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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피터] 신분증을 제시해주세요 5

토니의 아이를 데리고 도망치는데 처음부터 들킬 위기에 처해지는 피터의 이야기

  이름을 부른 것은 들었다. 그런데 그 뿐이었다.

  눈 앞의 사람이 '토니 스타크'라는 것을 인식한 순간, 피터는 평소에는 그렇게도 예민하던 오감이 마치 술에 절여진 것처럼 몽땅 오작동을 하는 것을 느꼈다. 눈 앞에 있는 사람을 인식하고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알아듣기는 커녕 제가 어떤 기분이어야 하는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들켜버렸다는 두려움이나 그에 엇비슷한 절망감? 2년이 넘는 시간만에 그를 드디어 마주했다는 눈물겨운 행복감? 아니면 아이를 데리고 다시 도망쳐야 한다는 막연한 긴장감? 심지어는, 그래도 저를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찾고 있기는 했구나, 하는 깨달음에서 오는 죄책감과, 부끄럽지만 그 깨달음이 주는 모순적인 기쁨을 더한 복합적인 감정까지. 그 중 무엇 하나를 골라잡으려고 해도 쿵, 쿵 하고 미친듯이 뛰는 심장은 뇌가 제대로 작동할 수도 없이 버겁게 시끄러웠다. 피터는 두 눈을 주름지게 꾹 감았다가 다시 떴다. 떨리는 눈꺼풀 뒤에서 드러난 동공이 자석에 끌린 것처럼 토니의 눈을 찾아 마주했다. 비슷한 색의 짙은 갈색 눈동자 두 쌍이 마치 알맞는 퍼즐 조각을 끼우듯 딸깍, 하고 서로의 시선과 맞아떨어짐과 동시에 그때까지만 해도 현관 앞에 선 그대로 자리에 얼어붙어 있던 토니는 누군가 스위치를 누른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피터는 그가 에디를 거칠게 밀치고 제 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그 자리에서 자라난 나무처럼 붙박혀있을 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에디는 이 상황의 이상한 기류를 감지했는지 비키지 않으려는 듯 단단하게 서있었지만 토니는 그가 종이로 만들어지는 인형이라도 된 것마냥 너무도 쉽게 옆으로 치워버렸다.

  피터는 다가오는 토니를 보며 제 숨이 가파르게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정말... 토니 스타크였다. 토니였다. 편한 티셔츠 위에 입은 몸에 딱 맞도록 재단된 자켓, 깔끔하게 올려세운 머리, 큰 두 눈이 비쳐오는 옅은 색의 선글라스같은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토니 스타크의 패션 초이스같은 것을 차치하고라도, 피터의 눈을 한 번도 피한 적 없이 또렷히 마주해오는 두 눈, 이를 악무느라 더 날카로워진 턱선, 어떤 감정이든 북받쳐오르면 가늘게 떨리는 길다란 속눈썹. 그런 것들이 모두 2년 전과 다름 없이 그대로였다. 조금 파리한 안색만 제외하면 피터가 어제 그를 봤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그는 그대로였다. 잘 지내셨다는 뜻일 거야, 그렇지? 그런 생각이 들자 피터는 눈가에 눈물이 차오를 것만 같아서 고개를 급히 숙였다. 단단한 손아귀가 그의 왼쪽 팔뚝을 꽉 잡아온 것은 그때였다.



  "고개 들어."


  피터는 그 말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고개를 숙인 상태에서 잠시 심호흡을 했다. 나오려는 눈물을 참으려고 한 행동이었는데 토니는 그게 거부로 느껴졌던 건지 피터의 팔을 더 꽉 잡아오며 다시, 고개 들어, 라고 반복해 말했다. 피터는 고개를 숙인 잠깐의 시간동안 나름 눈물을 참는 것에 반절은 성공한 것을 느끼고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때까지 피터를 재촉하지 않던 토니는 그를 가만히, 쭉 쳐다보고 있었던 듯, 피터가 고개를 다 들자마자 황급할 정도로 빠른 시선으로 그의 얼굴을 훑었다. 피터는 토니의 시선이 제 얼굴을 훑고 지나간 뒤에는 그의 눈동자 속에서 물감이 풀리듯 뭔가가 탁, 하고 풀렸다는 생각을 했다. 어째선지는 몰라도 그런 인상을 받았다.



  "정말 피터 파커군."

  "......."

  "정말... 피터 파커잖아."


  토니의 목소리는 누가 목을 조르고 있는 듯 간신히 쥐어짜내는 것처럼 나왔다. 피터는 저와 토니가 같은 마음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그 기분 자체는 이해할 것 같다고 느꼈다. 당장 자신도 목에 돌조각이 낀 것처럼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고 있었으니 당연했다. 이런 상태로는 저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을 게 뻔해, 피터는 그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이 상황에서 뭔가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백색 소음과도 같이 배경 한 켠에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더 거세게 차오르는 감정이 그를 교란시켰다.


  "네가 왜 여기..."


  멍하니 중얼거리던 토니가 마치 몸이 제 말을 듣지 않는 꿈 속에서 유영하듯 천천하고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뒤를 돌아 에디를, 그리고 피터를 번갈아서 쳐다봤다. 에디의, 상황이 종잡히지 않지만 우선 지켜보겠다는 듯한 찌푸린 인상과 굳건한 자세에서 피터의 이리저리 재빨리 움직이는 눈동자와 일렁이는 목젖까지. 그러다 토니는 불에 덴 사람처럼, 뭔가 갑자기 생각 났다는 듯 두리번거렸다. 피터는 지금의 토니가 기름칠을 한 지 너무 오래된 로봇처럼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피터가 토니를 간접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알고 지낸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이 와중에 전 애인의 새로운 일면을 보게 된 것에 피터 안의 무언가가 조금 호기심이 생기려는 찰나, 토니의 시선은 얌전히 앉아서 에디의 필기구들로 구조물을 짓고 있는 에드에게 떨어졌다.

  피터는 그 순간 온 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에드. 맞다, 에드.
  토니가 절대 용납할 수 없을 사항의 결정체이자 피터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존재. 피터는 제 몸 속의 투쟁-도피 반응이 살아나며 에피네프린이 온몸을 전광석화와도 같은 속도로 빠르게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면 이상했다. 피터는 토니가 에드의 존재를 모르니, 이 곳에 그가 있다는 사실이 자신을 향한 탐색의 결과라는 것을 당연하다는 듯이 가정했지만, 토니는 마치 피터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처럼 굴었다. 애초에 피터와 반응이 비슷하기까지 했으니, 그는 정말 피터가 이 곳에 있다는 것에 놀랐다는 소리고, 그것은 이 곳을 찾은 이유가 피터가 아니었다는 소리고, 그것은...


  "...여기 있긴 있었군."


  토니가 에드를 찾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피터가 아니라.
  아마 저를 매우 닮은 아이가 있었다는 걸 어떻게든 알고 찾아왔을 것이었다. 그리고 애만 데리러 찾아온 곳에서 피터를 본 게 놀라워서 이렇게까지 격하게 반응했을 것이고. 퍼즐이 깔끔하게 맞아떨어지자마자 피터는 순식간에 제가 엄청난 멍청이처럼 느껴졌다. 토니가 2년동안 자신을 찾고 있을 거라는 가능성은 고려하는 것도 멍청할 수준으로 한심한 안건이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피터는 제 성대가 다시 기능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아 도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토니가 먼저였다.


  "거기, 잠깐 나가줬으면 하는데."


  에디를 돌아보며 한 그 말은 누가 들어도 명령이었다. 그러고 보면 토니는 여전히 한 손으로는 피터의 팔뚝을 꽉 움켜쥔 채였다. 피터가 마음만 먹으면 벗어날 수 있었겠지만 그 순간 딱딱히 굳어버린 피터의 뇌에게 토니의 손은 비브라늄보다도 견고하게 느껴졌다. 피터는 결국, 제 이름을 불린 에디가 감전된 듯 깜짝 놀라 둘을 번갈아 보더니 피터에게 의사를 묻듯 눈을 마주쳐오는 것에 그대로 고개만 작게 끄덕였다. 에디는 그 반응이 탐탁치 않은 듯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토니 스타크가 제 이름을 안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라는 식으로 중얼거리며 현관문을 나섰다. 피터는 토니의 반응을 살폈다. 원래의 그 같으면 누가 봐도 젊은 에디의 그런 말을 비웃으며 비아냥댔을 것 같았는데 그는 여전히 무표정으로 에디의 뒷모습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게 2년 간의 간극에서 비롯된 토니의 변화일지, 상황의 특수함 때문인지는 피터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문이 닫힐 때에서야 토니는 피터를 돌아봤다. 둘이 할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단 둘밖에 없는 그들만의 공간에서 두 사람의 눈이 다시 마주쳤다.

  그 찰나는 피터에게 마치 둘 사이를 가로지르던 투명한 막이 깨진 것처럼 느껴졌다. 이미 아까 봤던 토니의 얼굴에서, 이미 아까 느꼈던 익숙함과 반가움 따위의 감정이 훨씬 더 거센 무언가로 대체되는 순간이었다. 눈물을 터뜨리고 싶기도 했고 환하게 웃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토니를 꽉 끌어안고 싶었다. 2년만에 만났는데 벌써 몸부터 던지고 싶다는 말이 얼마나 우스운 건지를 알고 있었지만, 그 어떤 것도 재지 않고 토니를 품에 안고 토니의 품에 안겨서 다시 토니 옆에 있다는 사실을 마음껏 만끽하고 싶었다. 피터는 때마침, 토니를 처음 보는 것처럼 설레이듯 뛰기 시작하는 심장에 이 감정이 어떠한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애정의 표출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에게서 도망쳐야 할 이유들조차 막을 수 없는 그런 종류의.

  그러나 피터는 언제나 그랬듯 똑똑했고, 자신에게 그런 자격이 없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런 끓어오르는 감정들을 마른 침 한 번 삼키는 것으로 억누르기로 했다. 그런 피터의 목젖으로 잠깐 시선이 튀었던 토니는 쥐고 있던 피터의 팔을 천천히 놓아주고 그 손으로 대신 선글라스를 벗고 정장의 앞주머니에 끼워 넣었다. 조용한 공간에서 토니의 그런 움직임은 마치 폭풍전야와도 같았다. 다시 고개를 든 토니가 피터의 얼굴을 하염 없이 쳐다보다 입을 뗐다. 하지만 그게 분명히 뭔가를 말하려고 한 행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입을 말아들이며 닫았다. 작게 허, 하며 헛웃음을 치기도 하는 그가 마치 인내하듯 이를 다시 악물자 그의 턱선의 윤곽이 더 선명해졌다. 그 선이 떨어지는 모양새를 보던 피터가 바싹 마른 입술을 뗐다.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이에요."


  왜 그 말이 먼저 나왔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토니가 지은 표정이, 일련의 행동들이 2년 하고도 100일 가량 전의 기억과 크게 다르지 않아 잘 지낸 것 같으니 안심을 했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기는 한데, 그 말이 왜 그렇게 우선권을 부여 받았는지는 피터 스스로도 몰랐다.

   토니는 말이 없었다. 이를 악다문 상태에서 피터를 쳐다보고 있던 시선 또한 그대로였다. 그런데 피터의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토니의 눈빛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훨씬 더 또렷하게 피터를 마주해왔다. 또렷하다 못해 얼굴로 쏟아져오는 것처럼 버겁게 파고드는 것 같은 시선에 피터는 본능적으로 흠칫 놀랐다. 그 눈을 잘 알고 있었다. 토니처럼 겉은 강하고 속은 여린 사람이 저렇게 한 치도 흔들리지 않는 눈을 할 때는, 어떤 한 이유 때문에 속마저 빠르게 단단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일 때라는 걸 경험하게 해준 게 바로 토니였다. 그리고 지금 그 '어떠한 한 이유'는 바로 피터 자신이었다.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라고?"


  토니의 목소리가 낯설었다. 누군가가 목을 조르고 있는 듯, 쥐어짜내는 것 같은 건 아까 전과 비슷한데, 이번에는 목소리 끝이 떨렸다. 이런 목소리는... 피터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다. 토니는 고개를 숙이며 한 손으로 눈가를 가리는 것처럼 이마를 괴었다. 피터의 머릿속에 경보음이 울렸다.


  "건강해 보여서 다행... 이라."

   "......"

  "젠장, 피터 파커.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야? 내가?"


  토니가 고개를 휙 들어 다시 피터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의 두 눈이 피터의 몸에 구멍을 내버릴 것처럼 맹렬했다. 피터는 그 시선에 몸이 실제로 꿰뚫리기라도 한 것처럼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곧 다시 입을 연 토니의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떨리는 목소리는 여전히 냉정하지는 못했다.


  "날 보자마자 느낀 게 그건가? 그렇게 편안한 감상이야? 아무 말 없이 800일이 넘는 시간 동안 사라져있다가 나를 처음 보고 한 말이, 지금 뭐라고?"


  토니의 입에서 나온 단어들은 다닥다닥 붙어있듯 속사포처럼 빠르게 내뱉어졌지만, 간간히 토니가 감정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힘주어 말하는 단어들 뒤에는 공백이 생겼다. 피터는 순간적으로, 아주 이상하게도,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5년 전 그 날 여객선을 반쯤 부수어 놓고 마주했던 토니를 떠올렸다. 그때는 토니의 분노가 그 수준을 뛰어넘을 수 있을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과거의 자신이 지금의 토니를 만난다면 바로 기절해버리지는 않을까 싶을 정도로 토니는 훨씬 매서웠다. 토니가 한 발짝을 더 내딛어 피터와 더이상 좁힐 수 없는 거리에 섰다. 더 가까운 거리에 서서 더 날카롭게 피터를 노려보는 토니의 눈은 마치 폭풍처럼 그를 잔뜩 휩쓸었다. 피터가 간신히 입을 열어 스스로를 변호했다.


  "제 말은—"

  "건강해보인다는 말을 할 거면, 적어도 사람을 반쯤 돌아버리게 하고 가지는 말았어야지."


  그러나 피터가 제대로 말을 할 수 있기도 전에 그 말을 끊어버린 토니의 목소리는 조용하게 위험했다. 나지막하게 으르렁거린 그의 말이 가파르게 그 크기를 높이고 있었다. 그 위태로운 목소리에 피터는 혀가 목구멍을 콱 막아버린 듯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아무리 엿같았어도 내게 한 마디 말이라도 해줬어야지, 나를..."

  "......"

  "나를 존중했다면— 아니, 젠장! 나를 사랑했다면, 나를 그렇게 생지옥에 빠뜨리고 가지는 말았어야지!"


  토니가 폭발하듯 내지른 그 말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토니의 손이 피터의 어깨를 잡아챘다. 눈 앞에 있는 사람이 정말 실존하는 사람인 것을, 정말 현실이라는 것을 확인해야겠다는 것처럼 토니의 손은 피터의 어깨를 꽉 쥐다 못해 손가락에 들어간 힘으로 잘게 떨리기까지 했다.


  "네가 그렇게 날 버리고 내게서 도망 친 2년, 2년 몇 개월 간 난 네 생존 여부도 몰랐어. 젠장, 남들이 다 죽었을 것 같다고 했을 때마저 네가 살아있다고 믿으면서도, 나는, 이번에도 내가 틀렸을까봐, 이 길의 끝에 네가 아닌 네 시체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봐, 만약 그렇다면 너를 죽인 게 바로 애초에 널 도망치게 만든 나일까봐, 혹여 안 죽었다고 해도 다시는 만날 수 없을까봐! 그 모든 게 두려워 미쳐버릴 지경이었다고!"


  토니가 피터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면서 토니의 두 눈동자도 피터 앞으로 다가왔다. 두 눈동자에 담긴 차가운 분노가 피터의 두 눈으로 쏟아져들어오듯 강렬하게 그에게 파도쳤다. 그의 손가락만큼이나 그의 목소리는 무척 들어간 힘 탓에 떨리고 있었다.


  "토니...?"

  "...너는."


  피터는 두려웠다. 눈 앞에서 벼락같이 일갈하는 토니도 물론 무서웠지만... 그보다는 토니의 목소리 안에, 분노라는 겹 안에 숨겨진 그의 지난 세월의 공포심이 너무도 또렷히 피터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심장을 덜컥 내려앉게 했다. 피터의 머릿속에서는 타르 덩어리처럼 끔찍하게 검고 끔찍하게 꾸덕한 생각이 점점 크기를 키웠다.

  무언가 확연히 잘못되었다는, 진작부터 잘못되어 있었다는 불안한 본능.


  "너는, 내가 2년동안 살아온 세상을 안다면... 내게 건강 따위를 운운할 자격이 없어."

  "......"

  "...애인이 죽었을 지도 모른다는 말에 죽었다면 시체라도 찾아야 한다고 대답하는 심정을, 네가 조금이라도 헤아렸다면... 애초에 내게 이러지는 못했겠지."


  피터의 귀는 이 와중에도 '애인'이라는 단어를 잡아냈다. 곧, 당시는 애인이었으니까 틀린 말은 아니지, 아직도 나를 애인으로 여겨주실 리가 없지, 라며 스스로 정정했지만.  토니가 피터의 어깨를 쥐고 있는 손을 놓지 않은 채 다른 손으로는 스스로의 얼굴을 감싸며 고개를 숙였다. 그가 과거를 회상하며 확연히 괴로워하는 모습에 피터는 머리가 깨질 것과도 같은 요란한 불길함이 엄습해옴을 감지했다. 이건... 아니었다. 토니가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피터의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피터는 토니'에게' 뭔가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를 '위해' 뭐든지 하고 싶었던 건데. 애초에 그를 떠난 것은 그와의 관계가 나락으로 떨어질까봐 겁을 지레 먹었던 제 비겁함도 있지만 그가 지기 싫다던 책임을 덜어주기 위해 내린 선택이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건...


  "정말 지옥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라면 축하해. 아주 성공적이었어. 세상 살면서 죄 지은 건 다 돌려받는 것 같다고 생각했으니까."


  토니가 자신을 잊는 것은 싫었지만, 그래도 자신을 머릿속 한 켠으로 몰아넣고 그의 인생을 이어나기를 바랐었다.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토니에게는 스타크 인더스트리가, 어벤져스가, 나아가 지구인 전체가 모두 그의 관심이 필요한 채로 있었고, 우선은 애인이었지만 항상 그의 눈에 어리고 어리기만 한 데다가 책임감마저 없다던 청소년이 그의 머릿속에서 차지할 자리는 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너무 쉽게 잊었을 것 같아 서운한 적도 있었다. 떠나기 직전 토니가 보인 태도나 떠난 이후에도 TV에서 본 그 평범한 모습이 몽땅 다 근거가 되어 그런 결론을 가리키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토니는... 피터는 저도 모르게 제 어깨에 놓인 토니의 손등을 미약한 손으로 쥐었다. 그 온기에 토니가 고개를 들며 다시 피터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의 두 눈 속에는 분노보다 더 처절하고 비참한 것이 담겨 있었다. 피로에 쌓인 일종의 지독한 패배감과도 같은 그 두 눈을 보며 피터는, 이번에는 제가 기계가 된 것처럼 천천히, 멍한 머릿속을 헤치고 하나의 질문을 간신히 해냈다.


  "...2년동안... 저를 계속... 생각하셨어요?"


  이 질문에 토니가 긍정한다면 피터는 자신이 예상했던 정도보다도 토니가 더 마음 속 깊은 곳에 자신을 뒀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할까, 아니면 그 때문에 토니가 느꼈던 모든 고통에 죄책감을 느끼며 괴로워해야 할까.

  그 질문에 잠시 멈춰있던 토니는 이내 피식 웃었다. 허탈하다는 것도 같았고 어이 없다는 것도 같았다. 그의 손이 제 어깨에서 스륵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 피터는 저도 모르게 그 손을 잡아채려 했지만 긴장이 풀려 평소처럼 본능적인 움직임이 나오지 않는 터라 토니의 손은 너무도 쉽게 그의 어깨에서 벗어났다. 피터에게서 등을 돌리고, 웬만한 가구가 다 발에 채일 정도로 좁은 거실을 둘러보던 토니는 곧 가까운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고된 일과 도중에 놓인 사람처럼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던 토니가 피터를 보지 않고 묵묵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를 계속 생각했냐고?"

   "......"

  "재밌는 소리를 하네. 너를 생각하지 않은 적이 있었냐고 물으면 차라리 대답하는 시늉이라도 해줄 텐데 말이야. 그렇게 물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너는..."


  토니가 불현듯 말을 멈췄다. 관자놀이를 문지르던 손도 동시에 멈춘 그가 마침 시선이 닿았던 허공의 한 부분을 멍하니 응시했다. 갑자기 바뀐 토니의 태도에 피터는 다시 긴장했지만, 토니는 시선의 행방을 바꾸지도 않고 그저 끊어질 듯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래... 너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지... 너는 나를...

  스스로도 그 조각난 문장들을 입 밖으로 내뱉는 것을 자각하고 있지 못하는 듯한 토니의 행동에 피터는 이상함을 감지했지만, 동시에 그는 미간조차 좁힐 수 없을 정도로 단단히 그 자리에 붙박혀 있었다. 무슨 뜻이지? '너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지'라는 건 무슨 생각을 가리키는 것이고, '너는 나를'이라는 말은 어떤 식으로 끝이 나야 했던 걸까. 피터는 이전에 내려앉았던 심장이 미약하게나마 다시 뜀을 감지했다. 토니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는 몰라도 사실 피터의 질문에는 이미 대답을 한 셈이었다. 그리고 피터는 그제야 깨달았다.

  2년동안 토니가 그를 그리워하기를 바라는 생각 반, 그를 잊어주기를 바라는 생각 반을 하며 그런 스스로의 모순이 어이 없을 정도였으면서도 그는 사실 깔끔하게 반반으로 떨어지는 사고를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사실 토니가 정말 그를 그리워했는지는 몰라도, 18살짜리를 혼자 뒀다는 죄책감인지 걱정인지에 괴로워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피터는 목이 버겁게 타들어가는 것을 느꼈으니까. 행복하게 잘 살았어야죠, 당신에게는 내가 없어도 행복할 이유들이 많았잖아요.  이러면 어떡해요? 이러면 저는 어떡해요? 이러면 나는, 지난 800일이 넘는 시간동안 대체...

  에드가 큰 울음소리를 내며 피터에게 달려든 것은 그때였다. 놀라서 무릎을 굽히며 에드를 들어올리면서도 피터는 제 마음이 기묘할 정도로 갑자기 차분해짐을 경험했다. 맞아... 에드. 모두 에드 때문이었지. 그때 그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에드를 키우지 못했을 것이다. 에드를 CPS에 보내라던 토니의 말이 기억이 났다. 그게 도화선에 불을 지폈었던 기억도. 토니를 소름 끼칠 정도로 닮은 아이, 아니 아들. 자신의 아들. 토니와 피터의 아들. 그 세 단어는 피터를 일깨우는 전류였다. 피터가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하는 제 분신이자 저와 토니 사이의 영원한 연결고리인, 토니와 피터의 아들. 그 아들의 등을 토닥이며 달래던 피터가 눈동자만 움직여 토니를 힐끗 보았다. 토니는 피터가 아이를 안고 달래는 모습을 특유의 까만 동공으로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설명부터 듣지."


  올 것이 왔구나. 피터는 그렇게 생각했다.


  "왜 토니 스타크를 3D 프린터로 복사한 것 같은 애가 지금 네 품에 있는 건데?"


   피터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2년이 넘는 시간동안의 도망은 이 순간 빼도 박도 못하게 완전히 종지부를 맺었다. 이제 피터에게는 두 가지 선 택지가 남아있었다. 순순히 사실을 인정하고 이 사안에 대한 토니의 의견에 따르는 것, 그리고 사실을 부정하고 이 사안에 대한 토니의 의견에 따르는 것.

  오래 고민할 거리가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처음 토니에게서 도망쳐서 아이를 키운 이유는 토니에게 들키면 아이를 포기해야 할 것 같아서였는데, 어차피 이제 들켜버렸으니 제 아이가 아니라고 부정할 이유도 없었다. 사실 인정하는 것은 정말 쉬웠다. 자신이 낳은 당신의 아이라는 사실에 토니는 당황할 테고, 그게 가능하기는 한 거냐고 되묻겠지만 거미에게 물린 뒤로 몸이 비정상이라는 사실을 감안하지 못할 사람도 아니었다. 정말 어려운 일은 준비도 없이 몰아칠 후폭풍을 감내하는 일이었다. 피터 쪽의 후폭풍이 아니라 토니에게 몰아칠 후폭풍.

  피터가 에드를 사랑한 이유 중 하나인 저와 토니 사이의 영원한 연결고리라는 그 비유는 동시에 토니에게 제일 감당하기 힘든 책임일지도 몰랐다. 아이에게 좋은 아빠가 되어줄 자신이 없었다던 토니에게 아이라는 책임을 굳이 지워준 건 이미 어쩔 수 없게 되어버렸지만, 그와 피터가 평생을 아이라는 굴레로 엮이는 책임마저 지워주는 것은  토니에게는 의심의 여지도 없는 독이 될 테니까. 토니가 피터를 사랑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오만함에 불과하다는 것을 피터는 잘 알고 있었다. 토니의 사랑을 받는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게 모두 오만이었다는 것은 이미 열 아홉 살 즈음에 다 깨끗히 인정하고 끝난 바였다.

  피터는 에드를 더 꽉 끌어안았다. 마치 한창 도망칠 때 의식적으로 카메라를 피하기 위해 수없이 취했던 자세처럼. 피터가 보기에 토니는 여렸다. 스스로도 딱히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정말 여리고, 그렇기 때문에 보호막을 단단히 두르고 있는 사람이었다. 감정도 준비되지 않은 관계에서 갑자기 아이로 평생 엮이는 것에 반감을 가지다 못해, 피터를 여전히 아이로 보는 그는 그 사실에 쓸데없는 죄책감마저 느낄 사람이었다. 그건 싫었다. 피터는 아이가 아니라 그 유명한 토니 스타크로부터 800일을 숨은 사람이었다. 그는 적어도 이 사안에서는 토니보다 더 사실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더 싫은 것은, 토니를 거세게 짓누를 그 책임감. 아이에 대한 책임감을 차치하고라도, 배우자로 여긴 적도 없는 피터에 대한 책임감까지 갑자기 떠안는다면 안 그래도 전 지구인의 숙명을 어느 정도 책임 지고 있는 토니 스타크에게는 버거울 게 뻔했다.

  그러니 선택할 때였다. 에드가 제 아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어쩌다 만나게 된 아이라며 둘러대는 식으로 아이를 포기하면 토니는 피터에 대한 견디기 힘든 책임감을 지지 않게 된다. 깔끔한 일이었다.

  '그게 내가 아는 '책임'이야. 동화책에나 나올 미담이 아닌 현실의 책임은 그렇게, 자신을 지워가면서라도, 모두 알맞게 잘라내는 거라고. 세상에는 좋은 의도만으로는 풀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거든.'

  열 일곱 살의 피터가 마흔 아홉 살의 토니에게서 들었던 말들. 열 일곱 살의 피터 벤자민 파커는 세상 그 무엇보다도 토니가 인정할 수 있는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럴 수 있도록 스스로를 잘라낼 기회가 바로 지금이었다.


  "이 아이는..."

  "그래."


  피터가 침을 꿀꺽 삼켰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늘 어려웠다. 애드리브에 능숙한 편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농담을 할 때나 그랬지 거짓말에까지 해당되는 사항은 아니었다. 눈 앞의 토니는 에드에 대한 궁금증을 표시하면서도 막상 시선은 피터만을 올곧게 쳐다보고 있었다.


  "제가, 어떻게 이 아이를 만났냐면..."


  피터는 토니를 사랑했다.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물리적인 안전에만 해당되는 게 절대 아닌, 토니의 정신적 건강까지 모두 고려한 다짐이었다. 토니를 보호하고 싶었다. 토니와 피터는 언제까지나, 어디까지나, 서로를 보호하고 보호했기 때문에 형성된 관계였다.


  "저는..."


  그러니까 말해, 피터 파커. 아무 거짓말이라도 하란 말이야. 쉽잖아. 그냥 토니 전애인을 만나서 아이를 전해받았다고 하거나... 아무거나 말하면 돼. 아무거나. 할 수 있지?

  피터는 심호흡을 하고 고개를 드는 동시에 눈을 치켜뜨듯 번쩍 떠 토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피터의 오감에는 여러 가지 감각이 동시에 들어왔다. 토니의 진한 갈색 동공은 어둡다 못해 까매보이기까지 하다는 시각적 감상을 받았고, 입고 있는 검은 후드티의 가슴 부분을 에드가 잡아당기느라 뒷목에 후드가 걸리는 느낌이 났다. 태어나서 무지를 경험한 적은 우주에 던져졌을 때밖에 없었으면서, 지금 이 순간 그 아무런 예상도 짐작도 없이 피터에게 답변을 바라기만 하는 남자. 피터의 가슴팍이 생명줄이라도 되는 양 매달린 그들의 아이.


  그들의 무척이나 닮은 두 눈.


  "왜 그렇게 뜸을 들여."

  "...토니."

  "...그래, 말해보라니까?"

  "죄송해요."


  피터는 말할 수 없었다.

  아이를 포기하는 것은 피터가 생각하는 '책임'이 아니었다. 토니의 신념 속 책임과 피터의 신념 속의 책임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차라리 못 할 것 같으면 포기하는 것이 책임이라며, 책임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관리하고 그것이 어긋나지 않도록 확실시하는 것이라던 토니의 책임과 달리, 피터의 책임은 정반대였다. 둘 중 누구 한 명이 틀린 게 아닌 그저 두 명의 다른 슈퍼히어로들 사이의 다른 인식이었다. 그걸 이해하기까지가 이렇게 오래 걸렸다. 피터가 생각하는 책임인,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해보자'가 토니가 생각하는 같은 개념과 그렇게 극단적으로 다르다는 것은 인정하기는 쉬웠으나, 둘 중 누구 한 명의 인식이 더 낫다고 재단하지 않고 포용하기는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때문에 피터의 나이가 항상 그의 발목을 잡고, 토니에게도 스스로에게도 그의 책임감은 틀린 책임감이라는 인식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피터는 더 이상 열 다섯이 아니었고, 아니, 그가 열 다섯이었다한들 그는 틀리지 않았다.


  "이 애... 제, 아니 우리 아들이에요."

  "뭐?"

  "...제가, 낳았다고요."


  토니에게 너무도 무거운 짐을 지워주는 것을 알기에 속으로 그렇게나 속죄하면서도, 그리고 토니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실이 생살을 파고들듯 고통스럽게 다가오면서도, 피터는 자신이 맡은 일은 꼭 끝까지 직접 제 손으로 책임져야 하는 부류의 사람이었으므로.

















  뭐가. 뭐가 미안한데.

  피터가 아이를 안고 뜸을 들이다가 뜬금 없이 죄송하다며 사과하던 그 순간, 토니는 그를 몇 년동안 간보던 심장마비가 드디어 오나 싶을 정도로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빨리 뛰는 것을 느꼈다. 태연한 척 피터의 앞에 서있으면서도 제대로 사고가 되지 않았다. 토니는 피터가 아이를 소중하게 꼭 끌어안고 고개 숙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 눈을 피하려 고개를 숙인 것인지, 아이의 얼굴을 보려 숙인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느 쪽이든 피터의 눈은 골똘했다. 중대한 결정을 내리려는 것 같은 그 두 눈이 2년 전에 본 그것 같아 익숙했다.

   문을 들어서고 마주한 피터는 사실 2년 전과 많은 부분에서 달랐다. 여전히 순진해빠진 동그란 모양의 놀란 듯 크게 뜬 두 눈을 보고, 여전히 엉망이 되어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칼을 보고 나서는 그 모든 게 눈에 들어왔다. 2년 전과 비교해 확연히 말라 드러난 턱선이라든가, 그래도 성장기이긴 한 건지 줄어들은 볼살 때문에 약간 더 성숙해진 얼굴, 티셔츠에 체크 셔츠를 받쳐 입던 전형적인 너드 취향에서 조금 멀어진 검은색 후드티와 청바지. 토니의 앞에서 편안하게 풀리기에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도 다시 첫만남처럼 긴장감에 굳어버린 얼굴 근육. 토니가 벼락같이 일갈하던 그 순간에는 예전처럼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두 눈이 물기로 담고 잔뜩 축축해져서는 그 속의 동공이 더없이 흔들려 예전이 생각나기는 했지만, 그래서 더 토니의 울분을 돋우기는 했지만, 그래도 확실히 못 본 사이의 공백은 너무도 큰 부피와 압력으로 다가왔다. 지금도 그랬다. 피터의 눈은 익숙했지만 그 안에 담긴 차분한 빛이 긴장하면서도 항상 신나하던 그 눈빛과는 거리감이 있었다.

  그래서 더없이 무서웠다. 차분한 피터 파커라니, 이 상황에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매뉴얼도 프로토콜도 없었다. 매카닉으로서, 엔지니어로서 항상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는 것에 익숙한 토니는 피터가 그렇게도 침착하게 말을 하는 그 상황에서 최악을 예상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뭐가 미안한 건데.

 

  "이 애... 제, 아니 우리 아들이에요."

  "뭐?" 

  "...제가, 낳았다고요."


  확실한 건, 토니가 예상한 최악은 이게 아니었다.

  차마 토니를 못 보겠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고 눈을 질끈 감은 피터의 입에서는 격통에 찬 신음을 내뱉듯 말이 간신히 나왔다. 그 모습을 보면서 토니는 항상 과민하다고 표현될 정도로 윙윙 열심히 돌아가고 있는 제 뇌조차 한 순간 모든 작동을 정지한 것처럼 말은 커녕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반쯤 멈춰있는 제 뇌는 화용론이 필요한 이 상황에서도 의미론적인 해석만을 내놓았다. 낳았다, 그래, 낳았다는 말은 아이를 직접 몸 밖으로 내놓는다는 뜻이지. 자신의 몸 밖에서. 그리고 피터는 지금 제가 안아든 아이가 제가 낳은 아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현재 피터 파커의 품 안에 있는 아이의 얼굴은... 토니 스타크의 얼굴을 빼다 박았다. 그렇다는 건.


  "너와 나 사이에 생긴 아이라고?"


  토니가 딱딱한 목소리로 내뱉은 말에 피터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긴장 정도가 아닌가? 눈살을 찌푸리고 집중해서 다시 보니 그 얼굴은 긴장으로 굳어진 것처럼 차분하게 다이나믹한 표현을 하지 않으면서도 울상처럼 느껴졌다. 얼굴에 떠오른 표정뿐만이 아니라 반질반질하게 매끈해진 눈동자의 표면에서는 당장이라도 눈물이 차오를 것만 같았다. 토니는 피터가 왜 보는 사람을 그다지도 안타깝게 만드는 얼굴을 내짓는지를 종잡을 수가 없었다. 저 사실을 시인하는 게 그렇게도 절망적인 건가? 속내가 비틀리는 가설에도 토니는 크게 반응하는 대신 얼굴을 쓸어내리며 바닥을 쳐다보았다.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가라앉으면 안 되는 마음이었다. 지금 그게 무슨 말이냐고, 이게 무슨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냐고 일갈해도 모자란 정보였는데.


   "...그래, 알았어. 네 아이라는 거지. 내 아이인 동시에."


  피터 파커가 할 수 있는 말 중에, 이보다도 더 최악인 말이 무수히 많았다는 생각이 되는 건, 대체. 토니의 묘하게 차분한 목소리에 피터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제대로... 들으신 거 맞아요? 제가 낳았다니까요?"

  "그래, 제대로 들었어. 네가 낳은 내 아이. 애초에 방사능 거미에게 물려서 거미의 힘을 가지게 됐다는 소리보다는 덜 놀라운데 뭘 그래. 관계도 가졌고, 너는 거미인간이고, 아예 납득하지 못 할 소리는 아닌데."


  오히려 납득하지 못 하고 있는 사람은 피터인 것 같았다. 그는 토니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커다란 눈을 깜빡이면서도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그 긴장할 새도 없이 풀어져버린 얼굴 근육에 토니는 때에 맞지 않은 웃음이 피식 하고 터져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그래, 이게 피터 파커지. 이제야 토니의 앞에서는 앞뒤 재지 않고 풀어졌던 그 얼굴이 보였다. 토니 스타크의 어린 애인은 이런 얼굴을 했었다.

  토니의 심장이 불안함이 아닌 훨씬 산뜻한 감정으로 조금씩 박자를 빨리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제 자신은 아이가 딸린 남자가 되었다는 점에서 여러 가지 재볼 게 많았지만, 몇 년을 못 본 피터 파커를 갑작스레 다시 만난 그가 평정심을 가지고 현실을 재단하기는 무리여서, 그의 두뇌는 처음부터 피터 파커를 향해 코딩된 것처럼 그쪽으로만 사고를 하기 시작했다. 피터 파커가 내 아이를 데리고 있었다는 말이 지, 내 아이를 낳았고. '아이'가 아닌 '피터 파커'에만 집중하던 토니의 머릿속에는 그렇게 자연스러우면서도 불현듯, 하나의 가능성이 떠올랐다. 지금 눈 앞에서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입술을 깨물고 복잡한 표정으로 다 시 아이를 쳐다보는 저 소년이 도망친 이유는, 어쩌면 토니가 아니라 그저 순전히 저 아이 때문일 지도 모른다는 가설이. 토니의 아들을 위해 토니를 떠난 피터 파커라면, 그게 이유라면, 토니를 망가뜨리고 짓밟은 그 무시무시한 죄책감에서 그는 해방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하지만 마음 속에서 서서히 싹트는 그 기분 좋은 감정은 일단 보류해둘 수밖에 없었다. 토니와 피터에게는 더 중요한 사안이 남아있었으니까. 토니는 여전히 아이와 저를 번갈아보고 있는 피터에게 한 발자국을 더 내딛었다. 조용한 거실에 울린 발자국 소리에 피터가 놀라 도로 고개를 드는 것을 본 토니가 아까부터 피터의 눈가를 쳐다보던 두 눈으로 그와 시선을 정확히 맞췄다. 스스로도 느껴질 정도로 강렬한 시선에 피터의 눈가가 다시 굳어지며 2년의 공백 동안의 거리감을 나타내는 듯 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도 없었거니와, 지금 이 순간마저 그것까지 신경 쓰기에는 그는 2년동안 이미 충분히 벌을 받은 셈이었다. 토니가 아이를 안느라 들린 피터의 양쪽 팔의 윗쪽에 각각 손을 올렸다. 포옹까지는 가지 않으면서도 서로가 서로의 공간에 들어서는 묘한 자세였다.


  "돌아가자, kid."

  "네?"

  "뉴욕으로. 퀸즈든 타워든 상관 없어. 이제 돌아와야지, 너와 나의 집으로."


  만약 피터가 자신을 떠난 게 아이 때문이라면 더이상 거절할 이유가 없다는 것 정도는 토니의 머리로는 쉽게 알아낼 수 있는 사실이었다. 토니에게 들킬까봐 숨어살았던 거라면 어차피 들킨 와중에 더이상 이곳에 있는 건 무의미하다는 건, 제 똑똑하기까지 한 애인이 모를 일도 아니었다. 대체 왜 들키는 걸 그다지도 무서워해서 숨어있었냐는 건 아직 토니가 모르는 부분이지만 차차 알아가면 될 것이고. 토니의 머릿속에는 너무도 논리적이고 옳은 일이었다.

  그래서 그 말을 들은 피터가 단번에 긍정의 답을 하지 않고 제 턱을 당기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시선을 피하는 행동으로 어물쩡 대답을 보류하는 건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뉴욕엔... 못 가요."


  토니는 제 눈을 피하는 피터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속으로만 침착하게 생각했다. 그래... 아이 때문만은 아니군. 머릿속에서 뭔가가 깨지는 소리가 환청처럼 울렸다. 일주일 전 제가 피터의 영상을 보고 데스크 위의 병을 모조리 깨버린 그때 났던 파열음과도 같은 소리를 토니는 무시했다.


  "왜, 이번에도 숙제해야 돼?"


  애써 장난끼 있게 물어보자 피터는 토니가 말하는 그때를 회상하는지 옅게 미소를 머금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그럼 뭔데. 거기까지 가는 게 귀찮고 불편해? 그런 문제라면 전용기 태워줄 수 있는데, 너 전용기 좋아하잖아, kid."

  "그런 것도... 아니고요. 그냥 단지, 음, 전 에드가 있고..."

  "에드? 아, 이 애? 그래, 애도 데려와야지, 물론."

  "그게 아니라, 뉴욕에 가서 에드를 키우면, 그, 토니랑 같이 키우게 된다면... 모르겠어요, 저는, 그, 토니한테 그런 짐 지워주기가 싫어요, 이미 충분히 지나친 책임을... 네. 저는, 네."


  피터 파커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은 더듬느라 드문드문 나오는 말을 듣게 된다면 반가울 것이라고 생각했지, 그 말이 내포하는 바에 분노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 했는데. 토니는 멍한 얼굴로 바싹 마른 입술을 축였다. 이성적으로는 침착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 저 멍청하리만치 친절한 이웃이 토니에게도 그 친 절을 베풀고 싶어서 저런 결정을 내리고 있다는 것 또한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역시 평소의 비꼬는 화법이 아닌 진중한 대답을 해줘야 할텐데.

  그런데, 이건 너무 화나고, 또... 억울했다. 그 오랜 세월동안 못 봐놓고 하는 말이 이렇다는 건. 피터 파커는 토니 스타크에게 이러면 안 되는 거니까.


  "너는 지금 그걸 말이라고—"

  "지금처럼 지내자는 말이 아니에요! 토니가 원하시는 만큼 연락할 거고, 토니가 걱정 안 하셔도 되게끔 잘 지낼게요, 저, 나름 직업도 있고, 정말 혼자 잘 키울 수—"

  "왜.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데? 네가 왜, 그리고 내가 왜? 지금 네가 어떤 섬에서, 어떤 집에서 살고 있는 지를 다 알고 있는 상태에서 널 여기에 버리고 가는 건 내게 짐이 아냐? 넌 지금 너와 내 사이가 자각이 되기는 해?

  "... 네, 알아요! 같은 아이의 아버지죠!"


  피터는 아주 잠깐동안 주저하는 듯도 했지만 이내 확신에 찬 답을 내놓았다. 토니가 바라던 답은 그게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 그렇다고 쳐! 넌 지금 내 애를 나더러 여기에다가 버리고 가라고?"

  "어차피 직접 키우시지는 못 할 거잖아요, 토니가 억지로 애를 키우면서 고통 받는 건 저도 보기 싫단 말이에요!"

  "누가 억지라고 그래, 네—"


  네 앤데. 그렇게 말하려던 토니는 제 말을 잘라먹고 입을 다물었다. 아이를 안고 있는 피터가 내짓고 있는 표정이 눈에 들어와서였다. 상기된 얼굴이면서도 고집스럽게 이를 악다문 피터는 올곧은 눈썹과 또렷한 눈매로 제 주장을 단단히 내세우고 있었다. 맥이 탁 풀리는 광경이었다. 그래... 애인이라는 답조차 내놓지 않는 저 쪽에게, 혼자 키우겠다는 다짐을 굳힌 저 쪽에게 토니가 굳이 그렇게까지 말하는 건, 나타샤 말마따나 1초라도 자존심을 내려놓을 수 없는 스스로에게 못 할 짓이었다. 확실히 도망 간 게 아이 때문만은 아니군 그래. 짝사랑을 너무 오래 했다고 느낀 나머지 아주 완전히 질려버린 거지. 얼마나 꼴 보기 싫으면 같이 키우기도 싫다고 하겠어.

  하지만 어쩌겠어. 토니는 피터의 팔을 잡고 있는 손을 놓지 않은 채로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섰다. 다시금 더이상 가까워질 수도 없을 만큼 거리가 좁혀진 둘에 피터가 토니를 올려다보기 위해서 눈을 더 크게 뜨며 고개를 젖혔다. 그 뒷목을 손으로 받혀줄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이 멀어졌다고 해도 토니는 아니었다. 토니는 피터와 헤어진 적이 없었다.

 '차라리 나를 피해, 피터. 나를 피하려고 발버둥치고 도망을 쳐. 물론 놔줄 수는 없어. 그래도 차라리 그렇다면 언젠가는 다시 만나서 왜 피했는지 이야기를 할 수도, 아주 잘 하면 납득마저 할 수는 있겠지.'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왜 피했는지 이야기를 하고, 아주 잘 해서 납득까지 하기 전까지는 토니는 피터를 놔줄 수가 없었다는 소리였다. 토니에게서 최대한 멀어지려 하는 것 같은 피터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외딴 섬에 쳐박혀서 사느라 잠깐 잊고 살았던 모양인데, kid, 나는 남들이 히어로라고 일컫는 아이언맨이야. 인권의 수호자까지는 될 수 없지만 그래도 대놓고 무시할 수는 없다는 소리지. 그런 나더러 어린 애한테 훨씬 더 어린 애를 내버려두고 가라는 건 내게 직무유기를 권장하는 거고, 거의 내 히어로 자격을 박탈하려는 노력 수준이지. 그러니까 따라와."


  헛소리였다. 지금 그런 게 신경이 쓰일 리도 없었다. 그러나 이게 피터가 대항할 수 없는 유일하다시피 한 변명이라는 것을 토니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피터는 입술을 다시 한 번 꾹 말고 고개를 숙였다. 다시 고개를 들면 그가 어쩔 수 없는 표정으로 자신의 말을 인정하며 침울해하리라 예상한 토니는 고개를 휙 든 피터의 눈이 갑자기 생긴 날카로운 빛으로 부릅 떠져있는 것에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애 취급 하지 마세요."

  "...뭐?"


  와, 이건 정말.

  토니는 어이가 없다 못해 당황스러워져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냈다. 지금 나한테 뭐라고?


  "넌 지금 그게 중요해?"

  "항상 애 취급 하시니까요."    

  "항상? 항상이라기에는 2년 간의  공백동안 애 취급은 커녕 비싼 얼굴 볼 기회조차 주지 않으시지 않았나? 그리고 네가 지금 이 상황에서 그걸 들먹인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유치해보이는지 너는—"  

  "이것 봐요, 또 유치해보인다는 말  쓰시잖아요. 애초에 우리 사이 문제가 그거였다고요. 절 애인으로 안 보시고 애로 보시느라—"

  "너는 애랑 잠자리를 가져?"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너야말로 지금 그런 문제 이야기할 때가 아니잖아! 너 정말— 진심으로—"


  토니의 몸 속에서 뭔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아까부터 묻고 싶었지만 물을 수 없어 구석으로 밀어뒀던 말이 당장이라도 터져나오려 하고 있었다.


  "그런 것 때문에 나를, 내게서... 그런 것 때문에, 도망쳤다는 거야?"  


  그래, 바로 그거였다. 왜 도망친 거야? 왜 나를 피했어? 그에 대한 답이 만약 고작 '애 취급' 따위로, 토니의 입장에서는 단순한 일이었다면 정말 화를 참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2년만에 봐서는 당장 어제도 본 애인에게 불만을 제기하듯 편하게 저런 일로 싸움을 걸어오다니, 피터 파커, 정말—


  "...그런 것 때문만은 아니에요. 이유 중 하나기는 했지만... 아니에요. 토니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허. 피터가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토니는 본능처럼 한 손으로 다시 피터의 턱을 잡고 들었다.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 정말 마지막으로 남겨둔 인내심마저 사라져버릴 지도 몰랐다. 마주한 피터의 두 눈동자가 흐렸다.   


  "내게서 도망쳤는데 내 잘못이 아니야? 내 눈 똑바로 보고 대답해, 피터 파커, 왜 도망친 건지."

  "...토니 말이 맞아요. 제가 말없이 도망 친 건 제 잘못이었어요. 하지만..."

  "하지만."

  "후회... 되는 건 맞아요. 지난 2년이. 토니가 상처 입고 고통 받으실 줄 몰랐어요, 그래서 정말 후회 돼요. 그래도 선택 자체가... 제가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소리예요."


  토니는 피터를 잡고 있던 양쪽 손을 거뒀다. 그렇게 내버려 둬. 그 말에 수긍하고 넘어가. 하지만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토니는 그 말에 그대로 납득할 수가 없었다.


  "왜? 왜 나를 그렇게까지 피해야 했는데?"


  내가 바빠서?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 여겨져서?

  내가 너를 애 취급해서, 그게 네 말마따나 우리 관계의 문제라서?


  피터는 입을 꾹 다물고 고민하는 듯 말이 없었다. 아까부터 아이를 안고 있는 팔이 아플 만도 한데 메타휴먼이라 괜찮았던 건지, 거기에 신경 쓸 틈도 없었던 건지는 몰라도 피터는 여전히 아이를 단단히  안고 있었다. 품에 들린 아이는 아까 두 어른이 싸우는 건 신경도 안 쓰였는지 어느새 피터의 포근한 품에서 편안히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토니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종이 잡히지도 않고 피터의 말을 기다려줄 정도로 마음이 평화롭지도 않아 애타는 발걸음으로 땅을 탁탁 두드렸다. 피터의 눈이 토니의 발 쪽으로 아주 잠깐, 향했다가 다시 토니의 얼굴로 올라왔다.


  "말해봐, ki— 피터."


  토니가 말을 하다 말고 정정해 제 이름을 부르자 피터가 눈을 두어번 깜빡이며 저도 모르는 듯 살짝 입을 벌렸다.


  "뭐든 간에 내 머릿속에 있는 수많은 가설들보다는 나을 것 같으니까, 차라리 말해봐."

  "......"

  "내가 그걸 듣고 죄책감 느낄까봐 걱정된다고 해도 일단은 말하는 게 나을 거야."


  그 말을 잠자코 들고 있던 피터는 토니의 시선을 거두지 않는 채로 두 손으로 들고 있던 아이를 한 손으로 고쳐 들었다. 시야 한 쪽 구석에서 토니는 피터가 입고 있는 후드의 주머니 속으로 한쪽 손을 넣는 것을 목격했다. 그러나 주머니 속에서 뭔가를 꺼내려는 듯 그러쥐던 손의 실루엣은 이내 풀리고, 피터가 다시 주머니에서 손을 빼냈을 때 그의 손은 비어 있었다.


  "...나중에, 말씀 드릴게요."


  그의 텅텅 빈 말처럼.

  토니는 그 날 피터에게서 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결국 그들에게 평화로운 재결합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헬리콥터에 기대어 선 토니는 피터와 에드를 기다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도심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 수록 하늘은 그림과도 같이 예뻐진다던데, 태어날 때부터 도심에서 자라고 항상 바쁜 나머지 이런 시골까지는 많이 와보지도 못 한 토니의 눈에는 별다른 게 없어보였다. 결국 다 감상적인 헛소리였다는 거지. 씁쓸하고 떨떠름하게 판정을 내린 머릿속은 안 그래도 심란한 토니를 잔뜩 괴롭혀댔다.

  결국 피터를 뉴욕으로 돌아오게끔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건강 보험이나 시민권 같은 당연한 수순들이었다. 피터의 말이 제 몸의 영혼을 뿌리째 뽑아간 듯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던 토니가 간신히 내뱉었던 말이었다. 지금까지는 네 유전자가 강력하고, 주위에 사람도 없어서 병 없이 클 수 있었다지만 에드가 백신을 맞지 않고도 미래에도 건강하게 클 수 있을 것 같냐고, 시민권도 없는데 미래에 직업은 어떻게 구할 거냐고, 네가 평생 에드의 옆에 있어줄 것도 아니지 않냐고. 그런 논리적인 말들이 토니의 감상적인 부탁보다도 피터에게는 훨씬 잘 먹혔다는 점에서 토니는 다시 확신했다. 피터 파커는 저를 더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꽤나 당황스러운 생각이었지만 동시에 2년동안 피터에 관련해 한 생각 중에 가장 절망적인 축에 들지도 않았다. 그래서 토니는 에디와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겠다고 하는 피터를 뒤로 하고 다리를 멀쩡하게 움직여서 다시 제 차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정상적인 발걸음으로. 충분히 정상적으로.

  피터가 돌아와서, 둘이 함께 헬리콥터를 타고 날아 타워에 도착하면 우선 직접 퀸즈에 데려다 줄 생각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타워 안에 잡아두고 싶었지만 저만큼이나 피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그 애의 숙모가 기억이 났기 때문에. 누가 보면 그런 배려심까지 있었냐고 놀랄 지도 모르겠지만, 그 누가 뭐래도 토니 스타크는 심장이 있는 남자였기 때문에... 아, 그만. 다시 피터의 <피터 파커 금주 프로토콜>이었나 뭔가 하는 영상이 생각이 나 토니가 인상을 찌푸리고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어쨌든 이제는 피터 파커가 토니 스타크의 곁에 있게 된 거고, 다시 도망 갈 일은 없다... 라고 확신을 해야 하는데. 눈을 감고 오른손으로 오른쪽 얼굴을 문지르던 토니가 눈을 번쩍 떴다. 그러고 보니 아직 프라이데이에게서 브리핑 받을 때 쓰던 이어피스가 주머니에 남아있음을 상기한 토니는 그것을 귀에 끼는 동시에 고개를 돌려 헬기의 기종과 등록 번호를 확인했다.


  "프라이데이."

  [Yes, boss?]

  "이 헬기 저번에 미네소타 갔을 때 썼던 거 맞지?"

  [맞아요, boss. Sikorsky S-76C 기종, 등록 번호는 N475AZ—]

  "그래, 알았어. 그럼 추적 기기도 남아있다는 거고."

  [네. 조종석 옆 캐비넷에 부착형 위치추적기, 초소형 카메라, 초소형 녹음기 등이 남아있습니다.]

  "위치추적기면 됐어."


  토니가 다시 상체를 느슨하게 헬리콥터에 기대었다. 아파트의 현관에서는 피터가 한 손으로는 에드를, 한 손으로는 짐을 들고 에디와 뭐라뭐라 대화하며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에드가 울먹이며 에디의 티셔츠를 꼭 쥐는 광경까지 목격한 뒤에 토니는, 에드가 저를 닮아 머리가 좋아 벌써부터 이별을 감지한다는 사실을 대단해해야 할지, 아버지를 눈 앞에 두고 다른 남자랑 떨어지기 싫다며 울려 드는 현실에 맥이 빠져야 할지를 알 수가 없었다. 어차피 어느 쪽이든 딱히 신경 쓰지 않을 자신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어피스에서는 프라이데이가 어느 때보다도 곧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 왔다.


  [뭐가 됐다는 말씀이세요, boss?]

  "...임시 방편?"


  일종의 임시 방편인 셈이지. 토니가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못내 불안한 마음이 벌써부터 피터의 위치를 확보하려 애를 쓰고 있었다. 다시 도망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글쎄, 애초에 처음부터 도망치리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 했으니까. 이제 도망친다는 가능성만 생각해도 노이로제가 걸릴 판국이어서 일말의 가능성도 남겨두고 싶지 않았던 것일 지도 몰랐다.


  "토니?"


  멀리서 걸어오는 피터의 손에는 에디의 전화번호라도 쓰여있는지 검은 글씨가 끄적여져 있는 종이가 들려있었다. 토니가 헬리콥터의 문을 열어주며 타라고 제스쳐를 취하자 피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제가 먼저 타는 대신 에드를 헬리콥터의 안에다 올려다 놓고 뭐라뭐라 작게 말하기 시작했다. 뭘 말하는 지는 몰라도 작게 미소를 머금고 피터가 말하자 에드가 웃음을 터뜨리고, 그제서야 피터가 헬리콥터에 올라섰다. 그의 뒤를 따라서 헬리콥터에 타던 토니는 저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에드를 눈치 채고 피터에게 물었다.


  "뭐라고 했길래 애가 그렇게 웃어?"

  "아... 헬리콥터를 모를 것 같아서, 고래 뱃속을 타고 가는 거라고 했어요. 고래 좋아하거든요."

  "원래 두 살짜리가 고래를 이해하나?"

  "에디가 찾아봤는데, 원래 이 시기 애들은 웬만한 말은 다 이해한대요. 그런데 에드는 좀 웬만한 말 수준이 아니라 전문 용어도 되게 많이 이해해서... 그, 음, 토니 아들이잖아요. 똑똑한 게 당연하죠."


  그렇게 말한 피터는 토니를 전혀 쳐다보지 않고 안전 벨트를 매는 데에 주력하고 있었다. 그 행위 자체가 많은 집중력을 요한다기보다는, 마치 의식적으로 토니를 외면하려는 것처럼. 하지만 붉어진 귀끝으로 미루어보아 그 외면하는 모습은 토니를 보고 싶지 않아서라기보다는 제가 한 말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토니는 그 모습에 웃음 짓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아직 심신이 모두 너무 지쳐있던 터라 대신 프라이데이의 센서가 달려있는 헬리콥터에 한 번 손짓하며 출발을 명령했다.


  "그런데 날 쳐다보던데."


  안정적으로 헬리콥터가 비행 궤도에 다다르자 토니가 다시 목소리를 냈다. 용케도 크게 소란을 피우지 않는 에드를 무릎에 앉혀서 안고 있던 채로 창 밖을 관전하던 피터가 갑자기 나온 토니의 말에 그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무슨 뜻인지를 알아챈 다음엔 토니를 쳐다보는 대신 정면을 보면서 고개를 조금 숙이고 대답했다. 토니는 그런 피터의 모든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마... 처음 봐서 낯설어서, 아닐까요?"

  "그렇지, 낯설었겠지. 한 번도 못 봤으니까. 에디였나 하는 그 남자가 제 아버지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고."

  "...그렇지는... 않지, 않았을까요? 아직 그런 개념이 잘... 없는..."


  피터가 제 눈치를 보는 게 느껴져 토니가 한숨을 쉬려던 것을 참았다. 애인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것 같던데 눈치를 보기는 왜 봐. 동시에 사실 아까부터, 에드라는 이름을 들을 때부터 묻고 싶었던 한 가지 질문이 떠오르기도 했다.


  "애 이름이 에드던데."

  "...네."

  "남자친구 따라서 지은 거야?"

  "네?"

  "남자친구 이름이 에디잖아?"


  정말 남자친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혹시 모르는 마음에 조금 대놓고 떠보는 심정으로 묻자 피터는 토니의 눈치를 보며 시선을 피하던 자신의 지난 행동도 다 잊었는지 토니를 보며 입을 떡 벌렸다. 너무 놀라 손에 힘을 주는 것도 다 잊어버렸는지 무릎 위에서 에드가 조금 흔들리는 것을 토니가 손을 뻗어 막아주기까지 했다. 이내 정신을 차리려는 듯 고개를 두어번 흔들던 피터는 대신 귀끝까지 붉어진 얼굴로 소리 쳤다.


  "아니에요!"

  "...아니면 아닌 거지, 뭘 그렇게 열심히 부정해? 진짜 남자친구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어."

  "아니, 그것도 그렇지만, 그 이름은— 아니, 됐어요. 네. 어쨌든 아니에요."


  그리고 다시 창 밖으로 휙 돌아가는 시선. 조금 벙쪄서 그 일련의 행동을 지켜보던 토니는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조종석 옆 캐비넷으로 손을 뻗었다.















  피터는 안전 벨트를 풀고 있었다. 토니의 미친 듯이 비싼 무인 조종 헬리콥터에서 내려—애초에 그 헬리콥터는 착륙장도 없는 페독스 섬에 어떻게 착륙한 걸까—토니의 미친 듯이 비싼 무인 조종 자가용을 타고 퀸즈까지 가는 과정은, 글쎄. 지난 2년과 극단적일 정도로 달랐다. 그것은 비단 지난 2년이 에디의 집에 감금되다시피 쳐박혀 있기만 한 걸로 보내기만 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도착했어, kid."


  다시 저 호칭이 돌아왔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피터는 아까 토니가 그 호칭을 스스로 정정하면서 간절히 부탁하던 사항을 떠올렸다. 결국 무능력한 피터 파커는 들어주지 못 했던 부탁이었다. 말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토니가 2년 전에 했던 말을 꺼내야 할 것이었으니, 그렇게 괴로워했다는 토니에게 또 하나의 죄책감을 더해주고 싶지 않아서 피한 것도 있지만... 그보다 더 비겁하게도, 겁이 많은 피터 파커가 아직 토니에게 자신의 모든 속내를 드러내기를 주저하느라 그런 것도 컸다. 결국 그래서 나중의 일로 미뤄뒀어야 했지만 어쨌건 뭐든 그때 말하는 것보다는 나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걸 말했다면 안 그래도 텐션이 가득했던 헬리콥터 안은 더한 텐션으로 가득찼을 지도 몰랐다. 어차피 토니의 그 어이 없는 발언 때문에 어느 정도 풀렸을 지도 몰랐겠지만.

  고개를 돌려 토니를 보니 그는 피터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전히 숨이 막힐 정도로 근사한 눈빛은 그가 피터에게 화를 내고 있어도, 피터를 다독이고 있어도, 그 무엇을 하고 있어도 한 번도 매력적이지 않은 적이 없었다. 토니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그 말도 안 되게 잘생긴 눈빛이라고 장난을 건 적이 있었는데, 그 생각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도 피터는 그 눈빛에 숨이 막혔으니까.


  "2차전하러 돌아와야 한다는 거 알고 있지? 우리 할 얘기가 많잖아."


  피터의 옷을 정리하려는 듯 티셔츠를 소매를 두드리며 조금은 장난스럽게 내뱉어진 그 말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포되어 있는 토니의 초조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더는 도망칠 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걸 걱정하고 있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너무 초조한 나머지 티가 나버리는 토니답지 않은 토니의 모습에 피터는 다시 죄책감이 심장을 찌르는 것을 느꼈지만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드러운 자가용의 주행에 곯아떨어진 에드를 피터가 조심스럽게 차의 조종석 옆 시트에 뉘이고 다시 제 자리에 앉았다. 메이가 보면 놀랄 게 틀림 없으니 우선 피터가 메이의 집에서 지낼 오늘 밤동안만은 토니에게 맡겨놓기로 했었다. 하룻동안도 토니에게 지워주고 싶지 않은 짐이라 잠깐 망설였지만 토니는 어차피 AI나 해피가 돌봐줄 것이며, 메이는 아직 토니와 피터가 연애를 했었다는 점조차 모른다는 사실을 들며 피터에게 맡기고 가라고 종용했었다. 하룻밤이니까. 피터는 그 전제 하에만 토니의 말에 동의했다.


  "그럼... 내일 봬요."

  "그래. 차 보낼게."


  그 다음에 일어난 일련의 일은 순전히 토니의 눈빛 때문이었다.

  토니의 눈빛이 오늘 일어난 사건들 때문에 지쳐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피터가 유발한 마음고생 때문에 온갖 상처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안심이 된 건지 뭔지는 몰라도 5년 전 피터의 15살 시절과 비슷하게 느껴질 정도로, 다정하지는 않아도 따뜻한 눈빛을 하고 있어서.

  피터는 오늘 토니를 처음 봤을 때부터 그의 품에 안기고 싶었어서.

  피터는 저도 모르게, 아주 자연스러운 본능이자 수순처럼 손을 뻗어 토니의 품에 안기듯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거의 안기는 자세가 되어서야, 토니조차도 거의 본능적으로 상대방의 행동에 대응하는 자연스러운 자세로 손을 뻗었을 때에서야 피터는 그들의 관계를 상기하고 감전된 듯이 손을 다시 거뒀다. 토니도 그때에서야 그들의 움직임이 얼마나 현재 그들의 처지에 적합하지 않았는지를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떴다. 똑같이 커진 동공이 서로와 마주쳤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피터는 토니의 품에 안겨 있었다. 토니가 눈이 마주친 상태에서 점점 눈빛을 바꾸더니 원래 하려던 대로 피터의 상체에 팔을 두르고 그를 잡아당긴 것이었다. 토니도 저처럼 똑같이 팔을 거두리라고 여겼던 피터는 예상치 못 한 행동에 더이상 커질 데도 없는 눈을 크게 떴다. 무슨 뜻이지, 더이상 애인도 아닐 텐데, 애인 아닌 거 맞지? 2년동안 못 봤으니까 애인 아닌 게 맞지, 아까부터 그렇게 생각했으면서 왜 갑자기 딴 생각이야? 애인 아닌 거 맞을 텐데. 아니, 애인 아니어도, 지금 그들의 관계는 원점도 아닌, 원점보다 못한 지점으로 돌아온 셈이나 마찬가지니 이렇게 포옹을 하고 말고 할 사이가 아닌... 짧은 시간동안 머리를 재빠르게 굴리던 피터는 말라버린 입을 축이고 유일하게 말이 되는 가설을 냈다. 여전히 토니의 품에 안긴 채였다.


  "...이거 허그 아니죠? 문 열어주시는 거죠?"


  어깨에 닿은 토니의 목에서는, 목젖이 일렁이는 움직임이.


  "아니, 허그 맞아. ...그러니까 가만히 있어봐."


  첫번째 문장에 놀라 상체를 조금 들썩이던 피터는 토니의 두번째 문장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얌전히 상체에 힘을 풀었다. 퀸즈의 가로등이 여명처럼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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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속 피터의 이미지는 ACE Comic Con 때의 톰 홀랜드를 생각하고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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