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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피터] 하이브리드 강아지 키우기 15

Raising Hybrid Puppies 번역본

토니는 자신의 침실을 고치처럼 여길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침실이 고치처럼 아늑하고 안전하게 느껴지는 것은 맞지만, 그 단어에 비유한다는 것은 그가 당장이라도 아름다운 나비로 변신할 수 있는 한 마리의 애벌레와도 같다고 암시하고 있어서 문제였다.


그는 나비같은 게 아니었다. 그런 것은 포기한 지 오래였다.


그러니 그의 침실은 고치같은 공간보다는 비눗방울에 더 가까웠다. 비록 아주 잠깐동안만 존재하는 것이라 해도, 그동안 세계에서 멀찍이 떨어져서 피터가 머리칼을 넘겨주고 가슴팍을 쓰다듬어주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는 공간.


물론 오랫동안 지속될 수는 없는 공간이기도 하다. 아무리 아프가니스탄의 악몽을 다시 되살리고 난 뒤라고 해도 토니의 뇌는 잠시라도 잠잠해질 수가 없는 데다가, 설령 잠잠하다고 해도 열심히 돌아가고 있지 않을 리가 없으니까. 언젠가는 머리를 배회하는 수많은 이론, 도식, 계산, 그리고 걱정까지, 그 모든 것이 싹 다 멈출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48년동안 기다려본 결과, 그 예상은 헛된 희망에 불과했다.


지금도 예외는 아니어서, 토니는 제 두뇌가 평소처럼 최대 한계로 돌아가기 위해 준비하는 걸 느끼지만, 피터의 배에서 소리가 나는 게 먼저였다. 토니는 크게 웃으며 피터의 무릎에서 머리를 떼고, 앉기 위해 상체를 들어올렸다.


"그래, kid, 밥 먹을 때가 됐긴 됐지. 아주 좋은 생각이야."


토니가 낮게 웃으며 한 말에 피터가 씨익 웃어보였다.


"전 항상 좋은 생각 뿐이니까요."

"아, 그래? 웹 용액을 일반인들에게도 팔자는 것도 그 '좋은 생각'에 포함되나?"


토니가 예상했듯 피터는 그 말에 당황하며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하고, 토니가 옷장에서 청바지 한 벌을 끄집어내서 그 쪽으로 던질 때에서야 말을 멈췄다. 피터가 그것을 받아들고 티셔츠까지 챙겨입을 동안 토니는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섰다.

공황 상태 이후에 혼자 있지 않는 건 이상한 기분이다. 묘하게 서로에게 밀접해지는 것 같은 동시에, 지금껏 그들이 작업실이나 침대에서 서로 블로우잡을 주고 받았던 때와는 다른 느낌으로 은밀한 기분.


익숙치 않다. 균형을 잃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싫었다.


토니는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정작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은 조금 잿빛인 듯 싶기는 하지만 멀쩡했다. 그럼 왜 이렇게 뭔가 많이 허전해진 기분이지? 심지어 새 옷을 입는 것조차 힘들 정도였다. 따지고 보면 손이 떨리고 있지도 않은데, 마치 그런 것만 같았다. 게다가 더이상 생각했다가는 오늘, 이 모든 일을 후회하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토니는 급히 도망치기로 했다.


"식사는 뭘로 할래?"


토니가 화장실에서 피터가 있을 만한 곳으로 소리쳤다. 이 상황이 어색해지는 걸 막을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하고 싶은 마음에.


"브루스마저도 기꺼이 하차하여 주시는 인도 레스토랑 있는데—거기서 주문할래?"


피터가 화장실 문 사이로 고개를 빼꼼 들이밀었다. 당연하게도 활짝 웃고 있는 채로.


"좋아요! 우리 그 찍어먹는 빵같은 것도 주문하면 안 돼요? 저 인도 음식은 한 번도 안 먹어봤지만 보통 시키면 에피타이저로 그거 주는 거 맞죠?"

"한 번도 안...? 너 퀸즈에 살잖아, 퀸즈에 살면서 어떻게 16년동안 인도 음식을 한 번도 안 먹어볼 수 있지?"


피터는 볼을 붉게 물들이면서도 토니의 눈을 피했다.


"음, 외식하는 건 특별할 때 한정이고, 어, 메이는 태국 음식을 더 좋아하셔서...?"

"세상에, 방금 그거 들었어, 친구?"


토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묻자 천사같은 자비스는 지체 없이 대답한다.


[당장 저녁 식사를 주문하겠습니다, sir.]





*





"참고로 '파파덤'이라는 거야. 뭔지도 모르고 먹게 둘 수는 없지."


피터가 장엄하게 느껴질 정도로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항상 토니가 먹이는 건—물론 '먹인다'는 건 비유적인 표현이다, 토니의 페티시에도 선이 있기 마련이니까—사형수가 마지막 식사를 대하듯 소중히 대하는 그답게도. 토니는 그 태도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고작 망할 테이크아웃일 뿐인데.


"오늘도 일하러 가야 돼?"


토니는 피터의 스케줄을 이미 다 외운지 오래지만 피터가 그 사실까지 알 필요는 없으니까.


"어, 아뇨, 내일까지는 안 가도 되는데, 저, 음, 숙제가 조금? 정말 죄송해요, 더 있고 싶은데 스페인어 숙제라서—"

"이미 충분히 오래 있었어, 나 때문에 안 그래도 곤란한 학교에서 더 곤란해지면 안 되지. 그리고,"


피터가 반박할 수 있기도 전에 토니가 말을 이었다.


"그냥 내가 내일 네 카페 가서 귀찮게 굴면 되잖아. 새 블렌드 시음해본지도 한참은 된 것 같은데."

"네?"

"내가, 네 카페, 간다고. 옛날 옛적, 좋을 때처럼."

"그치만—제 말은, 좀 쉬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토니는 눈을 깜빡였다.


"방금, 그, 제 말은, 그런 공황 상태는 되게 무리가 가잖아요, 몸에 쉴 틈을 주실 필요가—몸 뿐만 아니라 정신도요, 그리고 밖에 나가셔서 그 많은 사람들 사이에 계시면... 제 말은, 어... 너무, 과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토니는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할지 감 잡을 수가 없다. 피터는 앞에 놓인 음식은 잊어버린 듯이 두서없는 말을 이어나갔다.


"게다가 사람들이 막 질문하면 어떡해요? 그런 걸 원하시는—아니, 물론 원하지 않으시겠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남들을 배려해주지 않고... 네?"

"사람들이 할 질문이라고는 내 슈트가 드라이 클리닝이 다 됐는지밖에 없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kid?"


피터가 고개를 한 쪽으로 기울였다.


"그, 어, 공황 상태 말하는 건데요?"


토니는 제 입술 끄트머리가 씰룩거리는 걸 느끼면서도 내버려두었다.


"무슨 공황 상태?"


피터가 이렇게까지 당황한 모습을 본 적은 없는데.


"방금 그—무슨 소리세요, 무슨 공황 상태냐니?"


토니는 어깨를 으쓱이며 파코라를 한 입 베어물었다.


"내 눈에 물이 들어갔던 거지, 아니면 내 정장에라거나. 난 넘어졌고. 우아하기로 따지면 언제나 사회에 귀감이 되는 나한테도 가끔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


피터 쪽으로 과장해서 미소 지어보인 토니가 말을 이었다.


"보안 요원들이 날 무대에서 데려가기로 했고—뭐, 어쨌든 그런 식으로 PR이 뭔가 이야기를 지어내면 자칭 '저널리스트'라는 그 피 빨아먹는 뱀파이어들에게는 충분할걸. 결국 나한테서는 관심 끄고, 나한테 빌어먹을 물풍선을 던지는 게 아주 자지러지게 웃길 거라고 생각한 그 개새끼한테 집중들 하시겠지."

"하지만 왜—왜 거짓말 하시려는 거예요?"


피터의 톤이 이상했다. 상처라도 받았다는 듯이. 대체 왜...?


"왜 안 하겠어?"

"왜냐하면..."


피터가 침을 꿀꺽 삼켰다. 아직 할 말을 정확히 찾지는 못 한 것 같은 저 얼굴은, 평소에 토니가 그토록이나 좋아하던 얼굴인데.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저 얼굴이 의미하는 바는 토니가 뭔가로 이 상황을 어떻게든 제대로 망쳐버렸다는 거고, 그건... 썩 좋은 일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실제로 있었던 일이니까요. 사람들이 봤잖아요. 그게 어떤 기분인지 아는 사람들이 봤잖아요. 그런데 그러시면...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토니는 그릇을 들고 조금 남아있는 음식을 스푼으로 쓸어담으며 피터에게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라는 식으로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피터가 인상을 더욱 찌푸렸다.


"하지만 토니는—하지만 그 사람들이 토니를 우러러 보잖아요. 만약 토니마저 사실대로 말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들은 어떻게 솔직히 자기 상태를 털어놓겠어요? 계속 이렇게, 이렇게... 침묵을 영속시키신다면, 사람들이 자신의 정신적 문제를 숨길 수밖에 없어서 결국 상처를 받게 될 때, 토니도 조금의 책임이 있으신 거라고 생각 안 하세요?"

"내 생각엔, 네가 MJ인가 뭔가 하는 애랑 너무 오래 붙어다닌 것 같은데."

"아니, MJ는—네, 솔직히 말하면 이 문제에 대해 몇 마디하기는 했는데, 보통 이것보다는 토니의, 음, 토니의..."

"내 뭐. 내 난잡한 20대? 난잡한 30대?"


토니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식사를 끝내놓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갑자기 배가 전혀 고프지 않았다. 그릇을 정리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피터가 바로 벌떡 일어나며 돕겠다고 나서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정신이 팔려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아뇨, 그보다는 토니의, 어, 예전의, 그, 약물 중독에 대해, 그리고 그, 알코올 중독에 대해... 그러니까, 토니가 그 사실을 그냥 과거의 일로 치부하고 무시하는 대신, 겪으셨던 문제들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야기하시면 다른 사람들한테, 그, 아시잖아요, 같은 문제를 겪는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잖아요, 그, 제 말은..."


피터의 얼굴은 온통 새빨갛다. 그 수많은 구속 영장들과 음주 운전 혐의로부터 뇌물을 써서 빠져나온 사람이 본인이라도 된 것처럼. 하지만 곧 토니의 얼굴을 다시 볼 용기가 조금이라도 났는지 그는 토니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제 생각에는, 그러니까, 그건 다 과거잖아요. 지금은 토니도..."

"나도, 뭐?"


토니가 식기세척기의 뚜껑을 딱, 하는 소리와 함께 닫으며 피터를 시험하듯 물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아주 정확히 예상이 가지만, 정말 그 말을 하고 싶은 거라면 피터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피터는 토니의 그 말에 숨을 깊게 들이쉬며 어깨에 힘을 주더니, 토니의 도전적인 시선을 정확히 마주했다. 피터가 토니를 대하는 태도는 지난 몇 달 간 눈에 띄게 바뀌기는 했지만, 그는 여전히, 고작 원칙 때문에 마약 중독자 홈리스가 예약해놓은 빵을 훨씬 더 많은 돈을 제시한 토니에게 팔지 않겠다고 선언한 바로 그 어린 바리스타였다. 


"토니도 그 일에 대해 이야기하실 수 있잖아요. 인정하실 수 있잖아요. 토니라면 최고의 롤 모델이 될 수 있어요. 토니가 인정하지 않으신다고 해도, PR쪽 사람들이 어떻게든 좋게 이야기를 풀어나가서 포커스 그룹한테 반응이 좋을 때까지 이야기를 바꾸거나 하실 수 있겠지만, 어쨌든 본인들도 고통 받고 있고 숨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 수많은 사람들이 토니의 기자회견을 보고 토니도 같은 일을 겪고 있다는 걸 알텐데, 그 다음에 토니가 숨고 있다는 걸 보면 자신들도 더 숨어야 한다고 생각할 테고..."


피터가 어딘지 젖은 숨을 들이켰다. 


"그런 식으로... 고통 받는 사람이 숨을 때 어떻게 되는지, 저는 직접 봐왔잖아요."


젠장. 그래, 당연하게도 피터는 이 모든 말을 메이를 염두에 두고 하는 거였다.

토니도 피터에 대한 연민으로 가슴이 아프지만, 그 이상의 감정이나 동기 따위를 끌어낼 수는 없었다.


"피터, 난 정신병 겪는 이들의 심벌같은 건 될 수 없어."

"왜요? 필요한 자원도 충분하시고, 사회적 위치도—"

"나는 한 나라한테, 아니, 이 망할 세계한테 캐런이 전구 하나만큼이나 안전하다는 걸 증명해내야 하고, 떨어질 수밖에 없는 주식을 지켜내야 하고, 미국 국방부랑 회의 몇 개 잡아서 내 AI랑 나한테서 꺼지라고도 해야 하고, 아크 리액터를 운전 가능한 차량에 안전하게 조립해넣어서 드디어 자동차 산업을 혁명화시키는 동시에 세상에 환경 친화적인 에너지를 배포해야 하고—왜냐하면 난 사업가니까, 피터, 롤 모델 따위가 아니라. 날 영웅 취급 하지 마."

"하지만 영웅이 되실 수 있어요, 아니, 이미 영웅이세요!"


토니는 그 말에 대놓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내가 누구한테? MIT에 있는, 내 전용기와 타워를 보고 '너드들의 반란'을 꿈 꿀 워너비 엔지니어 몇 명한테?"

"아뇨, 과학이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한테요!"


피터가 그렇게 소리 치는데, 세상에, 언제 이렇게까지 화가 난 건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토니는 사실, 자신이 이 상황에서의 문제를 드디어 간파했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렇다고 쳐... 하지만 그 숭고한 사람들조차 언젠가는 이 세상이 이상주의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하겠지."


피터가 입을 떡 벌렸다. 창문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한쪽 벽면을 등진 채여서 쏟아들어오는 햇살로 머리칼이 반짝이지만, 피터의 눈은 행복감으로 반짝이는 것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네?"

"이미 말했잖아, 피터— 난 가난한 동네에 아크 리액터를 설치한다거나, 브루스가 드디어 암 치료제를 개발해냈을 때 그걸 그냥 무료로 나눠준다거나, 그런 건 절대 안 할 거라고. 왜냐하면 네가 내게 그렇게도 많은 힘을 부여해준다고 생각하는 그 수많은 자원들, 놀랍게도 그 모든 건 내가 다 유지하지 않는 이상은 사라지거든. 그리고 너도 이제쯤 누군가에게 뭔가 공짜로 나눠주는 게 정말 도와주는 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을 거 아냐. 경제학의 기본 중 기본이지, 사실."

"하지만... 조금만, 아주 조금만이라도 도와주실 수 없으세요?"

"조금만 도와준다 치면, 어디서 선을 그어야 하는데? 이건 큰 그림에 대한 거야. 장기적으로 봐야지."


피터는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지만 진심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눈물이 나려는지 눈가가 반짝이는 건 토니도 정말 보고 싶지 않지만, 감언이설로 속여먹는 게 더 싫었다. 토니는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한 적이 없으니까. 타워에 열 여섯 살짜리를 들였다는 것 자체가 그 사실의 완벽한 증거일텐데.


"...그럼,"


피터의 목소리는 잔뜩 떨리고 있었다.


"혼자 상아탑*에 갇혀 안주하시도록, 저는 나가드려야겠네요. 메이가 괜찮으신지도 확인하고, 숙제도 하고... 그럼, 언젠가는 저라도 이 세상이 더 좋은 곳이 될 수 있도록 힘 쓸 수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눈 깜짝할 시간에 피터는 토니의 타워를 나가버린다. 토니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스스로의 몸에 팔을 둘렀다.


"1부터 10가지의 기준에서, 쟤 지금 얼마나 화가 난 거야?"

[양쪽 엔드포인트를 어떻게 정의하시는지에 대한 정보가 주어지기 전까지는 정확한 답변을 해드릴 수 없습니다, sir.]

"쟤가 10까지 화가 났을 때 나한테 방금 내린 커피를 던져버린다고 가정하지."

[그렇다면 9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토니가 한숨을 쉬듯 숨을 내몰아쉬며 한 손으로 제 머리칼을 헤집었다. 같이 샤워를 해서 젖은 머리카락이 다 말라 있었다. 샤워 섹스를 할 기회도 놓친 건데, 젠장, 이제는 내일 The Hybrid Puppy에 토니가 들어설 때 피터의 반응이 무엇일지를 걱정하느라 다른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일단 그 애가 진정하도록 하룻밤은 기다리는 게 낫겠지. 어차피 그 카페에 가는 게 괜찮은지를 PR과 확인해야 하기는 했다. 어쩌면 PR이 토니더러 타워에 갇혀 있으라고 할 지도 모르지만—상아탑에, 라고 피터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메아리 쳤다—지난 경험들로 미루어 보아 아마 그건 아닐 것 같았다. 토니가 밖에 나가서 당당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걸 원할 테니까. 문제 될 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주식이나 계속 사시고 샤워 걱정은 붙들어 매세요, 하는 그런 이미지.


"자비스, 레미한테 그거 컨펌 받아."

['그거'라는 단어가 시사하는 바가 The Hybrid Puppy로의 방문이라고 가정해도 되겠습니까, sir?]

"당연하지, 내가 방금까지 말한 게 그거잖아?"

[Sir, 2분동안 아무 말 없이 침묵하고 계셨습니다.]


토니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뭐?"

[보안 카메라 영상을 재생할까요?]

"아니, 그냥... 레미한테 물어보거나, 맥케나한테 물어봐. 난 괜찮으니까."


피터는 심지어 남은 음식을 챙겨가는 것도 잊고 그저 나가버렸다. 토니는 그 반쯤 먹은 마살라를 보며 그냥 쓰레기통에 버려버릴까 진지하게 고민하지만, 그래버리면 또 음식물 쓰레기에 대한, 무슨 끔찍한 통계를 곁들인 설교를 들어야 할 테고, 물론 SI의 구내 식당이 올해 1월부터 소비되지 않은 음식을 모두 버리는 건 그만 뒀다지만 그걸 피터한테 말하면 또 '영웅이 되실 수 있어요'류의 대화를 나눠야 할 테고 토니의 인생에서 그런 건 정말 필요 없는... 그래서 지금 뭐하고 있었더라?

맞다, 남은 음식을 냉장고에 넣기로 했었지. '이 집이 굶어죽을 일은 없어' 프로토콜 실시.

다음 순간, 자비스는 레미가 "네, 꼭 가주세요, 사진 최대한 많이 찍히시고요"라고 했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으니, 그래도 그건 어느 정도 해결된 셈이었다. 내일 가서 카페의 매출 좀 올려주고, 어쩌면 툼스가 만든 실험적인 페이스트리 몇 개 집어가고, 피터와 은근슬쩍 플러팅도 하면서 그 애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도 지켜보고.

문제는 자신과 피터의 관계에서 뭔가 바뀐 것 같다는 직감이다. 토니가 피터를 가까우면서도 너무 가깝지 않고, 멀다면 멀게 느껴지도록 거리감을 유지하려고 했던 그 무수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번 일로 관계의 핵심이 어떻게든 바뀐 느낌. 확실히 공황 상태의 누군가를 도와주는 건 좋은 의도만으로 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일이었던 모양이었다. 그 뒤로 무슨 일이 있었든지 간에.


[Sir, 포츠 씨와 배너 씨가 엘레베이터 안에 계십니다.]


토니가 몸을 급히 틀었다. 아니, 도시의 전경을 구경하러 창가로 다가선 게 고작 방금 전인데... 방금 맞나?


[20분 전에 창가로 접근하셨습니다, sir.]

"나 방금 그거 입 밖으로—"

[네.]

"굉장하군."


건조하게 말한 토니가 숨을 깊게 들이쉬고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다. 캐주얼한 정장 바지, 면이 얇은 티셔츠... 그래, 아무래도 한 겹을 더 입어야 할 것 같았다. 토니는 펜트하우스를 거쳐 침실로 들어갔다. 피터가 욕조에 들어올 때 벗었던 옷가지를 봤을 때는 그 위에 수건을 하나 덮어놓기도 했다. 다행히 관리과에서 보내는 하우스키핑 직원들은 저 옷들을 보고도 어디 떠벌릴 사람들이 아니지만, 그들이 청소하러 들어오려면 한참이 남았기도 하고...

페퍼와 브루스가 주방에 올 때쯤 토니는 이미 와이셔츠의 단추를 채우고 있었다. 토니가 보이지 않자 페퍼가 소리를 높여 그를 불렀다.


"토니?"

"침실!"

순간의 정적. 그리고...


"혼자서요?"


토니의 손이 미끄러지며 커프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무슨, 뭐?

다행히도 다시 주방이 있는 곳으로 나가기 전에 토니는 커프스를 줍고, 놀란 몸을 진정시켜야 한다는 걸 성공적으로 상기해냈다. 적당히 느린 발걸음으로 페퍼와 브루스 쪽으로 걸어간 그가 속 편한 듯 가벼운 손짓을 했다.


"당연히 혼자지, 펩. 자비스도 포함하면 아니지만, 2009년부터는 포함 안 하기로 했었잖아? 안녕, 브루스."


브루스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지만 토니의 미소에 화답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눈썹이 찌푸려져 있는데—젠장, 절대 좋은 신호가 아니었다.


"상태는 좀 어때?"


브루스의 목소리가 엄숙하게 느껴질 정도로 진지했다. 토니가 그 말에 대한 답을 쏘아붙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왜, 자비스가 사태 일어난 직후부터 내 상태 계속 전송해주고 있는 거 내가 모를 줄 알고? 난 괜찮아. 다 지나갔어."

"후유증이—"

"그것도 다 지나가고 있다니까, 의사 선생. 나 괜찮다고! 그걸 물어보려 온 거야? 정말이지, CEO에 의사라니, 누가 보면 내가 시한부인줄 알겠어."


드디어 커프스를 다 채운 토니가 커피 머신으로 도망치듯 건너갔다. 피터가 그와 커피를 함께 마실 때까지 남아있지 않았으니 커피는 아무도 손 대지 않은 채였다. 토니는 브루스와 페퍼에게 마실 거냐는 물음을 담아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고 커피 포트를 들어올려 보지만, 둘 다 아무 반응도 없었다.


"그럼 내가 더 마실 수 있겠네."


토니는 얄궂게 웃으며 커피를 따르기 시작하고—


"그 애는 언제 갔어요?"


—곧바로 포트의 절반 가량을 바닥에 쏟아버렸다.


"젠장, 페퍼, 화상 입을 뻔 했잖아! 내가 화상 입었으면 좋겠어?"

"기분은 좋겠죠."


페퍼가 허리에 양손을 짚으며 삐딱하게 말했다. 페퍼에게는 토니가 일을 정말, 정말 그르쳤을 때만 나오는 조금 난폭하기까지 한 구석이 있는데, 어쩐지 지금 그 구석이 나오려는 것만 같았다. 브루스의 얼굴이 딱히 뭔가를 알려주는 것도 아니어서 토니는 페퍼에게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펜트하우스의 로봇 청소기가 센서를 토니의 발치에 있는 커피 자국에 맞추고 달려오는 윙윙 소리가 들렸다. 페퍼가 숨을 거세게 들이마셨다.


"조금 전에 괜찮은지 확인하려고 왔는데,"


그 말 한 마디로 토니의 뱃속은 꽤나 두려운 직감으로 가득찬다. 이미 토니가 그 다음 말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페퍼는 말을 잇기 전에 조금의 정적이 흐르게끔 했다.


"봤어요. 둘 다요."


토니는 카운터에 등을 기대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이 뭐 같은 상황에서도 커피는 끝내줬다. 페퍼가 본인과 브루스 공동 감독의 '토니가 다 불게끔 압박해봅시다'라는 영화의 줄거리를 설명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토니에게 일종의 생명 유지 장치와도 같았다. 물론 그 영화의 줄거리가 어찌 됐건 이 주방에 서 있는 두 명의 비평가들은 곧 실망할 예정이시고.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떠났지만, 내려가다가 브루스를 마주쳤는데 어쩌다 그 이야기가 나와서—"

"그 말인즉슨, 할 일 없는 늙은이 둘처럼 내 뒤에서 뒷담화하고 계셨다?"

"이건 심각한 거예요, 토니! 작업실은—네, 작업실은 뭐 설명 가능하다고 쳐도, 펜트하우스요? 단 둘이? 그 애가 나가는 걸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요? 자비스가 전지전능하다고 믿는 모양인데, 인간의 욕심과 호기심은 자비스조차 감당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요!"

"그래, 그런 것 같네. 당신만 해도 지금 부리는 오지랖 수준이—"

"그 애한테서 손 뗀다면서요!"

"손 뗐어! 지금껏 쭉!"


그렇게 맹세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제 귀에도 정말 진심처럼 들려 토니는 이 와중에도 감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렇게 크게 제스쳐를 취하면서 커피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는 것에도. 페퍼와 브루스는 둘 다 그 말을 딱히 믿는 것 같지는 않지만, 토니에게 미간을 좁히며 묻는 것은 브루스다.


"그 애 생일까진 얼마나 남았어?"


토니는 입을 다물고 있을 것을 진지하게 고려하지만, 뭐... 그들이 그 날짜를 고대하고 있다는 건 숨겨봤자니까.


"19일."

"그리고 그 19일 이후엔 둘이 뭘 할 거라고 생각하시는데요, 아저씨?"

"굳이 보고 싶다면 그림을 그려줄 수는 있는데, 펩, 그 시간에 게이 야동 사이트를 순회하는 게 더 빠를걸."


그 말에 페퍼는 지친다는 듯이 눈을 감는데—그래, 좀 덜 까불 때가 된 것 같긴 하다, 페퍼는 지금 진심으로 화난 것 같으니까. 그래도 토니가 브루스에게 몰래 윙크를 하자 브루스의 입술은 좀 씰룩이긴 했다. 선방한 셈이었다.


"그 꼬맹이가 열 일곱이 된다고 해서 당신이 비난을 안 받을 것 같아요? 그 날짜 이전에 아무것도 안 했다는 증거라도 있어요? 둘의 관계가 알려지면 사람들이 제일 먼저 물어볼 게 그건데—그리고 네, 토니, 이런 건 무조건 알려지게 되어 있어요."

"뭐, 맹세라도 해야 돼? 페퍼, 내가 그런 걸 대체 어떻게 증명해야 되는데?"

"NDA (Non-Disclosure Agreement, 기밀 유지 합의서)에 서명은 시켰죠?"


토니는 갑자기 그의 커피잔의 내용물이 무척이나 궁금해져 시선을 오롯이 잔 속으로 집중시키기로 했다. 옆에서 브루스가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토니..."


페퍼의 목소리가 낮고 차가웠다. 망했군.


"지금, 한 소년을, 하루종일 카페에서 일만 하는 한 청소년을, 당신의 작업실의 1급 기밀 프로젝트들 가까이에 뒀는데, 회사 기밀 문건들이 있는 그 곳에 뒀는데, 작업실에 들어서기 전에 NDA에 서명도 안 시켰다고 하고 있는 건 아니죠?"

"걔가 무슨 산업 스파이라도 된 것처럼... 아무한테도 말 안 할 애야, 서명을 시킬 필요가 없었다고. 그리고 그 카페에 투자할 때 걔가 뭐 서명하지 않았나? 3번 변호사가 뭘 거론하긴 했던 것 같은데..."

"그 3번 변호사 이름은 래리(Larry)고, 법무팀 팀장이에요, 토니, 좀 기억해 주실래요? 그리고 피터 파커는 당신이 투자하기 몇 주 전부터 작업실에 들어왔었잖아요.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NDA도 안 받아냈어요?"

"알았어! 서명시킬게, 됐지? 당신이 원하는 게 그거야, 페퍼?"

"아뇨, 제가 원하는 건 당신이 그 애랑 그만 만나는 거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라는 걸 이제는 알 것 같아서요."


토니는 '그거 무슨 뜻이야?'라고 묻고 싶지만, 그 뒤에 따를 대화가 정말 달갑지 않을 것을 알기에 말을 삼키기로 했다. 브루스도 눈을 반짝이는 걸 보니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철두철미하게 작성된 NDA 하나로 만족할게요. 소급 적용되는 NDA 말이에요, 토니, 이해하겠어요? 카페에서 일해야 한다고 오스코프 인턴십을 거절한 적이 있지만, 다시 제안이 들어오면 그때도 거절할 거라는 보장은 없으니까요."


토니가 코웃음을 쳤다.


"하, 페퍼, 피터가 그런 크리피한 늙은이 밑에서 일하러 갈 리가 없잖아."

"크리피한 늙은이는 거기에만 있는 게 아닌 것 같은데요, 토니."


...뼈를 때리는군.

토니가 그렇게 생각할 동안 브루스가 페퍼의 팔에 손을 얹었다.


"이제 좀 쉬게 내버려둬야 할 것 같아요, 페퍼. 토니가 확실히 NDA는 받아낼 테니까, 그렇지?"


토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화 참 즐겁겠어.


"래리라면 내일 오후까지도 뭔가 작성해낼 수 있지 않을까요?"


언제나 성과 지향적인 브루스 같으니라고. 페퍼가 마지막으로 한숨을 내쉰 뒤 고개를 끄덕였다. 토니의 팔을 살짝 잡을 때 그녀의 손길은 마치 자신의 손으로 토니가 놀랄까봐 걱정 된다는 듯 부드러워서, 토니는 그녀가 왜 말을 할 때는 그만큼의 따뜻함을 보여주지 않는 걸까 궁금해지지만—페퍼 포츠의 속내를 알아내는 건 더이상 그의 임무는 아니어서. 그 깨달음은 묘한 데자뷰를 불러일으킨다. 2008년이라는 어두운 시절에 페퍼는 말은 끊임없이 하면서도 토니를 단 한 번도 만지지는 않았고, 토니는 그녀에게 말을 멈춰달라고 할 적당한 언어를 찾지 못 했었다.

브루스는 그저 미소를 짓는다. 뭔가 수상한 듯 아닌 듯 한 미소지만, 토니는 스스로에게 그 정도는, 적어도 지금은, 무시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작업실에서 제대로 연구할 시간을 가지고 싶은데 절대 집중이 될 리가 없고, 또 잠에 든 지도... 한참 됐고. 잘까? 하지만 그렇게 피곤하지도 않은데. 


토니는 바로 향해서, 다음날 머리가 깨질 것처럼 느끼지 않게 해줄 만한 정말 좋은 스카치를 꺼내들고, 무거운 한숨을 쉬며 소파에 앉았다. 소급 적용되는 NDA라. 멋지네. 그 전까지는 카페에 갈 수 있게 될 시간을 분명 기다리고 있었는데, NDA에 서명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웃으면서 해낼 수 있는 대화가 아닐 테니까, 특히나 둘이 막... 싸웠다고 해야 하나? 토니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싸운 건 아니지. 그저... 의견 불일치를 겪은 것이다.

뭐, 의견 불일치가 있었다고 해서 피터가 그들의 다음 만남에서 유별나게 다르게 행동할 것 같지는 않았다. 특히 카페라는 공공장소에서는. 토니는 피터를 직접 단 둘이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소원하지만, 대낮에 그러다간 들킬 가능성이... 너무, 지나치게 높았다. 


토니는 유리잔에 든 술을 모두 비워낸 뒤 곧바로 다음 잔을 채우기 위해 병을 집어들었다.


뭐 어쩌겠어. 일단 그냥 가보는 수밖에.







*상아탑 (Ivory Tower): 현실의 문제들과 동떨어져, (신경을 써야 함에도 불구하고) 신경을 쓰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의 인생을 수사학적으로 이르는 말. 





- 늦어서 죄송합니다! 

- 아무래도 현생+연재 때문에 번역 텀이 길어져도 너무 길어질 것 같아...ㅠㅠ 번역을 도와주실 분을 구했습니다! 다음 편부터 홀수 편은 제가, 짝수 편은 라레님 (트위터 @Rale_rncu, rale-rncu.postype.com)이 번역하게 됩니다 (모든 편은 여전히 이 포스타입에 올라옵니다)! 라레님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하고 번역 기대하고 있겠습니다ㅠㅅ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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