 피터의 AI와는 딱히 교류할 필요가 없어서 아무 설정도 안 해놓기는 했지만.

 

  [그래서, 저를 어디로 데려가실 건가요, 스타크 씨?]

  "또 미안하게 됐네, 난 스파이더맨이 아니라서. 이 나이에 쫄쫄이 입고 건물 사이를 뛰어다니는 건 영 아니지."

  [나이는 중요하지 않아요, 스타크 씨. 항상 하고 싶은 바를 따라가는 사람이 진정한 히어로랍니다.]

 

  아, 그러고 보니 최대한 자상하고 상냥하게 설정해놓기는 했었지. 토니가 피식 웃었다. 열 네 살인지 열 다섯 살인지 구분도 안 가는 애가 히어로 한다고 설치는 것 때문에 나름 외롭고 고달프지 말라고 노력해 그런 것을 우선시하기는 했었다. 그래도 이런 것 때문에 도망친 건 아니라는 확신은 가질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인 걸까.

 

  "이 나이까지 되어서 AI에게 꿈과 희망을 복돋움 받으려는 것도 아니야."

  [그렇다면 저를 왜 가동시킨 건가요, 스타크 씨?]

  "...그러게. 더 이상 술로 간을 혹사시키다간 지방간보다 페퍼의 분노에 먼저 죽을 것 같아서?"

  [저런. <피터 파커 금주 프로토콜>을 실행할까요?]

  "뭐? 그런 게 있어? 걔 술도 마시나?"

  [물론이죠. 졸업 몇 주 전 열린 프롬에서 친구가 건네준 술을 마시고 메타휴먼의 힘이 사라져서 당황한 나머지 집으로 달려가 슈트 마스크까지 뒤집어쓴 적도 있어요.]

  "술을 마시면 힘이 없어져? 처음 알았군. 걔는 그런 걸 나한테는 얘기도—"

  [당시 토니 스타크에게 전화를 세 통 정도 시도한 후에 모두 연결되지 않자 바쁘실 텐데 괜히 걸었다고 스스로를 자책했어요. 그 뒤 마스크를 벗은 걸로 저와의 연결이 끊기고 그 다음 날도 패트롤을 돌지 않았어요. 당시에 울고 구토한 것으로 추정 돼요.]

 

  젠장. 토니는 묘하게 책망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AI의 목소리에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확인사살을 당할 필요는 없었다. 피터에게 제가 얼마나 무심했는지를 지금 다시 마주하는 건, 피터의 표현대로 하자면 감정이 1부터 10까지의 기준에서 11을 찍은 것과도 같았다. 그때 뭘 하고 있었더라? 피터의 프롬이랬나? 대충 그게 어느 즈음이었던 게 기억 나는 걸 보면 완전히 무심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적어도 그는 당시에도 그렇게 생각했을 텐데, 피터의 시점에서 이렇게 말을, 그것도 저렇게 불필요할 정도로 상세히 전해듣자니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바빴는데. 정말 바빴던 건 사실인데.

  

  [하지만 스타크 씨, 이건 피터 자신을 위한 금주 프로토콜이 아니랍니다.]

  "...그럼?"

 

  약간의 정적.

 

  [<피터 파커 금주 프로토콜>을 실행합니다.]

 

  AI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를 나타내던 홀로그램은 불현듯 사라지고 대신 홀로그램 동영상 하나가 떴다. 토니는 어느새 다시 늘어져 있던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우고 커진 눈으로 화면을 마주했다. 벽 한 쪽 면을 다 뒤덮기라도 할 것처럼 큰 화면 속에 그 애가 있었다. 피터 파커. 토니로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분홍색과 검은색, 보라색 등이 적절히 섞인 체크무늬 셔츠를 입고 허리를 숙여 화면에 한가득 얼굴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못 보던 옷이라는 건, 토니가 그렇게 이 잡듯 데이터 베이스를 뒤져서 피터가 담긴 영상을 찾으려고 했을 때 그의 수색망에조차 안 걸린 영상이라는 걸 뜻했다. 이런 영상의 존재조차 몰랐다. 이 와중에 평소에 피터의 옷 선택에 진저리를 치던 토니에게도 합격점을 따낼 정도로 꽤 괜찮아서 잠시 놀라고 있던 토니는 화면 속의 피터가 화면을 조정하고 등을 돌려 핸드폰으로 추정되는 녹화 기기로부터 적당히 멀어진 뒤 다시 정면을 보고 큼, 큼 하고 헛기침을 할 때에야 다시 정신을 차렸다.

 

  - 안녕하세요, 토니. 지금 이걸 보고 있으시다면, 다시 예전의 버릇이 나오신 거겠죠? 

 

  토니는 대답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 말았다. 화면 속의 피터는 긴장한 듯 침을 삼키며 앳된 티를 냈다. 토니는 그가 열 일곱 살 즈음인 것 같다고 속으로 가늠했다. 그런데 왜 처음 보는 옷이지?

 

  - 사실 요즘 토니랑 사귀는 건 정말 꿈만 같지만, 걱정 될 때가 많거든요. 토니는 모르시겠지만, 되게 여린 편이시라는 거 알고 계세요? 지금 듣고 뭐? 내가? 헛소리 하고 있네, 잘못 알았네, 하셨죠? 토니도 토니가 여린 걸 모르시지만 토니는 정말 여려요. 제 눈에는 그래요. 

  "...네가 할 말은 아닐 텐데."

  -뭐, 제가 할 말은 아니고요.

 

  허. 토니는 이번에는 피식 웃는 대신 아예 대놓고 웃음을 터뜨렸다. 오랜만에 피터와 대화를 나누는 것만 같았다. 남들은 이해 못 하는 과학적인 이야기를 하면 눈을 빛내며 제 문장을 대신 끝내줄 정도로 제가 할 말을 다 꿰뚫고 있었던 것 같았던 피터. 언젠가는 그게 너무 대견해서 감탄하듯 똑똑하다고 반복해 말한 적도 있었다. 그때 피터의 눈이 어찌나 반짝였는지, 그것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광채였다.

 

  - 이 동영상을 찍는 이유는, 제가 토니를 떠나있게 될까봐... 불가피한 이유로 제가 토니를 말릴 수가 없어지면 어쩌나 해서예요.

  "......."

  - ...그으런 이유일 거라고 생각하셨죠? 땡, 거짓말이었어요! 와, 제가 그럴 거라고 생각하셨다니 실망인데요? 오히려 반대예요, 제가 토니를 너무너무 좋아해서, 토니를 평생 떠날 수 없을 정도로 좋아해서란 말이에요. 제가 토니를 너무 좋아해서, 술을 왕창 드시고 계셔도 퍼피 아이즈 발산하시면서—토니는 저보고 갓 태어난 강아지 눈동자라고 놀리시지만 본인도 만만치 않으시거든요—더 마시고 싶다고 하시면 제가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래서 그럴 땐 짠! 제가 이 프로토콜을 실행하면, 캐런이든 프라이데이든 이 영상을 틀 거예요. 토니의 눈을 보지 않으면 제가 굳건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래서, 흠. 준비되셨어요?

 

  맞아, 말이 이렇게 많았지. 토니는 그런 식의 감상과 함께 웃음을 머금고 화면을 봤지만, 프레임이 넘어갈 수록 스스로도 느껴질 정도로 점점 얼굴이 굳어갔다. 화면 속의 피터는 잔인할 정도로 본인이 전혀 지키지 못할 말들만 하고 있었으니까. 그 야속함에 토니는 점점 머릿속의 생각의 결이 거칠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면, 널 찾느라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면 넌 내가 여리다고만 하지는 못하겠지. 내가 어느 정도까지 미쳐갔는지도 모르겠지. 화면 속의 피터는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려는 듯 이마에 주름이 지도록 인상을 찌푸렸다.

 

  - 토니. 술 그만 마셔요. 우리 그만 마시기로 했잖아요. 아뇨, 변명하지 마세요! 그 어떤 변명도 먹히지 않아요. 솔직히 토니, 나이도 있는데 술 마시면— 아니, 이건 너무 갔다... 어쨌든.

 

  스스로 감당하지도 못하고 바로 인상을 풀어버린 피터에 토니는 건조하게 웃었다. 무심결에 탁자 위에 올려놓은 글라스를 들 생각은 어느새 전무했다.

 

  - 어쨌든, 그러니까, 술은 적당히 마시자는 거죠. 토니 책상 위에 놓여져 있는 그 <토니 스타크도 심장이 있는 증거>처럼 토니 스타크도 간이라는 장기가 있잖아요. 간 건강은 중요하고요. 간이 인체에서 가장 큰 장기인 건—죄송해요. 말이 좀 많죠? 어, 이거 어떻게 끝내지?

 

  그러더니 어색하게 두리번 대다가 직접 다가오는 피터, 그리고 동영상 종료. 토니는 하, 하고 짧게 웃었다. 머릿속에 뭐라 설명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는 감정들이 마구 소용돌이를 쳤다. 미치겠군. 입으로 내뱉은 짧은 감상이 그의 심정을 대변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 이럴 때는 술을 마셔야 하는데, 이렇게 되니 마실 수도 없고. 잠시 멍하니 테이블 위를 바라보던 토니는 이내 화풀이하듯 책상 위에 놓여진 병이고, 글라스고 모두 손짓 한 번으로 모두 책상 밑으로 치워버렸다.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무슨 일이죠, 스타크 씨?]

 

  제가 사태를 일으켜놓고도 저렇게 속 편한 질문을 물어오는 저 망할 AI를 어찌하면 좋을지. 토니는 그저 같은 말을 내뱉었다. 미치겠군. 그 두루뭉슬한 말은 AI는 커녕 사람조차 제대로 간파하기 힘들었을 텐데, 주인을 닮아 예리한 피터의 AI는 정곡을 찔렀다.

 

  [스파이더맨이 그리우신가요?]

 

  그립다는 말이 오히려 마음 편했다. 가끔 그가 여기 있었으면 좋겠다고 감상하는 수준의 감정이었으면 훨씬 좋았을 거란 뜻이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것은 권태로운 감상이 아닌 지독하게 그를 괴롭혀오는 생각이었다. 피터 파커가 여기 있었더라면. 아니, 피터 파커가 여기 있어야 하는데. 토니는 그 모든 것을 AI에게 털어놓을 자신은 없기에 팔꿈치를 테이블에 대고 고개를 두 손에 파묻은 채 간단히 대답했다.

 

  "그런 편이긴 하지. 애인이었으니까. 아니, 애인이었나? 키스도 하고 섹스도 했고, 나름 내가 애인이라고 인정까지 했는데, 그쪽에선 나를 뭘로 생각하길래 이렇게 종적을 감춰버리는지 알 수가 없네. 책임감도 없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도 없이, 어떻게 이렇게 깔끔히."

  [보통 '애인'의 정의는 사랑을 하는 사람이죠. 스타크 씨, 피터를 사랑하셨나요?]

 

  그 감성적인 질문이 어색했다. 토니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말을 쉽사리 하지 않았다. 사실 사랑 자체를 거의 하지 않았다는 것에 가까웠다. 사람을 쉽사리 믿을 수 없는 위치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누군가를 자신의 가장 취약한 부분에 무조건적으로 들인다는 것에는 본능적인 맹렬한 거부감이 있었다. 사랑은 호감과 달랐고, 섹스와도 달랐기에,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하면서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그리고 애인이라고 할지언정 굳이 사랑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은 토니 스타크를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는 바이블이었다. 피터와 처음 연애를 시작했을 때도 그는 사랑하냐는 물음에 가차없이 '사랑까지는 아니지, 그쪽도 사랑보단 동경일걸'이라고 대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2년여의 시간동안 이렇게 살아놓고도 부정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

  [그렇군요.]

 

  AI의 대답이 묘하게 간결했다. 습관적으로 술에 손을 뻗던 토니는 자신이 다 깨뜨려버렸다는 것을 깨닫고 한숨을 쉬었다. 그때였다.

 

  [스파이더맨의 대답을 들으실래요?]

  "뭐?"

  [사랑한다고 하셨잖아요. 베이비 모니터 프로토콜에서 키워드:사랑으로 검색을 시작합니다.]

 

  토니가 막을 수 있기도 전에 화면에는 또다른 영상이 떴다. AI가 말한대로 베이비 모니터 프로토콜인지, 퀸즈의 노을지는 풍경이 고층 빌딩에서 내려다보이고 있었다. 옥상에 걸터앉아 있는지 피터의 발이 달랑거리며 화면에서 나왔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 캐런, 오늘 토니가 발표한 내용 봤어? 스타크 인더스트리 신제품! 정말 너무 멋졌어, 그걸 발표하는 토니는 정말, 잘생겼고, 멋있었고, 훤칠했고, 능숙했고, 음, 섹시했고! 진짜, 그거 발표하신다고 또 출장 가신다고 했을 때 나 서운할 뻔 했는데, 그런 제품이라면 멀리 도쿄까지 가신 게 이해는—

  - [스타크 씨는 현재 두바이에 계셔, 피터.]

  - 뭐? 두바이? 뭐야, 전혀 다른 장소잖아? 와... 진짜 바쁜가보다. 저번주는 도쿄, 오늘은 두바이, 근데 애인한테 말도 안 했다 이거지... 아냐. 바쁘니까 어쩔 수 없지, 내가 이해해야지. 토니 스타크를 사랑하려면 원래 그런—

  - [스타크 씨를 사랑해, 피터?]

 

  뭔가 크게 부스럭,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피터의 단발마의 비명과 함께 시야가 땅 쪽으로 바뀌었다. 그 시야의 중점은 떨어지고 있는, 반쯤 먹다 만샌드위치였다. 피터가 놀라 샌드위치를 떨어뜨린 셈이었다. 참으로 요란한 반응이었다.

 

  - 깜짝이야, 갑자기 그런 거 물어보지 마, 캐런!

  - [미안.]

  - 물론... 사랑하지. 토니잖아. 열 다섯 살때부터 사랑했는걸. 사실 그 전부터 사랑했을 지도 몰라.

 

  무척 쉽게 나온 말이었다. 토니는 성대가 메마르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 [스타크 씨도 널 사랑하실 거야.]

 

  물론이지, 하고 대답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화면 속의 피터는 힘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 그런 말 하지마, 캐런. 괜히 기대하게 되잖아. 토니는... 나는 이해할 수 있어. 토니는 나랑 다르게 자라셨잖아. 페퍼가 저번에 그러셨는데, 그, 몇 년 전에 갑자기 스타크 인더스트리 간부에서 잘린 셈인 그 사람... 토니랑 되게 가까운 사이였대. 어렸을 때부터 의지하셨는데, 그렇게 배신 당한 거야. 그러니까 얼마나 사람을 믿기 힘드시겠어.... 난 이해할 수 있어, 진짜야.

  - [그래, 피터. 좋은 마음가짐이야.]

  - 그래도...

 

  너는 대체.

 

   - 한 번쯤은 말해주시면 좋긴 하겠지...

 

  나를 어디까지 무너뜨릴 작정인 걸까.

 

   토니는 홀로그램을 종료하고 일어섰다. 더이상 그 어떤 말을 할 기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Protocol WATCHER: D+854

 

  딱 일주일이었다. 토니를 영상 단 두 편으로 만신창이로 만들어버린 그 빌어먹을 AI를 마주한지 일주일 만이었다.

 

  프로토콜 워쳐가 신호를 보내온 것은.

 

  토니는 이번에는 아이언맨 아머의 무언가를 보완하기 위해 작업실에서 마크 47호에 손을 대고 있었다. 왠지 이음새같은 걸 좀 막아보고 싶은데, 저기 뭔가 들어오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 하고 중얼거리던 토니의 시선은 홀로그램으로 띄워놓은 마크 47호의 도안 왼쪽 꼭대기에서 뭔가가 깜빡, 깜빡거리는 곳으로 쏠렸다.

 

  "뭐해?"

  [Boss, 흥미로운 진행 사항이 있습니다.]

 

  빨간색으로 깜빡. 파란색으로 깜빡. 다시 빨간색으로 깜빡, 파란색으로 깜빡... 그 색 배열이 무엇을 뜻하는지 안 토니는 온 몸의 피가 차게 식는 것을 느꼈다. 예의 그 심장이 꺼지는 느낌. 2년이 넘는 기간동안 느껴보지 못 한 바로 그 느낌에 토니는 모든 것을 치워버리고 급하게 되물었다. 아니, 되물으려고 했는데, 어느새 입이 바짝 말라버려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몇 번 시도한 끝에 토니는 눈을 부릅 뜨고 물었다.

 

  "피터 파커를, 찾았어?"

  [아뇨. 하지만—]

 

  빌어먹을.

 

  "젠장, 피터 파커를 찾은 것도 아닌데 왜 워쳐를—"

  [워쳐 프로토콜로 찾은 정보니까요. 최근 인터넷 상에서는 '토니 스타크를 빼다 박은 아기가 존재한다'라는 루머가 공공연히 퍼져 있어요, boss. 타블로이드지에까지 발을 들일 정도로 규모가 커졌고요.]

  "그것 참 놀랍네. 뭐가 놀랍냐면, 정확히 그 워딩을 이용한 딱 그 루머를 듣는 게 이번으로 세 자릿 수는 되는 것 같다는 게 참으로 놀라워. 사실 요즘은 뉴요커들의 아침 인사가 그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거든, '좋은 아침이야, 토니 스타크의 숨겨진 아들은 잘 있을까?' 정말이지, 프라이데이, 이딴 루머 때문에—"

  [유독 규모가 큰 루머길래, 이왕 가동되고 있는 워쳐 프로토콜을 이용해 한번 수사에 착수해 보았는데요,]

  "이런 거에 워쳐 쓰지 말자고 페퍼랑 몇 번이고 약속을—"

  [일치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결과가 있어요!]

 

  무시하는군. 이제 아예 무시해. 짜증이 머리 끝까지 나서 평소보다도 더 실컷 비꼬던 토니는 프라이데이가 정말 중요하다는 듯이 힘주어 말하는 것에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화면에 모자이크 수준의 커다란 픽셀의 흐릿한 CCTV 화면이 뜸과 동시에 프라이데이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이어졌다.

 

  [타블로이드지에 따르면, 인터넷 댓글을 남긴 증언자는 한때 토니 스타크와 매우 닮은 아이를 데리고 있는 남자에게 보스턴 남부의 캐슬 섬으로부터 해상으로 약 1.86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스펙타클 섬으로 가라고 추천을 했다고 합니다. 이 섬은 워쳐 프로토콜의 D+756의 02:34시부터 02:58시의 타겟이었기 때문에 분석을 해봤는데, 이 곳에서 일치하는 결과는 찾지 못했습니다.]

  "유언비어 수준의 인터넷 댓글이었으니까."

  [그래서 앞뒤 타겟도 수사 범위에 포함시키니, 그 다음 타겟이었던 D+756부터 D+759까지의 타겟인 페독스 아일랜드에서 나온 CCTV화면이 저것이에요. 현재는 잘 화질이 보이지 않지만 스타크 인더스트리 특허의 화질 인상 기법을 이용한다면,]

 

  프라이데이의 말과 함께 화면이 자신이 직접 개발한 기술로 휙휙 바뀌자, 토니는 천천히 들고 있던 드라이버를 내려놓았다. 화면 속에서는 한 아이가 웃으며 건물 밖으로 뛰어나가는 것을 20대 중후반으로 추정되는 몸집 큰 남자가 당황하며 쫓고 있는 모습이 타이밍 좋게 찍혀 있었다. 남자의 얼굴은 한 번도 못 본 얼굴이었지만, 반면 아이의 얼굴은... 토니는 눈을 의심하며 눈가에 힘을 줄 수밖에 없었다.

 

  "저건 나잖아."

  [정확히는 Boss를 정말 닮은 아이죠.]

  "아니, 그 수준이 아닌데. 누군가가 시간 여행으로 과거의 나를 납치해서 21세기에 데려놨다고 해도 믿겠어. 내가 봐도 저렇게 닮았는데, 저렇게 클 때까지 아무도 몰랐단 말이야?"

  [그게 흥미로워요. 이 아이의 얼굴이 CCTV에 찍힌 것이 이번이 처음이거든요. 뿐만 아니라 출생 신고를 비롯해 아무런 등록이 되어있지 않아요. 미국 시민권자 데이터베이스에는 이 아이가 없고, 건강보험 데이터베이스, 그 어떤 교육 지구 데이터베이스, 심지어 난민 데이터베이스에도 마찬가지예요.]

 

 토니 스스로도 몰랐지만, 그의 눈은 풀 수 없는 문제를 마주한 매카닉처럼 다시 이채로운 빛을 띄고 있었다. 그의 머리를 자극하는 수수께끼가 나오면 언제나 느껴지는 그 약간의 희열과 기어코 답을 찾아내겠다는 결의가 함께 담긴 빛이었다. 이번 수수께끼는, 우선 가능한 출제자는 많은 편이다. 수두룩한 지난 연인들 중 여자 한 명이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고 혼자서 키워왔다면 누구든 가능했다. 이렇게까지 오랜 시간동안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고 숨겨왔다는 건 이상하기도 했고, 좀 뭐랄까, 무책임하기도 했지만, 토니의 눈까지 피해왔다는 건 좀 대단한 일이기도 했다. 애 건강보험도 안 들어 놓다니, 좀 어린 편이려나? 토니는 생각 없이 그렇게 가정하며 겉옷을 집어 들었다. 전 애인이나 파트너를 만나는 건 최대한 피해 왔지만 그보다는 호기심이 더 중요했다.

 

  "가봐야겠어."

  [그럴 줄 알고 무인 헬리콥터를 대기해 놓았어요. 가시는 길에 사진 속의 남자의 신원과 거주지를 브리핑해드릴게요.]

 

  그리하여, 불과 2시간 후에 토니는 페독스 아일랜드의 관광지를 제외한 유일한 주민 거주지라는 곳에서 CCTV에 나왔던 건물 앞에 서 있었다. 이런 섬이라면 토니 스타크의 클론 수준인 아이가 뛰어다녀도 아무도 모를 것 같기는 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관광지는 몰라도 이 곳은 매우 적막했다. 주민이라고 해봐야 관광업 종사자들 뿐이라고 할 정도면 말을 다했지. 임대료도 쥐꼬리만 받을 것 같은 낡아빠진 건물을 올려다보던 토니는 곧 프라이데이가 가리켜주는 대로 들어서서 2층을 눌렀다. 이름이 뭐라더라, 에디 브로커? 에디 브로크?

 

  이윽고 엘레베이터가 열리고, 그곳에서 내려 브로크가 산다는 2A호 앞에 선 토니는 어쩐지 기묘한 데자뷰를 느꼈다. 장소가 낯이 익은 게 아니라, 이 시야가, 이 구도가 낯이 익었다. 왠지 몇 년 전에 본 것 같은, 누군가의 문을 두드리며 여기 혹시 누군가가 있냐고 묻는... 하지만 토니는 태어나서 그가 지금 내뱉을, '여기 제 아들로 추정되는 남자가 있습니까?'하는 대사는 해본 적이 없었기에 그는 그게 그저 이상한 기분 탓일 뿐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하긴 그가 지금부터 겪어야 할 드라마틱한 상황에서, 제아무리 걱정보다는 흥미가 앞선다지만, 기분이 마냥 평온하기는 힘들었으니까.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굵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CCTV에 찍힌 나이대와 얼추 일치했다. 토니 스타크라고 하면 문을 열어줄 리 없겠지? 그렇게 열심히 숨겼는데. 토니는 대신 손목에 달린 장치에 조금 손을 댄 뒤에 목에 가져다대고 입을 열었다. 음성 변조였다.

 

  "택뱁니다."

  "네? 야, 너 택배 시켰냐?"

 

  집 안에 있는 누군가가 조용히 대답하는 듯, 말소리같기는 하지만 뚜렷히 들리지 않는 소리가 토니의 귀에 닿았다. 아직은 전애인 중에 짐작 갈 만한 후보가 없을 정도로 목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았다. 물론 목소리를 듣지는 않아도, 동거하는 남자가 같이 애까지 키워줄 정도로 열의 있는 애인 치고는 호칭도 단순한 편이고, 나이대도 어린 걸로 봐서 좀 어린 축에 드는 애인이라는 짐작은 운 좋게 맞아떨어졌기는 했다. 잠시 후에 납득할 만한 대답이 나왔는지 집 안에서는 남자가 일어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토니는 그때까지만 해도 한가롭게, 방음 더럽게 안 되는군,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흑발의 덩치 큰 남자가 나왔다. 토니는 그가 CCTV 속의 그 남자가 맞다는 것을 머릿속으로 체크했다.

 

  "혹시 친구놈이 보낸 거—"

 

  남자는 말을 불현듯 멈췄다. 그럴 수도 있지, 토니 스타큰데. 토니는 지극하게 정상적인 그 반응에 자신 또한 지극하게 정상적이고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할진 스스로도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원체 애드립의 대가이자 세간에서는 재앙의 주둥아리였기 때문에 우선 입을 열고 보면 뭐든지 튀어나올 것 같았다. '제 아들이 여기 있다면서요?', '제 아들 이름은 뭔가요?', 내지는 '안녕, 날 보면 좀 찔리는 게 있으시죠?' 같은 평범한 말이 나오겠거니 했다. 

 

  하지만.

  하지만 토니는 자신이 볼 광경이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그래서 그 또한 평범하게 말을 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전혀 예상치 못 하고 있었다.

 

  "저기, 여기는—"

 

  무심코 남자의 어깨 뒷쪽을 본 순간, 토니는 이미 그의 말은 단 한 마디도 들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이제야 왜 이 구도가 낯이 익었는지를 깨달았다. 어떻게 낯이 익지 않을 수 있겠어. 어디에 누군가가 있었다는 추정을 하며 온 장소. 현관문이 열리던 그 순간 맞는 장소를 찾아왔다는 확신. 모두 2년 전에 이미 겪은 것들인데.

  그러니 이번에는 달라야 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달랐다. 당황한 듯 눈을 부릅 뜨고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굳어 있는 그, 그—

 

  "...피터, 파커?"

 

  곱슬머리 브루넷이, 이번에는 정말 토니의 앞에 서 있었으니까.

 





*


- 본문의 에디 브로크는 하반기에 개봉하는 톰 하디가 연기하는 베놈이 아니라 얼티밋 코믹스의 성격과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속의 에디 설정 일부를 따온 코믹스 속의 에디입니다.

- 애초에 예고했던 5편보다 더 길어질 것 같습니다^^;;; 다음편에 완결을 기대하셨던 분들께는 죄송합니다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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