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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피터] 신분증을 제시해주세요 6

토니의 아이를 데리고 도망치는데 처음부터 들킬 위기에 처해지는 피터의 이야기

  - 그래서, 우리의 친절한 이웃은 잘 지내셔?


  평소보다 위험한 작업에 보안경을 끼고 슈트에 손을 대던 토니가 오른쪽에 위치한 화면에서 들려오는 물음에 고개를 들어 눈앞에 있는 또다른 화면을 확인했다. 그물 무늬가 쳐져있고 눈이 뾰족한 반원으로 이루어져 있는 동그란 얼굴 아이콘이 어디서 깜빡이고 있는지를 눈에 담고, 또 그 옆 화면의 영상을 훑은 그가 다시 시선을 슈트 쪽으로 원위치한 뒤에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가 음성 통화가 연결되어 있는 오른쪽 화면에 음파를 그려냈다. 


  "잘 지내시지. 아니, 적어도 나는 예전보다 잘 지내. 아직까지 집 밖으로 나가지를 않아주셨거든. 

  - 위치 추적기만 놓고 나간 건 아니고?

  "사실 방 안에 일종의 보안 카메라도— 잠깐. 당신이 위치 추적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아?


  토니는 피터의 이야기가 나온 이상 더이상 집중할 수도 없을 것 같은 슈트에서 아예 손을 떼며 인상을 찌푸렸다. 보안경을 벗으며 오른쪽의 화면을 보니, 어딘가 둔탁한 소리와 함께 한 남자의 비명같은 신음소리가 나는 동시에 순간적으로 음파가 높게 튀는 모습이 보였다. 곧 음성으로만 연결되어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도 않는 상대방이 따분할 정도로 태연한 눈을 하고 어깨를 으쓱이는 게 굳이 보지 않아도 눈에 선할 정도로 예사로운 목소리를 냈다.


  - 전직 스파이인 동시에 몇 년째 나름 동료인 사람을 너무 무시하네. 토니 스타크는 컨트롤을 할 권력과 자원이 넘쳐나는 컨트롤 프릭이고, 그 컨트롤 프릭의 컨트롤을 한 번이라도 벗어난 상대에게는 더한 컨트롤을 씌우는 게 당연한 사람인데다가, 위치 추적기 정도는 예전에도 했던 거라며? 그럼 너무 뻔하지. 

  "...내가 멍청한 질문을 했군."

  - 참고로 그게 괜찮다는 건 아냐. 게다가 뭐, 보안 카메라? 보안이 아니라 감시겠지. 사생활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고는 있는 거지?

  "21세기를 살아가는 이들이 당연한 권리랍시고 찾아대지만 사실상 모두가 헌납한 특권이지." 

  - 와우. 나 '1984'년에 태어났는데 어쩜, 딱 그 소설에나 나올 법한 마인드를 가졌네. 다음 단계는 독재 정권인가요, 빅 브라더?

  "토니 스타크 정도면 독재자여도 꽤 괜찮지 않나? 몸짱 이쁜이가 왕인 행성도 있는데."


  그렇게 시덥지 않은 장난이나 치는 것은 일종의 방어 수단이었다. 토니의 머릿속은 사실 그 순간 또 이 소리를 듣는군, 하는 뜨끔한 생각에 잠식 당했으니까. 토니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면서도 벽면 한 쪽 무의미한 곳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생각에 잠겼다. 2년 전에 워쳐 프로토콜을 처음 개시했을 때 페퍼도 그 소설을 언급하며 토니를 말리려고 들었었는데. 정말 어렸을 때부터 자라온 환경 때문에 사생활에 대한 극단적인 의견을 가지게 된 건지, 피터 파커에 있어서는 항상 디스토피아에서 튀어나온 남자라는 비난을 들을 정도로 극단적인 선택을 내리게 되는 건지. 토니는 크게 고뇌하지 않고도 둘 다 맞을 거라고 스스로에게 쉽게 인정하며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당신은 대체 뭐하다가 전화 걸었길래 주위가 그렇게 시끄러워? 더이상 쉴드 임무 하는 것도 아닐 텐데."

  - 이건 취미 활동.


  방금 어떤 남자의 대가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하지만 토니는 굳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현재 연결된 인물인 나타샤라면 그 어떤 취미 활동을 가지고 있어도 놀랍지 않고, 뭐든 간에 그녀가 하는 일이라면 이유가 있을 테니 관여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유일하게 그와 피터의 관계를 아는 나타샤에게 딱히 트집을 잡고 싶지 않은 게 컸다. 소코비아 협정 사태 이후로 나름의 화해를 하기까지도 그렇게나 오래 걸렸는데, 10대 남자애를 만난다는 사실에 적어도 지금까지 무력을 행사한 적도 없는 걸로도 이미 나타샤에게는 이 정도 일은 동료의 참작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


  - 어쨌든, 걔한테는 반갑다고 전해줘. 곧 얼굴 보러 가겠다고. 걔 얼굴만 보고 싶은 게 아니라, 죽상이 아닌 당신 얼굴이 기억도 안 날 수준이라 그것도 좀 보러 가고 싶기도 하고. 저번엔 당신 보안 팀장이 뜬금 없이 내게 전화를 걸더라니까? 보스가 곧 죽을 것 같대나, 뭐래나. 솔직히 좀 걱정했어.

  "...그거 고맙네. 하지만 내 얼굴 멀쩡한 걸 구경하고 싶다면 곧이 아니라 나중으로 계획을 미뤄야 할 걸."

  - 왜?


  토니가 무거운 한숨을 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손바닥과 손가락으로 느끼는 얼굴의 피부가 가시라도 돋은 듯 까칠했다.


  "아직도 말 안 해줬거든. 나를 버리고 갔던 이유."


  이제는 쓸모도 없는 워쳐 프로토콜이 D+859를 표시했다. 피터가 돌아온지 5일이 되는 날이었다. 
















  이건 또 뭐야. 피터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광택이 나는 포장지에 싸여있는 작은 용기 하나를 집어들고 눈을 가늘게 떴다. Gesundheit in einer Streichholzschachtel, 이라고 장대하게 쓰여있는 포장지는 로마자로 쓰여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영어도 스페인어도 아니었다. 어떻게 읽을지 감이 잡히지도 않았다. 그래도 첫 단어인 Gesundheit가 가끔 영어권 문화에서 재채기한 사람의 건강을 빌어줄 때 쓰이는 독일어라는 걸 캐치한 피터가 포장지로부터 눈을 떼지 않으며 천천히 방 안에 있던 랩탑으로 다가갔다. 구글 번역기를 켜서 독일어-영어 전환을 하고 스피커 버튼을 눌러 발음을 확인하려던 피터는 갑자기 머리 위에서 음성이 들려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흠칫 놀라며 뒤로 빙글 돌았다.


  [Gesundheit in einer Streichholzschachtel은 '성냥갑 속에 담긴 건강'이라는 뜻으로, 유아기 아이의 수제 간식을 제조하는 독일의 소규모 회사입니다. 성냥갑 크기의 작은 팩에 담겨있는 간식은 주로 한 팩에 380에서 400유로 정도로, 2014년에 영국 왕실이 대량 구매한 기록이 남아있기도 합니다.]


  갑자기 온 사방에서 울리는 것도 같고 머리 위에서 들리는 것도 같은 여성의 단조로운 목소리에 피터는 눈을 깜빡이다 결국 시선을 흰 벽의 조금 윗부분 허공에 뒀다. 저와 에드 말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방에서 들린 뜬금 없이 들린 목소리에 놀랐음에도 불구하고 얌전히 말을 끊지 않고 기다리던 그가 입을 천천히 열었다.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그런데 프라이데이, 그, 여기 계신 줄도 몰랐는데, 왜 갑자기..."

  [아까 '이건 또 뭐야'라고 하셨잖아요. 답변에 만족하시나요?]

  "...방 안에 카메라가 있나봐요?"

  [보안용 카메라예요. 영상은 제가 검토하고 아무에게도 송신되지 않은 상태로 삭제됩니다.]


  맞다, 여기서는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되지. 피터는 이번에는 속으로만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 새로 저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나왔지만 절망감 따위의 나락처럼 무거운 감정이 아닌, 그저 피로에 가까운 의사를 표현하는 소리였다. 어느 환경에나 적응은 힘든 법이니까. 비록 2년 전에는 일상처럼 몸을 담갔던 환경이라고 해도, 제 말을 들을 사람이라고는 영어를 이해하지도 못 하는 유아기 아이와 관심도 없는 에디 뿐이었던 페독스 아일랜드의 작은 아파트에서 갑자기 이 곳으로 다시 오게 된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도약이었다. 굳이 대화 뿐만이 아니었다. 항상 무슨 말을 하든 귀 기울여 듣고 있는 셈인 AI가 존재하는 이 곳은, 구식 랩탑이 최고의 기술이었던 그 곳과의 기술적 간극만큼이나 모든 것이 달랐다. 


  뉴욕으로 돌아온 지 5일째. 피터는 그 5일 중 단 1분도 편안하게 즐길 수가 없었다.

  당장 피터와 에드가 지금 있는 이 방만 해도 에디의 집의 거실보다도 컸다. 그나마도 에드가 계속 시야에 남아있어야 하니 작은 방을 부탁해서 받은 게 이 방이었다. 차라리 업스테이트 본부로 갔으면 조금 더 적응이 될 만한 방을 얻을 수도 있었을 텐데, 토니가 에드에게도 피터에게도 적응을 할 만한 시간이 주어지려면 많은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지 않은 게 좋겠다며 그가 본부 근처에 소유하고 있는 별장을 추천했기에 피터가 고를 수 있는 가장 작은 방조차도 토니의 이름에 걸맞는 큼지막한 공간이었다. 그마저도 토니는 피터의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지만. 아니, 그때 인상을 찌푸린 건 방의 선택 때문이 아닌가? 토니는 피터가 쉽사리 읽을 수 없는 표정을 하고는 말했었다.


  '재촉할 생각은 없지만, 솔직히 내 성격 상 대화하다 보면 재촉이 안 될 리가 없다는 건 너도 알고 나도 알잖아.'


  주어가 없는 말이었지만 토니도 피터도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말해줄 준비가 되면 불러. 언제든 여기 지하 랩에 있을 테니.'

  '곧 본부로 가셔야 하는 거 아니었어요?'

  '당분간 일정은 취소했어.'


  그 말을 끝으로 토니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입을 벌리고 선 피터를 두고 방을 나섰다. 일정을 취소했다고? 토니가 일정을 취소했다는 사실 자체가 생경해 잘못 들은 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토니에게 들어오는 일정이 모 회사의 사장과 골프 치기 따위의 사사로운 약속일 리도 없었는데, 하루만 취소해도 일의 양이 배로 불어나는 걸 피터가 모르지도 않았는데. 하지만 피터가 그렇게 되묻기도 전에 토니는 이미 랩으로 이동한지 오래였고, 피터는 토니, 자신, 그리고 에드만이 거주자의 전부인 별장에 놓여 있었다. 워낙 넓은 공간에 세 명만 있게 되어서, 하마터면 바로 그 다음날부터 토니가 랩에 있겠다고 해놓고 사실은 업스테이트 본부로 옮겨간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었겠지만... 토니는 피터가 그러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다음날 피터는 일어나자마자 방 한 켠을 가득 쌓아둔 각종 물품들과, 언제 일어났는지는 몰라도 신나게 그 중 하나를 잡아뜯고 있는 제 아들을 발견했다. 이게 다 뭐야, 원래 이 방 창고로 쓰시던 건가? 그래서 이 쪽으로 계속 배달 시키시나? 하는 생각에 반신반의하며 다가가 확인한 그 물품들은 각종 언어들로 되어 있어서 정확히 뭔지를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대부분의 포장지에는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아기의 사진이 프린팅되어 있었다. 그제서야 피터는, 거의 방 한 켠에 벽처럼 쌓여있는 이 각종 물품들이 모두 아이 간식이나 옷, 장난감 등을 비롯한, 한 마디로 에드의 의식주와 여가를 위한 것들임을 깨달았다. 토니 스타크는 자신의 특기인 물량 공세를 실천하고 있던 것이다. 대체 무슨 목적을 위한 행동인지는 피터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서 그날, 토니에게 돌아온 지는 둘째 날이 되는 그날, 그 모든 물품들을 대충 다 분류하고 그 중에서 로봇 장난감은 기가 막히게 찾아내서 구석으로 가지고 간 에드에게 밥을 먹이는 데에만 해도 한참 걸렸던 것 같은데. 저녁은 내려가서 주방에 설치된 스크린에 적힌 안내에 따라—지금 생각하니 아마 또한 프라이데이가 맡았을—그럭저럭 토니 없이 해결하고, 다시 제 방에 올라와서 랩탑으로 오랜만에 제한 없이 인터넷을 만끽하고, 에드와 놀아주는 등 시간을 보내다가 잠에 든 그 다음 날, 또다시 피터의 방 한 쪽에는 어제의 기억이 데자뷰라도 됐다는 듯 방 한 켠에 뭔가가 다시 무작정 쌓여 있었다. 한 가지만 다른 게 있었다면 이번에는 제 방에 그것들을 와르르 쏟아내고 있는 로봇과 마주쳐서 미약하게나마 손을 흔들어줄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다음 날, 반복. 그리고 오늘, 또 반복. 점점 아이 물품 뿐만이 아니라 피터더러 쓰라는 듯한 깔끔한 와이셔츠나 젤리 간식 등도 도착했다. 자고 일어나면 뭔가 계속 달라고 하지도 않은 물건이 추가되어 있는 모습은 마치 1년 365일이 내내 크리스마스로 지정되어 있는 세계에서 사는 듯한 기분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나쁜 아이는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받을 수 없는데. 

  피터에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도 당연했다. 작업실에 있는 토니는, 피터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까? 토니가 피터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유구하게 그랬듯이 몸을 짓눌러오는 죄책감과 몸을 일깨우는 전류를 동시에 느끼게 했다. 차라리 마냥 괴롭기만 했으면 더 나았을 텐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감정은 헷갈리고 어지럽기만 했다. 내년이면 맥주도 마실 수 있는 나인데 아직도 감정의 갈피를 잡을 줄도 모르다니. 피터는 그러한 제 모습에 탈력감을 느끼며 뒤에 뒀던 성냥갑만한 팩을 집어들었다. 


  "에드, 간식 먹자."


  그나저나 프라이데이가 자신이 하는 모든 말을 듣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 했던 지난 나흘은 확실히 안일했다. 솔직히 토니가 소유하는 곳이라면 모든 구석구석을 AI가 관활하고 있음을 깨달았어야 했는데, 그동안 말도 안 걸어왔던 데다가 워낙 AI 없는 삶에 익숙해져 있어서... 피터는 제 말에 눈을 반짝이며 다가오는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꿇으며 씨익 웃었다. 팩에 담긴 말랑말랑한 간식을 입에 넣어주던 피터는 AI의 존재를 똑똑히 머릿속에 새기며 눈 앞의 아이가 아닌 AI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프라이데이, 말씀 편하게 하세요. 예전에는 동생 대하듯이 말씀하셨는데 지금은 왠지 조금 격식을 차리시는 것 같고..."

  [아주 오랜 기간동안 한 상대를 만나지 못 했다면 다시 만났을 때 그에 따른 예의를 갖추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사회적 합의에 따르는 중이에요.]


  아주 오랜 기간. 피터는 그 말을 하는 AI의 목소리가 조금 싸늘하게 느껴져 에드에게 간식을 건네주다 말고 멈칫했다. 어쩐지 피터를 나무라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 목소리였다. 피터의 착각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저 목소리의 주인은, 비록 프로그램에 불과하다지만, 언제나 토니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둬야 하는 존재니까. 토니가 첫 날, 피터가 계속 자신을 생각했냐는 물음에 허탈하게 웃으며 긍정했던 기억이 났다. 대체 AI마저 피터를 탓할 정도면 얼마나 괴로워하셨던 건지를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더 두려웠다. 피터가 마른 입술을 축이며 다시 허공께를 쳐다보았다. 물어본다고 알려주지도 않겠지. 


  "피터!"

  "...응?"


  이거 좋아! 에드가 방긋 웃으며 팩을 꽉 쥐는 것에 피터가 눈을 깜빡였다. 다른 생각을 열심히 하던 중이라 반 박자 늦게 대답했음에도 불구하고 에드는 신경 쓰이지도 않는지 맛있다고 성화였다. 피터는 작게 웃으며 에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맛있어? 그럼 다음에는 내 돈으로 한 번 사줘야 하나. 한 팩에 400유로면.... 얼마지? 예전에 사회 시간에 배웠던 대략적인 환율을 머릿속으로 계산하느라 인상을 찌푸렸던 피터는 이내 당황스러워 저도 모르게 얼굴을 풀어버렸다. 잠깐만, 400유로라면 이거 잘은 몰라도 중고 아이패드 정도는 살 수 있는 가격인 거 같은데, 정말? 이 손바닥보다도 작은 걸 사는데 그 정도나 된다고? 그러고 보면 아까 영국 왕실이랬나? 도대체 얼마나 좋은 거야? 그 모든 질문들에 무슨 답을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피터가 그 쥐꼬리만큼 번 뒤에 에디와 또 나눠야 했던 나름의 월급으로는 턱도 없을 가격임이.

  토니 스타크의 곁에 있는 일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이렇게 또 주지하게 될 필요는 없었다. 피터는 에드에게 팩의 플라스틱을 모두 벗겨주며 맥없이 에드에게 제가 제일 처음으로 먹인 음식을 떠올렸다. 편의점에서 급하게 산 압타밀이었나? 그것도 편의점에서 급하게 끓인 물에 타준. 에디와 함께 살면서도 에드에게 그 이상으로 고급스러운 것을 먹인 적은 극히 드물었다. 가끔, 뭐... 보너스를 받으면 좀 더 비싼 걸 사주고는 했지만 400유로는 커녕 100달러도 넘지 못 했고. 에드가 이걸 먹고도 좋아서 방긋 웃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지도 몰랐다. 토니 스타크를 닮은 아이에게는 토니 스타크만큼의 대접이 돌아가야 하는 건데, 피터는 그럴 능력이 전혀 없었으니까. 

  애초에 토니와 함께 컸다면 에드는 훨씬... 건강하고, 아름답고, 뭐든 간에 훨씬 더 좋았겠지. 피터는 그런 스스로의 사고에 어이가 없어서 입술 안쪽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게 뭐야, 구질구질하잖아. 이미 자신의 행동이 틀리지 않았다고 해놓고 이러는 건 구차하잖아. 하지만 어쩔 수 없기도 했다. 에드 뿐만이 아니었다. 나흘 전에 피터의 얼굴을 본 메이의 얼굴이 새하얘졌다가 파래졌다가, 이내 그녀가 아이처럼 엉엉 오열하면서 잔뜩 붉어졌을 때도 피터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피터 파커는 구차하고, 구질구질하고, 평생 살면서 착한 일만 해온 숙모에게 저만큼의 아픔을 선사할 정도로 최악인 인간이라고. 메이를 안아주며 눈물을 최대한 꾹 참으면서 피터는 토니의 생각을 했다.

  그리고 지금도 피터는 토니의 생각을 한다.

  에드가 간식 팩을 들고 신나서는 침대 위로 폴짝 뛰어오르는 모습을 보며 피터는 천천히 일어섰다. 그러니까, 5일이나 되는 시간동안 토니에게 찾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던 이유도 그거다. 이렇게 자괴감에 빠져있는 상탠데 어떻게 토니한테 가서 난 당신 때문에 떠났다고 말을 하겠냐고. 자신의 그 선택은 어쨌거나 온전히 자신의 책임인데, 그 선택으로 인해 토니가 그렇게 고통 받고, 메이가 그렇게 절망하고, 에드가 그렇게 볼품없게 산 걸 모두 어떻게 다시 토니에게 돌려버리겠냐고. 결국에는 애초에 미뤘던 이유와 같았던 셈이었다. 피터가 눈을 질끈 감고 한숨을 쉬며 머리를 잔뜩 흐트러뜨렸다. 복잡한 심경을 어찌할 줄 모르고 몸을 데스크에 기대려던 그는 자신의 손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고 뒤로 뻗다가 손 끝에 책상의 딱딱하고 차가운 감촉이 아닌 부드럽게 나풀거리는 것이 닿아 몸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 하고 잠시 비틀거렸다.

뭐야? 고개를 휙 돌려보니, 자신이 손을 뻗은 곳은 데스크 쪽이 아닌 물건들이 잔뜩 쌓여있던 방향이었다. 그렇겠지, 하필 이 순간 토니 스타크의 부를 다시 한 번 체감해야 했겠지. 한숨을 푹 내쉬며 물건들 쪽으로 다가가던 피터는 자신이 손이 닿은 것에 시선이 닿자 멈칫했다. 반짝일 정도로 화려하게 포장된 물건들 사이에서 초라해보일 정도로 평범한 갈색 종이백 하나가 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광경에 의문을 품고 손을 뻗어 종이백을 가져와 뒤로 돌린 피터는 순간 얼어붙어버렸다.

  종이백에는 매직펜으로 쓴 것 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갈하게 쓰여있는 글씨가. 


  This will always belong to you. -TS


  피터는 뛰는 심장을 어찌할 생각도 못 하고 침을 꿀꺽 삼키며 멈춰 있다가, 이내 떨리는 손으로 종이백의 입구를 열었다. 딱 5년 전이다. 어벤져스에 들어오라는 토니의, 아니, 당시는 스타크 씨의 제안을 거절한 후에 침대 위에서 비슷한 문구의 똑같은 모양의 종이백을 발견했던 게. 이게 너의 것이라고 쓰여있는 글씨를 보자마자 무엇인지 직감하고 메이가 있나 확인했던 그때처럼 피터는 이 종이백 안에 든, '언제나 그의 것'일 거라는 그것이 무엇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2년동안 그리워하지 않은 날이 없지만 없이도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할 수밖에 없었던 그것. 


  종이백 안에서 꺼내든 슈트는 피터의 손에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이 슈트를 꺼내들 때마다 급하게 갈아입고 뛰쳐나갈 생각밖에 없었기 때문에 감촉에 신경을 쓸 겨를은 없었지만, 그래도 손끝에 남은 감각 그대로였다. 손목에 달려있는 검은색 웹슈터도 광택을 변치 않고 그때 그대로였다. 피터는 이 슈트가 시야에 들어옴과 함께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반사적인 본능으로 온몸에 아드레날린이 솟구치고 있음을 실감했다. 어떡하지, 어쩌면 좋지? 슈트를 보는 것만으로도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어서 꿈틀대는 손가락은 어떻게 해야 되고, 또 다리가 흥분에 못 이겨 달달 떠는 건 또 어떻게 해야 할까. 피터는 우선 문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2살짜리 애도 있는 데다가 아직 토니와 있던 일은 해결되지도 않았는데 스파이더맨으로서 나간다는 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를 아니까 우선은 충동을 눌러놓아야 했다. 그게 피터가 할 수 있는 최선이자 토니를 위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스무 살이니까. 다 컸으니까.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의 구분을 지을 줄도 알고, 항상 후자를 따르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사이의 적당한 타협점을 찾을 수는 있으니까. 

  피터는 결국 침대로 다가가 조용히 슈트를 내려놓았다. 몸을 일깨우던 감각은 미세하게나마 사그라들고 있었다. 몸에 오르던 열이 잦아들며 차가운 자각이 머릿속으로 조용히 스며들었다. 역시 이게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아이가 아닌 피터 파커는 이럴 필요가 있었다. 더이상 아이가 아닌, 뉴욕의 친절한 이웃인 스파이더맨은...


  아, 맞다. 뉴욕. 피터 파커가 2년동안 방치한 인물에는 메이 파커나 토니 스타크를 제외하고도 '뉴욕 시민들 전체'가 포함됐었지.


  피터는 냉철한 자각보다도 더 깊고 빠르게 침투해오는 생각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2년동안 그래도 잊지 않아주셨는데, 나는 오자마자 또 내 개인적인 일에 휩싸여서 아무것도 못 했잖아. 방금 전에 했던 생각과 아예 정반대의 감정에 갈등하던 피터는 몇 달 전에 봤던, 스파이더맨이 사라진 뒤 뉴욕의 사건사고가 더 증가했다는 의견과 상관 관계가 굳이 인과 관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의견이 맞서 싸우던 한 뉴욕 타임즈의 기사란을 떠올렸다. 스파이디도 쉬어야 할 필요가 있다며 그가 돌아올 것이라고 믿는다고 하는 한 회원의 댓글에는 너무 감동을 받아서 스크린 캡쳐까지 해두고 비밀 폴더에 넣어두기까지 했었다. 피터의 손은 이미 슈트를 집고 있었다. 이걸 지금 당장 입고 나간다는 의사가 있었는지는 불분명했지만, 이미 무의식적인 행동에 가깝게 슈트를 쥐던 피터는 저도 모르게 이미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어디 가려고?"


  —있었다.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 순간 바로 눈 앞에 나타난 토니 스타크만 아니었다면 그 문을 아예 나서버렸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토니는 팔짱을 낀 채 문가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있었다. 편한 티셔츠와 바지 차림인 그는 머리 스타일도 평소보다 훨씬 루즈해 보였지만,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힘이 없는 것과 거리가 멀었다. 피터는 동그랗게 떴던 눈을 오히려 더 크게 뜨며 대답도 하지 못 하고 눈을 깜빡거렸다. 발치에서는 에드가 토니를 발견하고 피터의 다리 뒤에 숨으려는지 종종거리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바짝 말라가던 피터의 입에서 엉뚱한 소리가 튀어나갔다.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슈트에 위치 추적기 내장되어 있잖아."

  "거의 움직이지도 않았잖아요."

  "열 감지 센서도 있어."


  그 말을 하며 토니는 자세를 조금 바꾸며 제 발치를 내려다봤다. 피터는 그 움직임이 어쩐지 조금 수상해 눈썹을 찌푸렸지만 토니가 더 빨랐다. 언제 시선을 돌렸다는 듯 다시 피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큰 눈동자에 피터는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인상을 풀었다.


  "패트롤 돌려고 했던 건 아니지?"

  "네?"


  솔직히 말하자면 피터도 제가 뭘 하려고 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다. 본능적으로 나가려고 했던 것도 맞지만, 딱히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입술을 말아들이며 한번 짓씹은 그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토니는 나른해보이기도, 힘 없어 보이는 눈으로 그 움직임을 따르다 한숨을 쉬고 문가에서 몸을 뗐다. 피터를 딱히 믿는 눈치는 아닌 그가 피터에게 고정하던 시선을 잠깐 내려 피터의 바지를 움켜쥔 아이를 훑어보다 다시 피터의 얼굴로 올라왔다. 평소라면 누군가의 말을 의심할 때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표정으로만 압박할 토니의 답지 않게 조용한 반응에, 그가 곧 무슨 말을 할 지는 몰라도 상황이 복잡해질 것 같다고 느낀 피터가 재빨리 입을 열어 선수를 쳤다.


  "제가 없는 동안 계속 제 슈트 갖고 계셨어요?"

  "처음 몇 주만 빼면, 그래. 내가 계속 가지고 있었지. 미안하지만 업그레이드는 못 했어."

  "아, 물론이죠! 생각치도 않았어요. 제가 뉴욕에 있는 것도 아닌데, 업그레이드하실 이유가 없잖아요."


  괜히 뭔가를 바란 것처럼 보일까봐 걱정된 피터가 서둘러 말하자 토니는 묘한 표정을 하고 피터를 지켜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입을 반쯤 연 토니는 이내 고개를 아주 작게 젓고는 시선을 돌렸다. 아까 피터가 그랬듯 쌓여있는 물건들을 쳐다보다가 의미 없이 작은 박스 하나를 잡아올린 토니가 박스를 한 손에서 한 손으로 던져 넘겨가며 말했다.


  "이거 말고, 네가 거절했던 그 슈트는 좀 건드리긴 했어."


  네? 저도 없는데, 왜요? 라고 물으려던 피터는 그 질문을 할 수 있기도 전에 토니가 일컫는 슈트가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떠올리고 살짝 웃었다. 아, 그거. 그 언젠가는 토니한테 이 디자인은 커플룩 아니냐고 설레발도 쳤었는데.


  "'아이언 스파이더'요?"

  "기억하네?"

  "안 할 수가 없잖아요, 그 슈트가 어떤 슈튼데."

  "네 슈트지. 써놨잖아, 항상 네 꺼라고."


  토니가 종이백에 있는 문구를 손가락으로 집었다. 항상 피터의 것이라고, 슈트는 다른 누구에게도 갈 수 없다고 명확하고 간결하게 써둔 문구. 피터는 고개를 숙이며 작게 웃었다. 웃음소리에 담긴 역력한 긴장이 자신에게도 느껴졌다.


  "확실히 뉴욕에 방사능에 쩔어 있는 거미에게 물린 사람이 많지는 않나 봐요?"

  "글쎄. 확실히 뉴욕에 피터 파커는 한 명밖에 없더라고."


  토니 역시 피터를 쳐다보지 않고 말을 툭 던졌다. 지금, 토니가 혹시... 피터는 속으로만 고개를 저었다. 괜한 희망 가지지 말자고 생각을 하고 나니 딱히 반응을 할 방법도 없어, 그는 서투르고 투박하게나마 말을 돌리기로 했다.


  "...정말 업그레이드하셨어요?"


  그 말에는 저도 모르게 조금 힘이 들어갔다. 제 안의 공학도가 날뛸 수밖에 없는 단어였다. 아마 사막 한 가운데에 떨어져도 '오아시스'라는 단어보다도 '업그레이드' 하나에 더 흥분할 자신을 잘 아는 피터는 그 말에 착실하게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잠시 손 안에 들고 있던 박스를 내려다보다 뒤늦게 고개를 든 토니는 피터의 표정을 보고 어이가 없다는 듯 허,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래. 네가 마지막으로 봤던 때보다 좀 뭔가 추가됐지. 그 중에서도 등에 낙하산 말고도 다른 기능이 생겼는데—"
  "등에요? 막 로켓 부스터, 이런 건가요? 아, 아니면 우주나 심해에도 갈 수 있게 산소를 공급할 수 있는 장치예요? 아니면, 아니면, 나노 기술을 이용해서 등 뒤에서도 버튼을 누르면 슈트가 녹아내린다든가—"

  "아이디어가 너무 진부한 거 아니야? 마지막은 오히려 전투에서는 마이너스가 될 것 같은데."

  "물론 버튼에는 지문 인식을 달아야겠죠! 아, 근데 제가 없었으니까 지문을 등록할 겨를이 없기는 했겠네요. 그럼 이건 아니고, 음..."

  "어차피 그런 버튼이라면 네 지문보다는 내 지문을 등록해야지."

  "아, 그렇게 되는—"


  피터는 불현듯 말을 멈췄다. 방금 토니가 한 말이 한 박자 늦게 머릿속에 그려져서였다. 그러니까 피터가 토니의 앞에 서서 등을 대주고 토니가 버튼을 누르면 피터의 슈트가 녹아내리는... 아니, 이거, 잠깐만. 토니도 당연하게 한 말이고, 피터도 당연하게 납득한 말이었는데, 둘 다 애초에 이상함을 못 느꼈었는데 그걸 머릿속에 그려내보니 뭔가... 이상했다. 피터는 목 끝부터 붉어지는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토니를 힐끔 쳐다보았다. 슬쩍 쳐다본 토니는 저도 모르게 나온 말인지 피터의 반응을 예상치 못 한 건지는 몰라도, 자신 역시 당황했는지 박스를 손바닥에 둔 자세 그대로 피터를 마주한 채로 멈춰있었다. 그게 오히려 더 피터의 얼굴을 빠르게 붉어지게 했다. 토니는 이런 걸로 당황할 사람이 아닌데, 누가 봐도 당황한 모습이어서. 

  정적은 오래 흐르지 않았다. 이내 토니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다시 움직여 테이블에 박스를 탁, 하고 내려놓는 소리와 함께 경쾌하게 깨졌다. 피터는 그 크지도 않은 소리에 어깨를 잠깐 움찔하다 토니가 방향을 틀어 제게 다가오는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토니는 이마에 주름이 옅게 패이도록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토니와 피터의 눈이 또다시 마주쳤다. 언제나 그들은, 다른 건 몰라도 서로의 눈을 마주하는 것만은 경사 진 표면에 올려놓은 구슬이 밑으로 도로록 굴러가듯, 필연적일 정도로 자연스럽게 마주했다. 지금도 그들의 눈은 자연스러우면서도 강렬할 정도로 진하게 맞물렸다. 피터는 토니의 깊은 두 눈으로 빨려들어갈 것 같다는, 이제는 익숙하기까지 한 생각을 했다.


  "오해하는 것 같아서 해주는 말인데, 스파이더맨."

  "....."

  "나노 기술을 이용한 슈트는."


  토니의 목소리가 낮았다. 피터는 대답을 할 수 없을 것 같아 침을 삼키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옷 위에 형성되고 옷 위에서 녹는 거라서, 네가 생각한 그런 일은 안 생겨."


  아, 무슨 생각했는지 다 아나봐. 젠장. 피터는 얼굴이 더이상 뜨거워질 수 없을 때까지 뜨거워졌다고 생각하며 토니의 눈을 피했다.


  "...그런 생각 안 했어요."

  "넌 항상 표정으로 티가 난다니까."


  거칠고 마디가 굵은 토니의 손이 피터의 턱선을 장난스럽게 툭, 건드렸다. 피터는 입이 더할 나위 없이 말라가는 것 같아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였다. 그 움직임을 토니가 눈으로 쫓는 것을 봤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오늘 하루, 아니 토니에게 돌아온 뒤 모든 행동이 그랬듯 확신은 할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 거지? 5일만에 토니를 처음 봐서? 분위기가 이렇게까지 풀어진 건 정말, 정말 오랜만이라서? 이 분위기가 잠시 뿐이고, 곧 미뤄놨던 과제를 다시 마주해야 할 걸 알아서? 아니면, 토니의 손이 턱선을 건드린 것에서 지나지 않고 피터의 턱선을 천천히 쓸어내리고 있어서?

  향상된 감각으로 피터는 피부를 천천히 타고 내려오는 토니의 손길을 너무도 자세히 느낄 수 있었다. 더이상 애인도 아닐 텐데 이렇게까지 손짓의 농도가 짙은 것은 그가 토니 스타크이기 때문일 터였다. 그렇게 생각한 피터는 다시 눈동자를 올려 토니의 눈에 자석처럼 제 시선을 딸깍 맞췄다. 피터를 뚫어버릴 듯 진중하고 고요하게 쳐다보던 토니는 피터의 턱으로부터 손을 뗐지만 대신 한 발짝 더 다가섰다. 조용한 방 안에 토니가 발을 끄는 소리만이 들려, 피터는 제 심장이 쿵쾅대는 소리조차 토니의 귀에 들어가면 어쩌나 하는 터무니 없는 걱정을 했다. 아... 가깝다. 작업실에서 하루를 보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어른스러운 향수 냄새가 미약하게 나는 토니의 체향이 느껴질 정도였다. 더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한 토니의 두 눈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고개를 숙이는 피터를 토니는 자연스럽게 턱을 손으로 잡고 다시 고개를 들게 했다. 안돼, 진짜 심장 소리 너무 크단 말이야... 그 걱정이 무색하게도 바로 다음 순간 토니는 피터의 얼굴을 진득하게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 짙은 눈빛에 피터는 순간 말을 놓쳐 되물어야 했다.


  "네, 아니, 뭐라고요?"

  "방금 네 애가 네 이름 불렀다고."

  "네?"

  "피터-라고 했다고, 네 애가, 방금. 아들이랑 서로 이름 부르는 사이야? 특이하네."


  토니의 손은 피터의 턱에서 다시 손쉽게 떨어졌다. 피터는 허전하게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이 분위기와 저 눈빛으로 할 말이 아닌데. 그 말을 입증하듯 토니의 시선은 방금의 형형하기까지 할 정도로 올곧았던 기색을 잃고 꽤 평이하게 피터의 발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원래 하고 싶었던 말이 무슨 말이든지간에 일단은 미뤄놨다는 소리였다. 피터는 잠깐 고장난 로봇이라도 된 듯 멈춰있다가 황급히 에드를 안아올렸다. 토니의 시선이 에드를 따라 올라왔다. 


  "응, 왜, 에드?"

  "피터, 나, 나—"

  "응, 뭐가? 뭐 줄까?"

  "나아—"


  에드가 손가락으로 피터의 등 뒤의 무언가를 가리켰다. 아이의 자그마한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리려고 했지만 피터가 뭔가를 하기도 전에 토니가 성큼성큼 다가가는 게 먼저였다. 아, 아니에요, 토니, 괜찮은데— 피터가 제대로 항의하기도 전에 토니는 에드가 가리킨 모양인 로봇 장난감을 집어들고 그에게 안겨주었다. 에드가 솔직하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던 피터는 토니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가 그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에드를 보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이런 것까지 닮네. 미니 아이언맨 아머라도 만들어줘야 하나?"


  스스로의 턱을 쓸고 눈을 가늘게 뜰 정도로, 토니는 진심으로 그 사안을 고려하는 것 같았다. '닮았다'고 했고, 에드에게 제 아머의 작은 버전을 만들어줘야 하나 고민한다고 했다. 피터는 토니가 볼 수 없도록 작게 숨을 들이켰다. 토니의 입에서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이 에드의 아버지라는 것을 인정하는 말이 나오는 걸 2년 전의 자신이 들었다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겠지. 처음부터 토니는 에드의 존재를 피터의 예상보다 훨씬 손쉽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서도 이런 순간이 찾아오면 찾아올 수록 피터는 더더욱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부풀듯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껴야 했다. 동시에 더이상 애인도 아니면서 왜 에드를 저렇게 쉽게 받아들여서 희망고문을 하냐고 하는 원망에 가까운 감정의 지저분한 충돌이 없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지금 느끼는 감정을 토니가 눈치 채지 못 하도록 애쓰던 피터가 간신히 입을 뗐다.


  "그... 왜 피터라고 부르는지 궁금하시다고 했죠?"

  "뭐? 아, 그래."

  "혹시... 어쩌다 남들이 보게 되면, 저를 아빠라고 부르면 사람들이 이상한 오해, 아니 오해는 아니지만, 진실을 알아버리는 게 이 경우에서는 더 문제니까, 음. 네. 그런 거였어요. 토니랑 이렇게까지 닮았는데 저를 아빠라고 부르는 애가 있으면, 이상하니까..."


  볼품없이 줄어드는 목소리는 피터가 이 말을 꺼낸 게 그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라는 걸 입증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아직도 곤란해질 때는 말을 형편 없이 더듬는 저를 속으로 원망하던 피터는 토니가 잔잔히 웃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말을 삼켰다. 토니의 얼굴은 피로에 찌들다 못해 얼굴 근육이 피로를 나타내기 위해 움직인 게 아니라 피로 그 자체가 새겨져 있는 수준이었지만, 그 피곤한 얼굴로도 따뜻하게 웃고 있었다. 아니, 따뜻한 것 뿐만이 아니라, 정말 다정히. 그때처럼.


  "이해했어, kid. 더이상 말 안 해도 돼."


  그때처럼? 피터는 토니의 눈빛에 담긴 지긋함과 따스함이 낯설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익숙하면 안 되는데 익숙해서, 그게 낯설었다. 그 언젠가 둘이 업스테이트 건물에서 함께 영화를 보고 있던 때, 갑자기 벽을 뚫고 등장한 비전에 피터가 소리를 빽 질렀을 때 지었던 표정이 저랬던가? 아니, 그때는 빵 터지면서 비전은 스파이디 센스조차 거스를 수 있는 거냐고 실컷 피터를 놀려댔었는데. 저 표정은 달랐다. 너그럽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저 표정은... 애정이라고 할까? 그런데 더이상 사귀는 것도 아닌데 애정일 리는 또 없잖아. 

  토니가 피터의 양쪽 팔을 누르듯 잡은 것은 그때였다. 고뇌하느라 인상을 찌푸린 줄도 몰랐던 피터는 어느새 토니의 표정조차 웃음이 조금은 흐려진 것을 발견했다.


  "넌 너무 생각이 많아."


  피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토니의 눈이 초조하다고 느껴진다면 그건 착각일까, 잠깐 그렇게 고민하기는 했지만 그조차도 토니의 다음 문장에 바로 휩쓸려 사라졌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도망은 쳐야겠고, 애도 잘 키워야겠고, 들키지도 말아야겠고... 그런데 막상 들켜서 돌아오니, 애인은 생각보다 힘들어했던 것 같고. 그러니까 죄책감이 들어서 왜 도망쳤는지도 말을 못 하겠고. 그러느라 애인이 하는 모든 행동을 분석하기에 바쁘지."

  "......"

  "2년 전보다 생각이 많이 성숙해진 건 칭찬해줄 만한 일이야. 하지만..."


  토니의 시선이 피터의 얼굴을 찬찬히 훑다가 다시 눈으로 돌아왔다. 낮게 떨어지는 목소리의 끝에 피터는 참았던 숨을 뱉었다. 껴안는 것도 붙잡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토니의 손이 피터의 팔에 아주 조금 더 파고들었다.


  "가끔은 네가 열 일곱이었던 그 때처럼 뻔뻔하고 생각 없이 달려들어야 할 때가 있어."

  "......"

  "가령 나를 더이상 사랑하지 않는 게 분명한 사람을 당당하게 '애인'이라고 지칭한다던가."


  피터가 까딱하면 목이 부러지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빠르게 고개를 휙 들었다. 그 속도로 토니를 마주하자 그는 다시 어렴풋이 피식 웃었다. 그 미소에 담긴 속내를 읽으려 피터는 꽤나 간절한 눈으로 토니의 얼굴을 쳐다봤지만 이번에도 역시 그를 읽기가 힘들었다. 토니는 피터를 책처럼 뚜렷하고 확연하게 읽을 수 있던데 피터는 예나 지금이나 그가 해석할 수 없는 외국어처럼 어려웠다. 전에는 토니가 솔직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유효한 가정이었지만 토니는 솔직할 때조차 읽기가 어려웠다. 지금처럼.


  "일부러 그렇게 부르신 거였어요?"

  "그럼 토니 스타크가 실수로 말을 흘리고 다닐까. 아니, 생각해보니 흘리고 다니긴 했네. 캡이랑 얘기할 때도 말실수한 걸로 다 망한 걸 생각하면... 어쨌든, 지금은 아니야."

  "....."

  "너는, 뭐라고 했더라. 같은 아이의 아버지라고 했었나?"


  한 질문이 입술 끝까지 차올랐다. 입술을 조금이라도 열면 바로 터져나올 것 같을 정도로. 그 말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었다. 딱 한 가지만 알면, 그것만 말해주면 피터도 토니를 애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록 그 단 한 가지가 욕심일지 몰라도, 토니가 저렇게 의도적으로, 그리고 자의로 피터를 애인이라고 일컫는데, 이 오랜 시간 뒤에도 그렇게 여겨주고 있다면 피터는 그 정도는 바라도 될 것 같았다.


  "아무 말도 안 할 거야?"


  토니가 피터를 쳐다보는 눈이 깊고 어두웠다. 피터는 저도 그런 눈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를 올려다보던 피터가 입술을 꾹 닫아 하고 싶은 말을 억눌렀다. 그 입술의 움직임 역시 눈동자로만 따르던 토니가 입술을 혀로 축이고 턱을 살짝 들며 눈을 벽 쪽으로 돌렸다. 그의 훤칠한 옆모습을 보면서 피터는 입을 반쯤 열었지만 곧 다시 닫았다.


  "그래, 하지 마. 기다려주겠다고 하긴 했었지. 참고로 나도 이러려고 온 건 아니야. 패트롤 돌지 말라고 경고하려 왔는데, 뭐... 너와 있을 땐 항상 즉흥적이었으니까."

  "...원래 즉흥적이시잖아요."
  "너만 하겠어?"

  짖궂게 웃으면서도 토니의 미소가 마냥 마음 편하지는 않았다. 토니가 피터의 어깨를 두어번 툭툭 치고 그에게로부터 떨어졌다. 그러고는 에드 쪽으로 걸어가 로봇 장난감을 휙 들며, 그에 칭얼대는 에드에게 작게 '업그레이드 해줄게, 네 아빠가 그렇게 좋아하는 업그레이드'라고 중얼거리는 그에게 피터는 묻고 싶었다. 대충, 왜 사랑하는 것처럼 구세요? 안 사랑하잖아요. 저는 토니 말마따나 여전히 뻔뻔하고 생각 없게 토니를 사랑하지만 토니는 저를 사랑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정말 그걸 입 밖으로 내는 건 피터 파커 치고도 좀 많이 비참하고 처연했다. 


  "작업실에 있을 테니, 언제든 찾아와도 좋아."


  피터가 토니를 사랑하고 토니가 피터를 사랑하지 않는 건 그들 사이에서는 암묵적이었지만 동시에 너무도 명확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건 그들의 관계를 이해하기 쉽게 만드는 특징이기도 했다. 피터는 그게 여전할 것이라는 걸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것보다 훨씬 쉬울 수 있는 사인데.

  토니야말로 왜 그렇게 갑자기 복잡하게 굴어요?


  토니의 뒷모습에서, 여전히 칭얼거리며 토니와 피터 모두에게 보채는 에드에서, 이 모든 것을 조용히 관음하고 있는 프라이데이에게서, 피터는 그 누구에게서라도 그 정답을 찾고 싶었다.






















  부유감은 끝이 없는 침전처럼 남아 맴돈다.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때 편안하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눈을 감을 수 없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깨고 나서도 몸은 여전히 꿈 속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 하고 방금까지 있었던 세상의 끔찍함을 현재 처지인 양 되새기니까. 토니는 눈을 질끈 감고서 떨리는 한 손을 얼굴 위에 덮었다. 방 한 쪽의 통유리를 덮는 하늘의 색이 짙으면서도 온전히 검지 않아 새벽임을 알렸다.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며 다시 정상적인 호흡으로 돌아가려고 애 쓰는 토니는 오늘 더이상의 잠은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을, 마치 숨을 들이마신 다음에는 당연히 숨을 내쉬어야 하듯 그만큼 당연한 본능처럼 했다.

  뉴욕 사태 이후로 찾아오고, 만다린 사태 이후로 어느 정도 잦아들던 악몽은 어차피 완전히 멈춘 적은 없었다. 그러나 피터의 실종과 함께 다시 폭발하듯 불어난 점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가뜩이나 뉴욕 상공에서 떨어지는 추락감이라든가, 눈에 담기도 힘든 우주를 보며 숨이 부족해 헐떡이는 감각이라든가, 모두 쓰러져 미동도 채 않는 어벤져스의 모습 등으로 꽉 차있던 토니 스타크의 악몽의 라인업에 새로 추가된 피터 파커가 토니 스타크로부터 온 힘을 다해 달아나는 광경은 확실히... 버거웠다. 그 장면 속의 피터는 절망과 두려움 따위의 기분 나쁜 감정으로 얼룩진, 보기만 해도 안타까운 얼굴을 하고는 했고, 토니는 매번 꿈 속에서 피터가 그런 표정을 지을 필요가 없도록 지켜주겠다고 다짐한 뒤에 그가 그런 표정을 짓는 게 자신 때문이라는 자각을 하고는 매번 머리에 총을 맞은 듯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기에 더욱.

어느 정도 익숙해진 그러한 일련의 과정은 이미 일상과도 같지만 동시에 무척이나 지치는 일이었다. 안 그래도 피로에 젖어 움직이기도 힘든 몸인데 최소한의 수면마저 포기해야 한다니. 하지만 다시 눈을 감고 무수한 기억과 수많은 가능성을 떠올리는 것보다는 나았다. 가뜩이나 오늘 한 말에 피터가 아무런 반응도 없이 멍하게 서있었던 걸 생각하면. 그래서 토니는 자면서 찌푸린 인상을 풀 겨를도 없이, 얼굴에 손을 얹은 그대로 낮게 신음하며 왼쪽 팔꿈치로 침대를 짚고 상체를 올렸다. 그때였다.


  "토니... 괜찮으세요?"

  "으아악!"


  날것의 목소리로 굵은 비명을 질러버린 토니가 얼굴에 얹어놨던 손도 떼 양손으로 침대를 짚으며 일어나 앉았다. 그 과격한 반응에 토니의 어깨를 부드럽게 짚었던 손은 자신이 더 화들짝 놀란 듯 떨어져나갔다. 토니가 어느 정도 정상 호흡으로 돌아왔던 숨을 다시 거칠게 내쉬며 손이 떨어져나간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앉은 뒤에는 반쯤은 침입자라는 가정 하에 아머를 소환하기 위해 한쪽 손을 번쩍 든 상태였던 그가 크게 뜨여졌던 눈에 힘을 풀며 천천히 손을 내렸다.

  피터 파커. 맞다.

  이제는 피터가 옆에 있었지.

  토니에게서 도망을 치지도 않고, 오히려 본인이 직접 토니의 침실까지 올 정도로, 자의로. 적어도 지금은. 

  입을 다시 열었을 때, 토니의 목소리는 방금 자다 깼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낮았다. 본인도 자다 깨서 급하게 왔는지 손질되지 않은 곱슬머리가 평소보다도 더 사방에 곱슬로 뻗쳐있는 피터는 크고 강아지같은 눈을 깜빡이며 토니의 어깨에서 뗀 손을 말아들이더니 서서히 제 옆으로 붙였다. 


  "...왜 왔어."

  "깼어요. 아직도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청각이 좀 예민하잖아요."


  나흘 전에는 2년동안 본인을 기억했냐고 묻더니, 이제는 아직도 자신의 제일 큰 특징 중 하나를 기억해주실지 모르겠다, 라. 토니는 헛웃음을 지으며 오른손으로 마른 세수를 했다. 조금만 더 자의식을 갖춰 줬으면 좋겠는데. 아니면 저렇게라도 선을 긋는 걸까.

  그러고 보면 피터는 오늘도 애인이라는 말을 인정하지 않았었다.

  토니의 침대 옆에 어정쩡하게 서있던 피터는 오기는 왔는데 뭘 해야할 지 모르겠다는 의사를 온 몸으로 표현하듯 입술을 말아들이며 제 뒷목을 긁더니, 또 종종거리기 시작했다. 얼굴의 반을 가리듯 손으로 짚은 상태에서도 주변 시야로 그 에너지가 보일 정도여서 토니는 이번에는 헛웃음이 아니라 진심으로 낮고 짧은 웃음소리를 냈다. 스무 살이라더니 가만히 있지를 못 하는 건 여전하구만. 그것은 꽤나 마음이 평안해지는, 그러니까 방금 전 악몽을 꿨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괜찮아지는 것 같기까지 한, 그런 감상이었다.


  "그래서, 자고 있었는데 갑자기 누가 비명을 질러대길래 깨서 소리가 나는 쪽으로 출동하셨다?"

  "음... 그게 맞긴 한데 정확히 그런 건 아니고..."


  토니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려 보이자 피터는 눈꼬리를 축 내리며 항복하듯 입을 열었다. 토니의 이 표정에는 언제나 자동 반사적으로 반응하며 사실을 털어놓고는 했었다. 


  "그... 음..."

  "....."

  "저 근데 이거 진짜 오해 안 하거든요. 토니가 그렇게 한 건 뭐, 그냥 그런 거라고 치고 있어요. 그러니까 막 저에 대한 어떤 감정이 있어서 그러신 거라기보다는 절 되게 많이 걱정하셨다고 했나? 너무 걱정이 되셔서 막 2년동안 계속 생각하셨다고... 그러니까 걱정! 걱정이요, 걱정이라는 게 어쩔 때는 굉장히 강력한 감정이잖아요, 꿈에서도 충분히 나올 수 있는—"

  "...Kid, 너 지금 여기 온 이래로 가장 말 많이 하고 있는 거 알아? 그냥 본론만 말해."

  갑자기 말이 막혀 입을 어정쩡하게 연 상태였던 피터가 어색한 얼굴을 갈무리하지도 못 하고 입을 닫았다 다시 열었다. 토니가 참을성 없게 얼굴을 한 손으로 비빌 때에서야 그는 피터의 조용하고 느릿느릿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제 이름, 부르셨어요."

  "뭐?"

  "제 이름 부르셨다고요..."


  소형견마냥 크고 겁먹은 눈. 토니는 고개를 휙 돌려 그런 피터의 두 눈을 마주하며 당황스러움에 피터와 비슷할 정도로 커진 눈을 깜빡였다. 토니는 침대에 앉아있고, 피터는 서있었는데도 높은 침대 탓에 둘의 눈높이가 자로 잰듯 딱 맞았다. 그런데 지금 뭐라고? 내가 뭘 했다고? 토니는 그 정보를 제대로 입력하기도 전에 멍청이처럼 말을 쏟아냈다.


  "뭐? 잠깐, 무슨. 아니, 어떻게? 어떻게 이름을 불렀는데. 어떤 식으로."

  "음... 피터- 이렇게...? 제가 놀라서 일어나서 제대로 들은 게 맞나 하고 있었더니 다시 더 크게, 피터! 이렇게—"

  "그만. 알겠어, 알아들었어."


  토니는 더는 듣고 있을 수가 없어 말을 끊었다. 대충 어떤 그림일 지는 예상이 갔다고 해도 이렇게 피터가 목소리까지 흉내내며 성심성의껏 재연을 해주는 건 상황이 너무 선명해져서 괴로웠다.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럽다는 식으로 괴로운 게 아니라, 이건... 좀, 부끄럽잖아. 그래. 치부를 드러낸 것만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는 말은 쪽팔리다는 뜻의 토니 스타크 화법 상의 표현 방식이고. 

열심히 목소리까지 깔며 재연을 하던 피터는 다시 예의 그 멋쩍은 표정으로 돌아와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토니도 굳이 입을 열지 않자 둘 사이에는 어색한 공기가, 마치 누군가가 잡아 띄워놓고 일부러 건드리지 않는 것처럼 가시지도 않고 맴돌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토니가 어른스럽게 선두를 터야 한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는데 지금 토니는 스스로가 어른스럽게 느낄 수 있을 만한 감정 상태가 아니었다. 

  결국 다시 용기를 낸 건 피터였다. 주춤거리기는 하지만 조금씩 토니의 침대쪽으로 다가오는 피터에 토니는 미간을 좁히고 그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뭘 하려는 건지 잠깐 보려고만 했던 건데, 토니가 있는 침대에 가까이 오는 그를 보면서도 토니는 피터가 제게 아주 가까워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피터가 토니가 누워있는 침대에 한쪽 무릎을 척 올려놓을 때까지는.


  "...지금 뭐하는 거야, kid?"

  "어... 음, 조금 뻔뻔하고 생각 없게 구는 중이에요."


  피터가 침대에 반대편 무릎까지 올려 무릎을 꿇은 모양으로 올라서자 피터의 얼굴에 고정해놓은 토니의 시선도 조금 올라갔다. 피터가 토니를 내려다보고 있는 구도가 되어 있었다. 거의 낮에 피터의 방에 갔을 때만큼 가까워진 피터의 눈동자가 진지했지만 한편으로는 긴장한 티가 역력하게도 그의 숨이 얕게 입 밖으로 내뱉어지는 게 느껴졌다. 토니는 제 왼편에 있느라 침대 건너편의 창문 쪽을 보게 된 셈이 된 피터를 허리만 돌려 쳐다보며, 어느 정도 밝아오는 새벽의 푸른 빛이 피터의 얼굴을 밝혀오는 모습을 목격했다. 어둑어둑한 방 안에서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도 않는 푸른 빛의 피터는 여명처럼 희미하게 반짝이는 눈을 하고 있었다. 언제나 눈이 반짝이는 꼬맹이였기에 이 순간도 예외는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토니는 그 광경에 제 숨이 순간 멈췄다 재개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피터가 조심스러움이 뚝뚝 묻어나는 손짓으로 오른쪽 손으로 천천히 토니의 왼쪽 어깨를 잡았다. 맞닿은 손이 떨리는 게 토니의 어깨로도 전해졌다. 피터의 왼쪽 손이 토니의 턱선에 일순간 닿았다가 급히 떨어졌다. 

  피터는 토니의 어깨를 잡은 손을 잠시 움찔거리더니 천천히 제 엉덩이가 침대에 앉을 수 있도록 몸을 내렸다. 둘 다 앉은 자세가 되자 피터는 토니의 다리가 놓인 방향으로 제 다리도 곧게 뻗었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의미 없이 어깨 위에 놓인 손으로 토니는 어렴풋이 피터 역시 이 상황에서 뭘 해야 하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 한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름의 생각은 있겠고, 그 생각 또한 토니가 조금만 고민해보면 매뉴스크립트를 읽듯 편하게 읽히겠지만. 토니는 지금 이 순간마저 머리를 열심히 쓰고 싶지는 않았다. 

  피터가 토니의 허벅지께에 놓인 실크 이불을 끌고 올 때, 토니가 나지막한 한숨을 쉬며 피터의 허리를 오른쪽 손으로 감고 함께 침대에 누워버린 건 그래서였다. 두 손으로 이불을 끌어오던 피터는 갑자기 눕혀진 제 몸에 양손으로 이불을 쥐고 눈을 깜빡이다 천천히 토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이다. 토니는 머릿속에 그렇게 울리는 말을 납득했다. 오랜만이었다. 푸른 빛이 밝혀오는 피터의 얼굴이 평소에는 보지 못 한 아련한 빛을 띄는 것이나, 피터가 침대에 누워 고개만 돌려 제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것이나, 살짝 베개에 눌린 그의 갈색 곱슬머리가 베개 때문에 망가지듯 흐트러지는 것 모두. 허리에 토니의 굵은 팔이 둘러진 피터는 얌전했다. 고민하고 있는 걸 뻔히 티내듯 토니의 눈을 피하며 볼이 홀쭉해지도록 볼 안쪽을 씹다가 이내 결심한 듯 조금 토니의 쪽으로 다가가려 몸을 꿈틀거리기도 했다. 토니는 침대가 들썩이는 걸 느끼며 조용히 피터가 다가오도록 내버려두었다.


  "예전에, 있잖아요."


  피터가 이불을 가지고 손장난을 치며 나지막하게 말을 텄다. 토니는 듣고 있다는 뜻으로 작게 소리를 냈다.


  "원래 우리가 잘 때 제가 토니를 껴안고 잤었잖아요. 가끔 같이 안고 잠들 때도 있었지만, 토니 습관이, 베개를 안는 것처럼 머리 밑에 손을 집어넣고 침대 끄트머리 쪽 옆으로 주무시는 거라... 제가 토니 등 안고 잤었어요."

  "그랬었나?"
  "네. 그런데 가끔은 자다가 깨보니까 토니가 저를 껴안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막 뭔지는 모르겠는데 너무 좋고, 그래서 깬 거 티 안 내고 계속 자는 척 하면서 토니 마주 껴안고, 그랬는데..."

  "....."

  "그래서 뭔지는 몰라도 토니가 저를 껴안게 하는 그 뭔가가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피터의 목소리가 심야 라디오 호스트처럼 잔잔하다고 생각하며 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피터가 하고 있는 말이 언젠지가 머릿속에 그려졌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기로 했다. 피터는 여전히 저를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어렴풋한 새벽의 빛에서마저 역광을 받는 위치에 놓여있는 토니의 얼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각이 뛰어난 스파이더맨에게는 너무 선명했는지, 그리고 토니의 얼굴을 보고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얘기였는지, 이불을 들어올리고 작게 진 주름을 반대쪽 손으로 피는 의미 없는 손장난이 조금 더 이어졌다. 토니의 얼굴을 똑똑히 마주한 낮에는 하지 못 한 이야기도 적당한 속도감으로 이어졌다. 


  "나중에서야 알았던 거죠. 토니가 저를 껴안고 자는 날은... 중간에 토니가 악몽을 꾸고 일어나서 자세를 바꾸던 때였다는 걸."


  알고 있었군. 별로 크게 염두에 두지 않은 줄만 알았는데 제 어린 애인... 아니, 어린 전 애인은 토니의 생각보다도 깊고 진중하게 제 바디 랭귀지를 읽은 모양이었다. 피터의 손이 제 허리에 둘러진 토니의 팔을 조심스럽게 토닥였다. 토니는 제가 당장이라도 깨질 것 같은 유리처럼 신중하게 구는 피터를 보며 그가 자신더러 '여리다'고 한 것을 떠올렸다. 


  "제가 또 떠나는 악몽을 꾸신 거죠?"


  토니는 그 말에 피터의 허리에 얹은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을 줘버렸다. 그래, 뭐, 똑똑한 애고, 똑똑한 애라서 알아차렸다기보다는 멍청하지 않으면 그걸 들은 후에는 토니의 악몽의 내용이 쉽사리 짐작이 갔을 테고. 한편으로는 예상하고 있던 대화였다. 갑자기 직구로 훅 들어와서 놀랐을 뿐이었다. 원래 피터 파커라는 인간이 필터가 없기는 했지만. 피터는 제 허리에 놓인 손이 갑자기 움직이는 걸 느꼈을 텐데도 토니의 쪽을 쳐다보지도, 말을 멈추지도 않았다.


  "결국 저는 제 소원을 스스로 이룬 게 되네요."

  "....."

  "그런데... 그런데 제가 그렇게 토니를 힘들게 했으면... 그럼 저는 대체 얼마나, 대체 어떻게..."


  피터의 목소리가 조용히 젖어들어갔다. 아니, 이건 안 된다. 이렇게까지 자학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토니도 모르겠지만 토니는 정말 여려요'는 무슨, 본인이야말로 툭 치면 바로 낑낑대는 강아지 같아서는 누가 누구더러 여리다는 거야? 토니는 피터의 허리를 더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다른 손으로는 그의 턱을 제 쪽을 향하도록 돌렸다. 


  "그만."

  "저는..."

  "돌아왔으면 된 거잖아. 쉽게 생각한다며. 그럼 정말 쉽게 생각해야지."

  "하지만 힘드셨잖아요, 저 때문에."

  "그리고 지금 너 덕분에 위로 받잖아."


  내가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말할 수 있는 날도 오다니, 어머니가 보시면 감격의 눈물로 강을 만드시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과도 같은 헛웃음을 내는 토니를 피터가 물기 어린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토니는 그 모습을 낮에 본 피터의 모습에 비추어 보았다. 놀라다가, 좋아하다가, 부끄러워하다가, 혼란스러워하는 등, 더 다채로운 감정을 보여준 건 분명 그 때였는데 왠지 그는 지금 훨씬 더 솔직해 보였다. 그때는 그 모든 감정을 억제하려고 노력하던 피터가 한 치의 보호막도 없이 완전히 토니를 마주하고 있었다. 오로지 한 가지 감정을 토니에게 올곧고 숨김 없이 쏘아주고 있었다. 둘의 자세도 마찬가지였다. 낮에는 서로가 불확실해 있었던 조금의 거리감은 완전히 사라진 채였다.


  "...정말 그걸로 충분해요?"


  이걸로 충분하지 않다면 눈물을 쏟아내버릴 것만 같은 눈으로 뭐라는 거야. 토니가 고개를 한 번 끄덕여보이자 피터는 토니의 시선을 풀지 않고 그의 품으로 좀 더 가까이 파고들었다. 아예 침대에 누워 서로 껴안게 되어버린 자세는 둘의 아슬아슬하게 줄다리기하는 현 관계를 생각하면 전혀 적합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았다. 태풍 속의 눈에 서 있는 사람처럼 양쪽에 부는 돌풍과 혼란을 무시할 때만 즐길 수 있을 만한 거리였다. 그러니 충분할 리가 없었다. 그들이 평화로워지기 위해서는 풀어나가야 할 일도 많았고, 그 많은 일을 풀어나갈 수 있다는 확신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그들은 지난 일을 지난 일로만 묻어둘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토니는 버려야 할 정도로 망가졌지만 결코 버릴 수 없는 그것들로, 동굴 속에서 금속 덩어리 몇 개로 아이언맨 슈트를 만들었던 그때처럼, 무모하게라도, 억지로라도 풀어나가야 할 필요가 있었다. 피터의 곱슬머리가 얕게 덮고 있는 뒷목을 쓸어내리던 토니가 피터의 질문에 답하는 대신 제가 할 말을 꺼냈다.


  "나도 추억 하나 꺼내보고 싶은데."

  "제가 말한 건 추억이 아닌데요, 그거 좋은 기억이 전혀 아니었—"
  "우리 제일 처음 단 둘이서 식사했을 때 기억 나?"


  피터가 말을 불현듯 멈췄다. 그걸 왜 지금 말하냐는 의문이 역력한 표정이었지만 그는 토니를 보며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치즈버거... 그때 새벽이었죠. 원래는 같이 저녁 먹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는데—스테이크였나, 하여튼 엄청 비싼 거였던 거 같아요. 근데, 음, 갑자기 빌런이 나타나서 밤새 싸우다가 둘 다 힘들어서 슈트 입고 대충 때웠잖아요."

  "아침이었지."

  "새벽 4시였던 것 같은데요?"
  "그 정도면 아침 아닌가?"

  "아침은 아니죠... 그때 우리 별도 봤잖아요!"

  "그랬지. 그런데 너는 별 아니라고 했잖아, 이 시간대에 별이 보일 리가 없으니까 금성이랑 목성일 거라고. 그렇게 선명한 오리온 자리를 눈 앞에 두고 그렇게 당당하게 주장하는 사람은 처음 봤었어."

  "아, 진짜... 저 천문학은 학교에서 안 배운다고 했잖아요! 헷갈릴 수도 있죠..."


  침대에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하던 둘의 대화가 순조롭게 이어지다 토니의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멎었다. 누가 이렇다 할 노력도 없이 서로 은은하게 미소를 머금고 있는 와중에 자연스럽게 끊어진 대화여서 어색하기는 커녕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 자연스러움 자체가 더 낯설 정도였다. 잠깐 정적이 자연스럽게 허공에 맴돌게 내버려두던 토니가 작게 속삭였다. 애한테 안 가봐도 돼? 피터는 고개를 작게 저었다. 깨면 알림 달라고 프라이데이한테 말해놓고 왔어요. 


  "그 나이대 애들은 시도때도 없이 깨지 않나?"

  "음... 좀 그렇죠? 그런데 워낙 얌전한 편이라..."

  "잘 됐네."


  피터가 순해보이는 눈을 깜빡였다. 이번에도 언어가 아닌 표정으로 제가 하고 싶은 말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그가 눈으로만 의문을 표시하는 것에 토니는 괜히 바로 궁금증을 풀어주지 않고 피터를 안은 팔에 한번 힘을 줘 더 세게 안으며 뜸을 들였다. 피터는 그가 극적인 효과를 위해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보채듯 몸을 들썩였지만 토니는 힘을 풀지 않았다. 사실은 그런 마음 편한 효과가 아니라, 무모하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로운 토니 스타크가 무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서였기에.


 "너도 알겠지만, kid, 뭐든 처음이 있는 법이잖아. 처음 방영하는 방송은 파일럿 에피소드를 내보내고, 처음 해보는 실험에서는 원시 데이터를 도출하고, 처음 도로에 나선 차는 시운전을 거쳐야 하듯. 일종의 샘플은 어디에나 있는 셈이지."

  "그...렇죠? 토니, 혹시 지금..."

  "그러니까 내가 하려는 말은—"

  "토니, 혹시 오랜만에 스파이더맨 일 하고 싶으면 토니랑 같이 연습부터 해야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 말 아닌데? 피터가 눈을 크게 깜빡이며 진솔하게 하는 말에 토니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전후 맥락과 전혀 관계 없는 추론에 딱히 해줄 말이 없던 탓이었다. 너는 '첫 식사'를 내가 어떤 맥락에서 꺼냈다고 생각하는 거야? 눈 앞에 놓인 거미인간은, 토니의 예상을 타파하는 게 취미 활동이라도 되는 것 같은 이 피터 "스파이더맨" 파커는, 제 예상에 확신을 가질 만한 근거가 있다고 판단되었는지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하며 크고 동그란 눈으로 토니의 말에 반응했다. 그렇게 순진하고 아무 것도 모르는 듯 한 눈으로 엉뚱한 걸 짚는 걸 귀여워해야 할지, 지금 히어로 일이 문제가 아니지 않냐고 어이 없어해야 할지. 


  "뭐... 이 도시를 지킬 임무가 있는 어벤져스시니까 자경단이 안전하게 사고 안 치도록 감시하셔야 하겠죠. 아, 오늘 낮에 오신 것도 그래서였어요? 그런데 저 연습은 필요 없을 것 같은데..."


  토니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그러니까 우리 관계에도 파일럿이 필요할 것 같다는 말이었다. 우리의 첫 데이트를 똑같이 따라하는 것만큼 완벽한 파일럿이 어딨겠어. 은근슬쩍 이것도 데이트라는 말을 끼워넣을 작정도 있었다. 마침 지금도 새벽인데 함께 나가서 별이나 보며 다시 내가 네 마음을 살 수 있도록 기회를 줘. 그런 말을 하려 했다. 

  피터가 다음 순간 말을 하려, 이 푸른 빛에서도 눈에 띌 정도로 얼굴을 붉게 물들이지만 않았어도 끊고 원래 하려던 말을 할 수 있었는데. 


  "그래도 뭐... 토니랑 같이라면 뭐든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

  "아, 패트롤 같이 돈다고 해서 의미 부여하는 거 아니에요! 그냥 오랜만에 봤으니까 계속 같이 있고 싶어서..."


  아니, 이게 아닌데... 말하면 할 수록 더 애정을 숨길 수 없는 쪽으로 흘러가는 의식의 흐름에 피터의 얼굴이 아연해졌다. 만화에 나올 법 할 정도로 노골적인 표정에 토니는 결국 고개를 숙이며 어깨까지 흔들어가면서 쿡쿡 웃었다. 허공에 제스쳐까지 해대며 열심히 대변하던 피터는 토니의 그런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다 볼멘 소리를 냈다. 너무 크게 웃으시는 거 아니에요? 웃긴 말 한 것도 아니잖아요. 하지만 토니는 피터가 그 어떤 재밌는 말을 했어도 지금만큼 크게 웃을 일이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여전히 웃음끼 서린 눈가가 피터의 강아지마냥 커다란 동공을 마주했다. 


  깨달음을 얻는 순간을 묘사하는 방법은 고착화되어있다. 숨이 멎고, 심장도 같이 멎어주는 것 같고, 아무 생각도 안 드는 뇌는 하얗게 표백이 되고. 조금 드라마틱한 편에 드는 양반은 '유레카!'라고 외치며 욕조를 뛰쳐나가기도 했다고 했다. 토니도 그런 화려한 제스쳐를 곁들인 깨달음을 얻은 적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 이 '유레카'스러운 순간에서 토니는 끊이지 않는 웃음으로 몸을 들썩이며 편안한 얼굴로 그저 깨달음을 수용했다. 머릿속은 크게 사이렌 소리가 울리는 대신 편안하게 단 한 가지의 정보를 제공했다.


  아, 어떻게 몰랐지? 토니는 지구상에서 지능으로 따지면 다섯 손가락에 무리 없이 드는 자신이 지금 이 순간 세계에서 제일 가는 멍청이처럼 느껴졌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피터 벤자민 파커를 앞에 두고. 피터 파커였다. 얼굴만 언뜻 봐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모두 간파할 수 있는 그 거짓말도 못 하는 꼬맹이. 그러니까 토니는 어쩌면 지금껏 내내 알고 있었을 지도 몰랐다. 그래서 피터가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때 그렇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을 지도 모르지. 작업실에서 내내 피터가 페독스 섬에서 했던 말을 떠올리며 어딘지 모르게 어정쩡하다고 생각한 것도 어쩌면 이것 때문일 지도 몰랐고, 어쩌면 지금껏 내내 확신에 가까울 정도로 강력하게 의심을 하고 있었어서, 물이 가득 차 넘실대는 컵처럼 방금처럼 작은 물 한 방울이 하나 똑 떨어진 것에 완전히 깨달아버린 걸지도 몰랐다. 확실한 것은 단 한 가지였다.


  애인이라는 말을 고집스럽게 끝까지 하지 않으려 들어서 정말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오늘 낮에 보여줬던 그 어쩔 줄 몰라 표정 관리를 못 하던 모습이나, 예전을 끊임 없이 회상하고 안타까워하기도, 그리워하기도 하며, 토니를 애타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피터 파커의 그 눈동자, 토니에게 마음껏 다가오지도 못 하면서도 계속 쭈뼛쭈뼛하면서나마 거리를 좁히는 모습, 지금 피터의 입에서 무의식적으로 프로디안 슬립처럼 나온 말본심, 그런 건 모두 그저 피터가 이타적이기 때문에 나오는 광경이 아니었다.


  정말 어떻게 몰랐지? 저렇게 한 치 거짓도 없이 솔직한 애를 두고. 피터가 방금처럼 언제나 황급히 제 마음을 숨기려고 들기는 했다지만, 죽었다 깨어나도 제대로 된 거짓말은 못 할 것 같은 그의 특성 상 그건 토니의 변명 거리는 안 됐다. 아무래도 '같은 아이의 아버지'라는 말에 하마터면 속을 뻔 했던 것 같았다. 그 말을 한 이유는 여전히 풀어야 할 수수께끼로 남은 셈이다. 자신을 떠난 이유를 아직도 말해주지 않은 것도 분명 한몫 했다. 하지만 토니는 이젠 그 트릭을 헤쳐나갈 자신이 있었다. 이제는. 지금은 알아버렸으니까. 


  토니가 피터의 뒷목을 다시 쓰다듬으며 옅게 그것을 눌러 제 쪽으로 다가오게 했다. 바스락거리는 시트의 소리와 함께 제 앞으로 다가온 피터의 이마에 토니는 짧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피터의 숨소리가 정직하게도 일순간 멎는 소리가 들려 토니의 확신에 박차를 가했다. 


  피터 파커는 여전히 자신을 사랑했다. 2년 전의 그때와 같은 애타는 간절함으로.


  "그래, kid. 데이트라고 치자. 오랜만에."


  그리고 토니는 이번에도 그가 자신의 표현을 갈구하게는 내버려두지 않을 작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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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년이 지났는데도 모두 무탈한 것으로 눈치 채셨겠지만 인피니티 워는 일어나지 않은 세계관입니다^^;;

* 끝을 향해 달려가네요! 점점 분량이 길어지는데 (이번 편은 3만자가 넘네요ㅋㅋㅋ) 읽어주시는 분들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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