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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피터] 신분증을 제시해주세요 7 (完)

토니의 아이를 데리고 도망치는데 처음부터 들킬 위기에 처해지는 피터의 이야기

  "이건 좀... 너무하다고 생각 안 해?"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충분히. 그래서 토니가 프라이데이에게 명령을 하는 걸 보면서도 기겁해서 말렸고, 이럴 거면 패트롤같은 거 안 돌아도 된다고 진심을 담아 말했고, 다만 널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하고 싶어서라고 단박에 묵살 당했고. 그래도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서 한 마디 더 하려고 했지만 짜기라도 한 듯 때마침 에드가 피터의 어깨를 잡아뜯으며 심심하다고 보채서 달래느라 잠깐 그걸 달래느라 한 눈을 팔고 나자 이미 모두 끝나있었다. 아연해서 토니를 쳐다보자, 토니는 그저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한 번 들썩이고는 다시 모니터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프라이데이에게 명령을 내릴 뿐이었다. 클린트 바튼의 보안 등급을 오늘 하루동안만 올려, 방금 여기로 와줘야겠다고 연락 넣었으니까. 그렇게.


  피터도 자신이 과하게 안절부절 못 하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시빌 워 사태 이후로 토니와 '팀 캡' 사이에서 나름의 화해는 한지 오래기도 했고, 몇 명은 사이가 냉랭해졌다고 해도 예전과 사이가 같아졌다고 볼 수 있는 몇 명이 있는 것도 알고 있었다. 대충 누가 어느 카테고리에 속하는지 분류도 할 수 있었다. 아주 간단하게 요약해서 말하자면, 토니가 스파이더맨의 정체를 상대에게 공개했다면 그 사람은 토니와 다시 가까워진 사람, 그리고 '보호'를 들먹이며 피터를 보여주기를 꺼린다면 토니가 여전히 거리를 두고 있는 사람. 호크아이인 클린트 바튼은 전자였다. 피터의 앳된 얼굴을 보고 질겁하며 이런 애한테 전투를 맡기다니 제정신이냐고, 우리 애들은 고등학생이 되어도 절대 접근 금지라고 장난 반 진심 반으로 이야기하기도 했었다. 그 말에 토니는 자신은 아직도 그 때 그 애들은 진짜 애들이 아니라 어린 쉴드 요원이라고 굳건히 믿고 있다며 그 장난을 맞받을 정도까지 됐으니, 확실히 둘의 사이 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없었던 셈이다.

  아니, 그래도. 피터가 에드를 안은 팔을 한 번 더 고쳐 잡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너무 죄송하잖아, 호크아이한테 내 애를 봐달라고 부탁하는 건. 

  아침이었다. 어젯밤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새벽, 토니와 함께 침대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피터는 이내 에드가 잠에서 깨어 우는, 거의 그만이 들을 수 있게 소리를 희미하게 듣고는 벌떡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왔었다. 그에 거의 반사적으로 피터의 팔을 낚아챘던 토니는, 서로의 놀란 눈이 마주치자 대충 상황을 파악하고는 피터의 팔을 순순히 놔주며 다시 눈을 감았었다. 아침 식사는 같이 하자고, 네 아들도 데리고 오라고 중얼거리며. 피터는 고개를 두어번 끄덕이고는 재빨리 방을 나섰었다. 최대한 소리가 안 나게 조심스럽게 문을 닫으며 방 안을 돌아봤을 때는, 실크 이불을 다시 쥐는 토니의 손길과 그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 아까보다는 편안해보인다는 희망과도 같은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몇 시간 후, 진정하고 잠이 들었으면서 또 얼마 안 된 시간에 깨서는 팔팔하게 재잘거리는 에드를 데리고 1층으로 내려오자 토니는 이미 간편한 티셔츠 차림으로 토스트에 마멀레이드를 바르고 있었다. 피터를 발견하고 손을 가볍게 흔드는 그에게 피터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었다.


  '안 주무셨어요?'


  그 질문에는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아무리 토니라고 한들 거짓말일 수는 없을 정도로 편안한 말이 돌아왔었고.


 '정반대야. 몇 년만에 처음으로 푹 잤거든.'


  피터는 테이블에 천천히 앉으며 토니의 그 말이 진심인지를 간파하기 위해 토니를 깊게 주시했었다.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정직해보이는 얼굴이기는 했지만 역시나 토니니까 뭐든 확신할 수는 없었다. 결국 한숨을 푹 내쉬고 에드를 옆자리에 앉힌 뒤 저도 토스트를 하나 집어온 피터는 한입을 입 안이 꽉 차도록 베어물며 토니가 더미에게 컵 하나를 더 가져오라고 시늉하는 양상을 지켜봤었다. 뭔가 그의 바디 랭귀지가 달라진 것 같다는, 훨씬 부드러워진 것 같기도 하다는 묘하게 거슬릴 정도로만 아린 감상을 내리는 그에게 토니가 말을 건 게 그 내용이었다. 

  

  '패트롤 말인데.'

  '패트롤...? 아, 네, 그거요.'


  데이트라고 치자고 하셨던. 피터는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입을 꾹 다물었었다.


  '오늘 하려고.'

  '오늘이요?'

  '그래. 그런데 아무래도 거기,'


  마말레이드를 바르던 나이프로 에드 방향을 콕 집는 토니의 행동에 피터는 순간 움찔했지만, 그가 별 생각 없이 한 행동인 것도 알거니와 우선은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이 궁금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런 행동은 나중에 교정해드리면 되니까. 어쩐지 그들에게 '나중에'가 있기는 할 것 같다는 긍정적인 생각이 들었으니까. 


  '애를 혼자 둘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무리 프라이데이라도 물리적인 육체가 없으니 돌보는 데에는 한계가 있잖아. 너도 그렇게 말하면서 뺄 것 같고.'

  '빼는 게 아니라— 아니, 네. 그렇죠 아무래도...'

  '그래서 준비한 수단이 이거야.'


  그렇게 말하며 씨익 웃는 토니가 '준비한 수단'이 그저 간편하게 '호크아이 호출 및 호크아이를 베이비시터로서 고용'인 줄을 알았으면 그 말에 그렇게 순순하게 뭔데요? 하고 묻지 않았을 텐데. 그래서 불과 몇 시간 후인 지금, 피터는 토니에게서 자초지종을 듣고 어이 없어하는 호크아이와 태연하게 그를 쳐다보는 토니의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자신이 뒷배경으로 스르르 녹아 없어지면 좋겠다는 전혀 건설적이지 못 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집에서 쉬다가 토니의 연락을 받고 느긋하게 나온 듯 티셔츠와 품이 큰 바지를 입고 있는 클린트는 턱을 잡아당기며 눈을 치켜뜨고 허공을 응시하는 자세로 뒷목을 벅벅 긁었다. 짜증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손길과 몸짓이었다.


  "애 셋 키우면서 평생 할 육아는 다 한 줄 알았는데."

  "배움에 끝이 없듯 육아에도 끝이 없는 거라고 생각해봐, 마음이 편해질 거야."

  "놀랍게도 전혀 안 편해졌어."

  "셋이면 베테랑 수준인데 하나를 하루 돌보는 건 어렵지도 않잖아? '친구로서의 부탁' 카드가 안 먹힌다면 시급도 줄 의향 있어."


  세간에서 '지옥의 주둥아리'로 불릴 정도로 유명한 입으로 상황을 착실하게 악화시켜가는 토니의 모습에 피터는 숨을 조용히 들이마셨다. 오늘 정말 아까부터 평소와 달리, 라고 잠깐 생각했지만 사실 다시 생각해보면 평소와 그다지 다르지도 않았다. 오히려 근 며칠 간 보였던 모습이 예전의 토니 스타크의 이미지와 부합하지 않는 부분이 있었던 거지, 이렇게 상대를 비꼬면서도 적당히... 뭐라고 해야하지? 아, 쾌활한, 그래, 쾌활한 모습은 어느 정도 토니 스타크다웠다. 그 증거로 눈을 굴리며 어이 없어하는 클린트도 토니에게 장난스레 짜증을 내기는 하지만 이상하다는 느낌은 받지 않은 것 같으니. 그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몰라 그저 아이를 더 꼭 껴안은 피터는 고개를 들자마자 저를 쳐다보고 있던 두 남자의 시선을 마주했다. 눈이 마주치자 클린트는 상체를 앞으로 뻗더니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대하듯 피터의 팔을 툭툭 쳤다. 


  "안녕, 거미보이. 멘토 속 엄청 썩이더니 그래도 이젠 옆에 잘 붙어있네."


  프라이데이에게서 간접적으로 들은 말인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자주 들을 말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이 복부를 가격하는 펀치처럼 느껴지지 않을 수는 없었다. 아무리 클린트가 악의 없이 한 말이라지만. 어색하게 웃으며 에드의 체향을 맡는 걸로 마음을 가다듬으려 하는 피터의 오른쪽 어깨에 묵직한 손이 얹어졌다. 무게감이 느껴지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피터의 어깨에 손을 올린 토니가 피터에게 흘긋 시선을 준 뒤 클린트를 바라보았다. 


  "헛소리 그만하고 내 멘티한테서 눈이랑 손 떼."

  "...와."


  클린트는 질린다는 표정을 실컷 지으며 토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싸고 돌아도 너무 싸고 도는데. 네가 이렇게 싸고 도니까 향간에 그런 소문이 돌잖아! 쟤 한창 활동할 때 별명이 뭐였는지 알아? 스타크의—"

  "스타크의 애완거미."


  컥. 피터는 먹고 있던 음식도 마시고 있던 음료수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말에 제 침에 혼자 사레가 들려 콜록댔다. 그 남사스러운—심지어 백 퍼센트 틀린 말은 아니라서 더더욱 그런—별명은 둘째치고 온아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문장을 끝낸 토니가 이미 진작에 그 별명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아서. 지금 그들의 관계에서 저렇게 대놓고 말해도 되는지는 둘째치고, 애초에 저런 민망한 별명이 돌아다녔는데 그걸 다 알면서도 한 번도 거론하지 않았단 말야? 그 모든 뜻을 담고 토니를 올려다봐도 태연한 무표정으로 클린트를 바라보는 토니의 옆모습은 묵묵부답이었다. 그 별명을 흔들림 없이 수용하는 걸 넘어서서 오히려 당당하게 먼저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 같아보이는 그 모습에 오히려 클린트가 당황할 정도였다.


  "뭐야, 알고 있었네?"

  "내가 누군데."

  "어쨌든, 내 요점은 작작 싸고 돌라는 거라고, 이 아저씨야."

  "왜, 달링, 질투 나? '스타크의 레골라스' 이런 거 시켜줄까? 아니면 '스타크의 참새' 쪽이 더 귀엽나?"

  "'호크'는 참새가 아니라—아니, 아니, 어쨌든!"


  클린트가 고개를 저으며 급히 정정하는 모습에 피터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품에 들린 에드가 피터를 올려다보더니 그의 기분에 동화된 듯, 따라서 파아 하는 소리를 내며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토니의 덫에 걸려버린 스스로의 모습에 진하게 실망하는 것 같던 클린트는 둘의 웃음소리가 들리자 피터와 에드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피터는 그의 시선이 부자에게 닿음과 동시에 그의 눈가가 눈에 띌 정도로 부드러워지는 광경을 목격했다. 클린트는 토니와 자신의 관계를 모르니 피터가 토니의 아들을 안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할 뿐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사이가 너무 좋아 보는 이마저 기분이 좋아지는 부자를 보는 것마냥 미소를 짓는 그 모습이 못내 어색하기도, 들킬까봐 두렵기도 한 피터가 시선을 살짝 내리깔 때쯤 클린트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정말 예의 상 묻지 않았던 건데."

  "누구 애냐고?"

  "뭐? 아니, 딱 봐도 네 애거든? 태평양 한 가운데에 동동 띄워놔도 지나가던 어부가 토니 스타크 집 앞으로 고이 데려다 놓을 것처럼 생겼다고. 그걸 말하려던 게 아니야."


  예의 상 묻지 않겠다는 말이 빈말은 아니었던지 클린트는 조금 뜸을 들이며 팔짱을 꼈다. 이마에 주름을 새기며 토니를 꿰뚫어보려는 듯 훑던 그는 정말 예의 바른 남자가 되려는지 잠시 뜸을 들였지만, 결국 호기심을 주체할 수 없겠다는 듯 질문을 내뱉었다. 


  "토니 스타크가 웬 아들—아니, 정확히 말하자면—토니 스타크가, 아들을 키울 수 있기는 해?"


  헉. 피터는 숨을 훅 들이키며 곁눈질로만 토니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니까, 저도 이걸 묻고 싶었던 건 맞는데요, 클린트. 문제는 아무리 묻고 싶었어도 질문의 무게 때문에 엄두조차 못 냈다는 거였다. 아이가 있고 그 아이가 토니와도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토니의 잠잠했던 반응이나, 물량 공세나, 어제의 그 알 수 없는 태도 등을 종합했을 때 피터의 예상보다는 토니가 이 모든 사실을 태연히 받아들이는 것 같았지만, 또 모르니까. 다시 토니의 눈치를 살피려 눈동자를 굴리던 피터는 토니의 두 헤이즐넛 동공과 딱 눈을 마주쳐버리고는 들이킨 숨을 내뱉지도 못한 채 뻣뻣하게 굳었다. 그 반응에 한쪽 눈썹을 살짝 꿈틀대던 토니는 손쉽게 클린트에게 시선을 돌려다.


  "키울 수 있을 것 같더라고."


  그리고... 피터는 그 말에는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고, 아예 휙 돌아가서 토니를 마주하는 제 고개는 더더욱 어쩔 수 없었다. 토니는 여전히 태연한 눈으로 클린트를 쳐다보고 있었다.


  "정말? 확실해? '그' 토니 스타크가?" 

  "'그' 토니 스타크 혼자 키우는 게 아니거든."

  그 말과 함께 토니는 피터의 눈을 마주했다. 온갖 감정이 뒤섞여 혼란스러워하던 피터의 눈을 읽어내리는 것 같던 그는 다시 평온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고는, 클린트가 결국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거라고 여겼는지 작게 인상을 쓰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클린트가 한숨을 한 번 푹 쉬며 다시 뒷머리를 한 번 긁어내린 뒤 극적인 선언을 하듯 손을 펼치고 말한 것도 그때였다.


  "좋아, 오늘 하루만. 둘 다 바쁘다니까 한 번만 내가 인심 써주지."

  "정말?"

  "정말요?"

  "뉴욕도 오랜만에 친절한 이웃이 필요할 거 아냐. 마음 바뀌기 전에 얼른 가는 게 좋을걸."


  토니와 피터가 동시에 묻자 그렇게 대답한 클린트는 말 그대로 썩 꺼지라는 듯 손을 가볍게 휘휘 내젓기까지 했다. 와, 정말— 클린트, 고마워요! 너무 죄송하고요! 근데 정말 고마워요! 하고 저도 주체할 수 없는 속도로 말해버리자 클린트는 그새 몇 년은 늙은 것 같은 피곤한 안색으로도 피터에게 웃으며 에드를 달라는 듯 팔을 뻗었다. 능숙하게 아이를 건네받는 그에게 에드를 조심스럽게 넘겨준 피터는 어리둥절해하는 자신의 아들에게 조금 허리를 숙이고 이마에 입을 맞춰주었다. 금방 다녀올게, 에드. 그렇게 말하면서 피터는 조심하지 않으면 그 다음에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말이 바로 튀어나와버릴 것만 같아 말을 아끼며 에드의 작은 손을 꼭 쥐고 놔주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입 밖으로 내지 못 한 말은 속으로만 중얼거리며. 아빠도, 오랜만에 좀, 같이 시간을 오래도록 보내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그래. 미안.

  

  "그럼 우리는 이제 슬슬 가야지?"


  피터가 허리를 펴며 고개를 돌아보니, 그가 에드에게 인사를 하고 있는 일련의 과정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던 듯 눈이 곧바로 마주친 토니는 피터를 보며 손을 뻗었다. 마치 알라딘이 양탄자를 타고 자스민에게 손을 뻗듯 부드럽고 우아한 움직임이었다. 두껍고 마디가 튀어나온 전형적인 엔지니어의 오른손인 그것을 순간 멍하니 지켜보던 피터가 정신을 차리려 눈에 힘을 줬다. 아무리 감격스러운 순간이어도 이렇게 어린 모습은 보여서는 안 되잖아, 이미 알라딘을 연상한 것부터가 토니한테는 한참 어리게 보일 거란 말이야.

  그래서 피터는, 영화 속의 자스민보다는 조금 더 힘차고 굳건하게, 어쩌면 조금은 지나치게 센 강도로, 토니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턱 올려놓았다. 짝 소리가 나게 올려진 손이 전혀 로맨틱하지 않다는 피터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고개 숙여 짧게 웃은 토니가 웃는 얼굴 그대로 피터를 마주했다. 일순간 피터는 토니의 그 얼굴이 아이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감출 필요 없는 기쁨을 그대로 표현하는 얼굴. 토니 스타크와 거의 모든 방면에서 정반대인 듯한 그 문장을 피터는 스스럼 없이 머릿속에 새겼다.


  "가자, kid."


  그리고 그 말과 함께 피터의 손을 잡은 채로 그 공간을 나서버리는 토니와 그를 졸졸 따라가는 피터의 뒤로, 클린트가 아주 작게 '저런 표정 하니까 몇 년은 어려보이네,'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피터의 유달리 예민한 귀에 들려왔다면, 피터가 아예 틀린 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진짜, 너무, 완전, 정말, AWESOME했어요!"


  저 형용사를 수식하는 단어가 대체 몇 개가 쓰인 걸까. 토니는 나른하게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오랜만에 뉴욕의 허공을 가르고 거미줄을 타게 된 피터는 그 오랜만이라는 단어가 무색하게도 완전한 베테랑처럼 능숙하게 거미줄에 제 몸을 맡기고 아크로바틱을 하듯 자유롭게 활강을 했다. 어느 정도로 능숙했냐면, 그저 피터의 패트롤을 지켜보는 멘토라는 명목으로 아이언맨 슈트를 입고 느릿하게 따라다니던 어느 순간에는 토니가 허공에 멈춰서서 그를 감상하기만 하게 될 정도로. 물 만난 물고기처럼 2년이라는 공백이 전혀 없던 것처럼 구는 피터의 움직임은 그만큼 2년 전처럼 정교했고, 그만큼 전부터 느꼈던 잘 짜여진 구성의 무용 공연을 보는 것 같다는 느낌을 토니로 하여금 되새기게 했다. 그렇게 여유로우면서도 위험할 정도로 가파른 움직임을 선보이는 그는 지나가는 행인이 스파이더맨! 하고 소리를 지르자 허공에서도 그 인사를 받아주기까지 했다. 연습은 필요 없다더니, 빈말은 아니었던 셈이었다. 

  첫 날부터 스파이더맨으로서 대단한 활약을 해낸 피터의 시야는 때때로 토니 자신의 그것보다 훨씬 넓고 광범위하게 느껴졌다. 그로서는 그저 누군가가 해결하겠지 하고 무심코 지나칠 만한 가벼운 소매치기나 자전거 도둑질같은 일은, 어느샌가 보이지 않는 피터를 찾느라 등을 돌려보면 스파이더맨이 해결하고 있었으니까. 그 애의 특기가 이런 일인 건 물론 베이비 모니터링 프로토콜을 봤으니 잘 알고 있었지만—2년동안 전부는 아니더라도 스파이더맨이 활약하는 웬만한 영상은 다 돌려봤으니 더더욱—그걸 실제로 눈 앞에서 보는 건 감회가 남달랐다. 그래서 토니는 피터를 터치하지 않고, 그가 그의 방식대로 뉴욕을 지키는 일을 옆에서 지켜보며 선선히 따라다니다, 스파이더맨이 결국 노을이 질 때쯤 별장의 옥상에 사뿐히 내려앉을 때 따라 가볍게 착륙했다. 토니가 내려오자마자 한 손에는 토네이도 모양의 긴 막대사탕을 쥐고 신나서 감상을 빠른 말투로 다다다다 말한 스파이더맨에게 토니는 슈트의 얼굴 아머를 간단히 해제한 뒤 피터에게 진정하라고 손짓했다. 


  "그만, 스파이더맨. 말하다가 호흡곤란 오겠어. 막대사탕은 또 어디서 난 거야?"

  "아, 이거요? 저 아까, 어떤 꼬마가 강아지 목줄을 놓쳐서 강아지가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걸 잡아줬더니 선물 받았어요!"


  피터의 목소리 역시 보낸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베이비 모니터 프로토콜에서 자주 봤던 그때처럼 높았다. 신나면 워낙 목소리가 주체할 줄 모르고 높아지는 타입인 건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이제 나름 스무 살이고, 내년이면 성인인 나이가 됐고, 그동안 고생을 많이 한 걸로 보여서 또 그렇지만은 않을 거라고도 생각했었다. 토니의 앞에서 이렇게 밝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은 것도 한 몫 했다. 

  다만 토니가 간과한 것은, 그 무엇도 피터 파커라는 인간의 본질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 언젠가 토니는, 아프가니스탄으로 끌려갔던 그 시점부터 변수 뿐이었던 자신의 인생에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상수가 피터라는 생각을 불현듯 한 적이 있었다.


  "정확히는 선물보다는 먹던 걸 건네준 거에 가깝지만—"

  "그럼, 그 꼬마 친구의 침이 덕지덕지 묻은 사탕을 기꺼이 먹겠다고?"

  "당연히 먹지는 않죠, 그래도 바로 버리기는 미안하잖아요... 사진 찍어서 WhatsApp 프로필 사진 할까요?"


  그 빠르게 지나간 생각이 지금 와서 완전히 맞는 말은 아니게 됐다고 해도, 피터 파커의 인간상, 즉 그의 전인격적인 모습이 바뀔 리는 없다는 것 정도는 이제는 확신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왜냐하면, 아무리 토니가 못 본 피터의 시간이 필요 이상으로 많아졌다고 해도, 길을 알려드린 할머니께 츄로스를 얻어먹은 사실이 매우 중요했던 15살의 피터 파커는 강아지를 구출해준 꼬마 아이의 먹다 남은 막대사탕을 건네받은 사실을 소중히 여기는 20살이 되었으니까. 

  정말 어떻게 저런 애가 실존하는 건지. 아니, 실존하는 건 둘째치고 어떻게 내 인생에 들어온 건지. 토니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인상을 구겼다. 이전에도 그런 생각을 했었지만, 물론 그랬지만, 한 번 그가 없는 인생을 경험해보고 나니 그 감회는 훨씬 더 둔탁한 무게감과 함께 다가왔다. 그 생각은 눈 앞에 놓인 피터가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토니가 새로 준 핸드폰 화면의 스크롤을 천천히 내리며 뭔가를 열심히 조작하다 고개를 들고 반짝이는 눈으로 다시 입을 열 때에 더 가중되었다.


  "아, 맞다, 토니, 핸드폰 정말 감사해요!"

  "별 거 아냐."

  "아니에요, 핸드폰만 주신 것도 아니고, 진짜 엄청 많이 주셨잖아요. 방 안에 한가득 쌓여 있을 정도로 많이요, 제 것만 주신 것도 아니고..."

  "프라이데이한테 그 나이대 아이가 쓸 만한 것들 중 제대로 된 것만 골라서 배달하라고 시켰을 뿐이라니까. 커맨드 한 마디면 됐었어."


  토니는 피터에게서 등을 돌리고 옥상의 끄트머리로 천천히 거닐었다. 피터에게는 의미 없이 서성이는 것처럼 보일 거였지만 사실은 꽤나 큰 내적 갈등을 겪는 중이었다. 피터에게 더 자신을 제대로 표현하고 숨김 없이 대하기로 마음 먹은 건 마음 먹은 건데, 또 이렇게 순수하게 고마움으로 빛나는 두 눈을 마주하며 솔직하게, 내가 네게 왜 이렇게 싸구려 로맨스 코미디에 나오는 것처럼 무식한 물량 공세를 펼치고 있는지를 설명하기에는 또 어딘지 낯간지러웠다. 이보다 더 낯간지러운 말을 그렇게도 많이 했는데, 괜히 이제 와서. 등 뒤에서 멈칫하면서 그 자리에 서있던 피터가 이내 종종거리며 토니의 뒤를 따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감사한 건 감사한 거예요."

  "그래, 뭐. 고맙다는데 내가 더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지."


  토니는 무의식적인 생각을 하며 옥상의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피터가 2년 전의 슈트를 입었기 때문에 자신도 새로 개발한 나노 슈트가 아닌 예전의 슈트를 꺼내 입었더니 움직일 때마다 나는 미세한 기계음과 무거운 바디가 영 적응이 안 되어 조금 둔한 움직임이었다. 역시나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토니가 앉았기 때문에 따라서 앉는 듯한 피터와 그의 손에 치즈버거만 하나씩 들려있었다면 그들의 첫 식사와 똑같은 수순이었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뉴욕의 노을 지는 하늘은, 마치 상공에서 빠져나가려는 빛의 마지막 가락이 오늘따라 유난히 두꺼운 구름 사이에 붙잡혀 갇힌 듯한 모습을 했다. 피터는 이제는 고마운 사항을 세아려나가듯 삼삼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둘의 대화가 평화롭게 도란도란 이어졌다.


  "간식 주신 것도 에드가 되게 좋아했고요."

  "다행이네, 프라이데이가 센스가 있긴 하지."

  "어제 가져가신 로봇 장난감도요."

  "곧 업그레이드해준다고 해."

  "아, 동화책도 좋아해요! 제가 어제 하나 읽어줬는데 엄청 좋아했어요."

  "뭘 읽어줬는데?"

  "'알렉산더와 끔찍하고 끔찍한, 좋지 않은, 아주 나쁜 날 (Alexander and the Terrible, Horrible, No good, Very Bad Day)'이요."


  뭐? 토니가 피터를 돌아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 나이대 애가 엄청 좋아하기에는 너무 부정적인 책 같은데 말이지. 처음부터 끝까지 알렉산더라는 아이의 불행으로만 가득 차 있는—물론 그 불행이라고 해 봐야 시리얼 박스에서 장난감이 나오지 않았다 정도지만—유명 동화를 읽고 좋아했다는, 그 날 때부터 비관을 좋아하는 사고가 누굴 닮았는지 딱 보이기도 했다. 이럴 때일 수록 그 아이의 다른 아빠가 피터라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터라면 특유의 쾌활함으로 아이를 분명 올곧게 인도할 테니까, 밝고, 건강하고, 무엇보다 외롭지 않게 자랄 수 있도록. 

  다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 흘끗 본, 누구보다 긍정적이어야 하는 피터는 토니의 예상대로 토니와 마주 키득대는 대신 조용히 손장난이나 치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토니가 피터의 어깨에 찬찬히 아머에 둘러싸인 손을 올렸다. 제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피터를 천천히 끌어와 더 가까이 당기자 피터는 다시 시선을 피했다.


  "Kid, 너 방금 에너지 레벨이 스폰지밥 수준에서 징징이 수준으로 급락했는데. 무슨 일이야?"

  "네? 아, 아니, 별 거 아니에요. 저 괜찮아요."

  "뉴 룰, 지금부터 내 앞에서 괜찮지 않을 때 괜찮다고 하는 건 금지야. 네가 괜찮지 않을 때가 언젠지 알 권리 정도는 내게 있다고 생각하거든."


  망할 마스크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도 않는 스파이더맨은 눈 조리개만 크게 당겨진 채로 토니를 마주할 뿐이었다. 들킬 정체도 없어서 아머 헬멧을 해제한 토니와 달리 스파이더맨은 시크릿 아이덴티티라는 게 있으니 벗으라고 할 수도 없고. 약간 굳은 목소리로 토니는 대신 그에게 다른 걸 종용했다. 생각하지마. 걱정하지마, 그냥 말해. 그 말을 들은 피터는 이윽고 다시 고개를 숙였지만 입을 열기는 했다.


  "그냥... 그 책에 학교에 가는 내용이 나오거든요. 에드가 학교가 뭐냐고 물었는데, 걔는.... 음, 토니는 모르실 수 있겠지만 에드는 Social Security Number (소셜 시큐리티 넘버, 미국의 주민등록번호)같은 건 없거든요. 그, 이런 말 하면 화내실 수도 있지만, 시민권자 등록도 안 되어 있어서, 음, 학교같은 건 못 갈 거라고 생각하니까..."

  "아, 그거였어?"


  고작 그렇게 스케일 작은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니. 토니는 티나지 않게 안도의 한숨을 쉬며 손을 거뒀다.


  "그런 일이라면 걱정 마."


  피터의 고개가 토니에게로 홱, 돌아갔다. 그를 올려다보기 위해 고개를 살짝 든 그의 마스크 위에 빗방울 하나가 톡, 떨어져 진한 색으로 퍼졌다. 곧 비가 오려나보다 하고 어렴풋이 생각한 토니는 원격으로 방수 기능을 켜주는 동시에 아머의 손목 부분을 여기저기 몇 번 두드렸다. 토니와 피터 사이에 작은 홀로그램 하나가 띄워졌다.


  "그 꼬마 SSN이라면 진작에 받아왔으니까. 따지고 보면 내가 받아온 건 아니지만, 아니, 따지고 보면 받아'온' 사람은 없지. 프라이데이한테 필요한 증빙서류를 넣으라고 했어."


  얼굴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알겠는 경지를 넘어, 마스크의 눈 조리개 사이즈만 봐도 대강 무슨 의식의 흐름을 지나고 있는지를 알겠다 싶었다. 처음에는 크게 띄워져있던 눈 조리개는 토니가 말을 잇자 조금 가늘어진 채였다. 이 와중에도 본인이 히어로라는 자각이 너무도 뚜렷해보이는 그 반응에 토니는 한숨을 쉬며 낮은 목소리를 냈다.


  "그래, 조작 좀 했어. 출생증명서를 비롯해서 병원 문서같은 걸 달라는데 있을 리가 없잖아. 왜, 위법 행위라고 신고할 거야?"

  "아뇨... 그건 아니지만... 아니에요. 이 부분은 제 잘못이니까 어쩔 수 없죠.... 토니도 공문서를 조작하기는 싫으셨을 텐데, 죄송해요."


  내가 널 위해서 그리고 너 때문에 저지른 '위법 행위'의 범위를 알면 그런 말은 못 할 텐데. 토니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걸 입 밖으로 내뱉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얘는 양친의 신원을 확인하는 공문서가 필요하다는 걸 모르는 거야, 아니면 그 정도의 프라이버시 침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거야? 토니 스타크로서는 드물게도 남의 사생활 인식을, 비록 몇 초에 그치는 부질없는 생각일지 몰라도 조금이나마 걱정해주던 토니는 피터의 사과를 듣고 있고 싶지는 않아 말을 돌렸다. 


  "어쨌든, 결론은, 소셜 시큐리티 넘버와 카드 모두 받았다고. 그 애의 첫 신분증인 셈이지. 넘버는 5##-##-####고—"

  "다시 말해주세요."


  피터로서는 드문, 단단하고 흔들리지 않으면서도 바로 나오는 즉답에 토니는 눈을 깜빡였다. 방금까지만 해도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더니. 


  "다시 말해보라고?"

  "네. 5##, 다음에 뭐였죠?"

  "##-####. 왜?"

  "그야... 본인 것도 못 외우시잖아요."


  몇 십 년동안 한 번도 외울 의지도, 노력도 없었으면서, 불과 며칠 전 받은 그 애, 아니 '우리'의 아들 건 어떻게 그렇게나 또렷히 외우고 있냐는 소리 없는 질문이었다.

  이제 빗줄기는 몇 방울이라고 표현하기는 힘든 보슬비 정도로 내리고 있었다. 둘 사이에 흐르는 정적은 말 그대로 조용한 고요보다는 빗소리와 함께 백색 소음같은 느낌을 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토니는 이 상황이 무엇을 암시하는지를 지금 상대하기보다는 나름 부드럽게 이 상황을 타개하기로 했다. 일단, 저걸 상대하기에는 아직 풀어내지 못한 실타래가 많았기도 하고.


  "그렇지. 뭐, 내 건 네가 외워주면 되니까, kid."


  둘 다 잠깐 잊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나름 데이트니까 로맨틱한 말이 필요하기도 하고.


  "아직 못 외웠는데..."

  "진짜 외우라는 건 아니었어. 알려준 적도 없는 걸로 기억하는데. 알고 있으면 스토킹이지."


  물론 난 네 걸 알고 있지만, 그건 다른 문제고. 이상한 부분에서 아쉬운 목소리를 내던 피터의 반응에 토니가 다시 미미한 웃음을 띄우고 말하자 피터 역시 불안한 듯 꼼질대던 손가락을 멈췄다. 그가 아마 웃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던 토니는 피터가 조심스럽게 한 손을 뻗어 그의 아머의 팔 부분에 손을 올리는 걸 그대로 지켜보았다. 이내 피터의 입에서는 정말 진심을 꾹꾹 눌러담은 목소리가 나왔다.


  "정말... 고마워요, 토니."


  네게서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내 기분이 얼마나 비이성적으로 한없이 차오르는지 너는 알까? 전 세계가 내 손으로 모두 들어오는 그 짜릿한 기분을?

  토니의 입 안이 말라왔다. 저 말에 태연하게 반응해야한다는 본능마저 조금의 공백을 두고 차오를 정도로, 저 흔하고 뻔한 말이 그를 자극했다. 고맙다는 말은 스쳐지나가듯 간편하게, 충분히 간단하게 할 수 있는 말인데, 아까 온 고맙다는 말은 다 그런 식으로 했으면서 저 애는 저 말 한 마디에 저렇게 온 마음을 실어야 하는 걸까.


  "이미 말했다시피, 별 거 아냐. 그래도 계속 말해봐, 내 에고(ego)에 굉장히 도움이 되는 중이니까. 내가 또 뭘 줬었지?"


  괜히 설레잖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니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뻔뻔하게 더 칭찬을 해보라고 하자 피터는 듣기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타닥, 타닥, 하는 소리를 내며 옥상 바닥에 부딪히는 비를 잔잔히 맞고 있던 그가 옥상 끄트머리 너머로 다리를 달랑였다. 토니는 아머를 움직이느라 나는 희미한 기계음과 함께 더 편한 자세로 고쳐 앉았다.


  "음... 제 것도 많이 주셨죠. 젤리 맛있게 먹었어요."

  "취향 한 번 여전하네."

  "옷도 주셨잖아요."

  "마음에 들어?"

  "물론이죠, 마음에 들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보나마나 엄청난 가격대일 텐데..."

  "그래도 마음에 안 들면 안 드는 거지. 프라이데이한테 버리라고 시켜."

  "마음에 든다니까요! 그리고 어떻게 그래요, 토니가 주신 건데, 저 안 그래도 예전에 토니가 선물해주신 옷 잃어버려서 엄청 죄책감 들었었단 말이에요..."


  그래? 내가 너한테 선물해준 옷이 한둘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거 하나 잃어버렸다고 그렇게 죄책감이 들었어? 하고 묻자, 피터는 결연하게 고개를 저었다. 정말 결연하다는 말이 걸맞을 정도로 굽히지 않겠다는 뜻이 확고한 움직임이었다. 


  "그건 진짜 잃어버리면 안 되는 옷이었어요."

  "왜?"

  "그야... 기억 안 나시는구나. 토니가 저한테 그 옷 보내주시면서 '네 생각이 나서 샀다'는 쪽지 한 장 넣어주셨잖아요, 저 그 날 그 쪽지 코팅할까 진지하게 고민했었단 말이에요."

  

  정말 딱 그 나이대 소년이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와 방법으로 감동했구나. 토니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머릿속을 뒤지고 있었다. 그런 기억이 있는 것 같기도 한데 딱히 선명하게 떠오르는 건 없었다. 


  "그게 왜 그렇게 중요했냐면, 그때가 제가 열 일곱 살이 되기 직전 즈음인데요. 그때 우리 둘 다 정말, 정말 바빠서, 연인... 치고는 아주 오랫동안 못 만났었던 것 같아요. 연락도 되게 뜸했고... 아, 그때가 아마 스*라토런치 사 인수합병 시기였을걸요?"


  아, 그래, 그거. 스타크 인더스트리가 항공 우주 산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 퀸젯보다 몸집이 큰 기기가 필요해져 시작했었지. 매우 까다로웠고, 실패 확률이 하도 높아서 CEO가 아닌 토니조차도 발로 뛰어야 했었다. 이렇게 세세히도 기억이 나는데, 왜 저 쪽은 두르뭉슬하게만, 그마저도 거의 형태도 없이 묽게만 기억이 나는지. 토니는 불안하게 미간을 좁혔다. 피터는 그런 토니가 아닌, 이제 거의 저물어 어두컴컴해지기 시작하는 허공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못 만나고 있고, 토니는 제 연락도 못 받으시고, 그러고 있다가 어느 날 선물처럼 그 옷이 왔거든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 나요, 분홍색이랑 보라색이랑 검은색이 다 섞인 체크무늬 셔츠. 연락은 여전히 못 받으셨지만."

  "...잠깐. 뭐라고?"

  "체크무늬요. 제 취향 맞추시려고 체크로 사주셨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나 보네요?"


  아니, 그게 아니야. 토니는 여상하게 웃으며 말하는 피터에게 무슨 말을 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세기를 더하는 빗줄기를 그저 가만히 맞으며, 토니는 그런 생각을 했다. 말도 안 돼. 그 옷은, 토니가 분명 불과 일 주일 여의 시간 전에 영상에서 보면서 '처음 보는 옷'이라고 생각했던 옷이 틀림 없었다. '피터의 취향 치고는 생각보다 괜찮다' 싶어서 놀라기까지 했는데, 그게 알고 보니 제가 직접 선물해준 옷이라는 것만큼 허무한 코미디가 어디 있을까. 하지만 페퍼와의 연애 때도 그랬던 기억이 나는 걸 보면 이건 피터 쪽에서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 분명 토니가 또 토니 스타크 식의 무신경함을 드러낸 케이스일 게 틀림 없었다. 토니는 신경질적으로 마른 세수를 했다. 피터가 놀라 조심스럽게 제 이름을 부르는 게 들렸지만 대꾸하지 않았다.

  젠장, 이제 와서 잘 해봤자 무슨 소용이야. 이제 와서 꼬마애 하나의 SSN 하나 외운다고 채워질 공백이 아니잖아.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마냥 감정이 빠르게 차갑게 식었다. 저 때도 무지막지하게 선물을 그렇게 주고 고맙다는 이야기를 그렇게 들었을 텐데도 다 잊어버린 걸 생각하면 저라는 인간은 애초에 글러먹은 건지도 몰랐다. 아무리 본투비 워커홀릭이라지만 이렇게 연애에 대한 기억이 적다는 건 분명 기억 저편으로 미뤄뒀다는 거고, 그러려면 연애 당시에도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걸 텐데. 심장이 기분 나쁜 둔탁함으로 박자를 더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보다도 피터의 익숙한 태도가 열이 받았다. 피터에게가 아니라 저 자신이 그토록 답답했던 거다. 사귀기 전에는 어이 없을 정도로 당당하게 저를 정말로 걱정했다면 제 옆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애가 저렇게 익숙하게 무시를 말하기까지, 저 애는 얼마나 마음 고생을 했을까. 그때 겪은 마음 고생을 저 애는 잊을 수 있기야 할까? 


  "토니? ...괜찮으세요?"

  

  넌 답장이 없는 내게 연락을 그토록이나 많이 넣었을 거고, 그 진심이 꽉꽉 담긴 고맙다는 인사를 난 몇 번이고 못 받았을 거고, 넌 그 옷을 입고 답장이 없는 핸드폰을 내려다보면서도 내 망할 간 따위가 걱정이 되어서 망할 <피터 파커 금주 프로토콜>을 만들었고. 그걸 다 하면서 네가 무의식적으로라도 이미 지쳐있지 않을 수가 있기는 한가? 


  "너야말로 괜찮아?"

  "뭐가요?"

  "연락이 한참 안 된 것도 하루이틀이 아니었잖아. 그리고 너한테 그렇게 중요한 걸 난 기억도 못 하고. 내가 기억 못 하는 것도 아무렇지 않아, 넌? 애초에 그래서..."


  아니, 떠난 이유를 지레짐작하지는 말기로 했었지. 거의 소나기 수준이 되는 빗소리에 자연스럽게 말끝이 섞여들어가도록 흐린 토니가 피터를 보았다. 눈에 힘이 들어가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는데 피터는 저를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하다, 토니가 말을 하지 않을 걸 감지했는지 작게 아, 하는 탄식과 함께 입을 열었다.


  "저는 괜찮아요, 토니. 항상 괜찮았어요."

  "뭐가 괜찮아, 내가 방금— 넌 항상— 젠장. 괜찮지 않으면 말을 해달라고 했잖아."

  "토니, 왜 갑자기— 저는 이해했다니까, 왜 그러세요?"


  드디어 피터가 토니에게로 온 몸을 돌리고 언성을 높이는 것에 토니는 우습게도 조금은 진정했다. 계속 가만히 앉아서 나는 당신을 모두 포용했다고만 했다면 미쳐버릴 지경이었는데, 그래도 다행히 피터 파커는 언제나 할 말은 꼬박꼬박 하는 성격이었다는 게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비록 그 '할 말'이 점점 가파르게 올라가는 언성과 약간의 짜증을 동반했다고 해도. 피터가 무조건적으로 수긍하기만 하는 수동적인 사람이었다면 지금쯤 진부함에 버무려진 죄책감에 질식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피터는 자신의 포용 범위가 이미 일반인의 수준을 넘어섰다는 걸 자각하지 못 한다는 거였다. 


  "그렇게 중요한 일도 아니었잖아요, 그냥 옷이잖아요, 제가 괜찮았는데, 토니가 왜—"

  "아니, 너 안 괜찮았어! 그 일만 얘기하는 게 아니라, 우리 연애하면서 네가 나 때문에 힘들었던 모든 순간을 말하는 거잖아, 지금. 차라리 말을 하라고, 내가 만든 인공지능 따위에나 말하지 말고, 나한테 말야."

  "제가 캐런이랑 말한 건 또 어떻게— 아니, 연애 상담도 못 해요? 그리고, 그리고, 제가 익숙했고 또 참았다는데 왜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세요? 방금까지 분위기 차분하고 좋았는데, 전 토니가 에드의 SSN 외운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했는데!"

  "그게 문제라고, 차분하고 좋은 분위기의 전제가 네가 내 단점에 익숙해지고 또 그걸 감내해야 한다는 사실이!" 


  그 말에 피터는 허, 하고 헛웃음을 치며 마스크를 벗어던지려는 듯 마스크의 아랫부분에 손을 얹었다. 비록 그 다음 순간 바로 정신을 차린 듯이 손을 내렸지만. 토니는 신경질적으로 비에 젖어 달라붙은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적반하장하고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토니는 스멀스멀 차오르는 두려움과 불안함에 정신을 놓아버릴 지경이었다. 


  "이것 보세요, 또 제가 무슨— 천사라도 된 것처럼— 토니가 제 단점을 참은 것처럼 저도 그런 것 뿐이에요. 그게 다예요! 우리 둘 다 서로에게 쓸 수 있는 시간이 한정된 거 알고 있었잖아요. 그 시간에 서로의 단점으로 싸우는 게 생산적이라고 하지는 않으시겠죠."

  "아, 생산성을 따지려고? 연애에서 생산성을 따지려면 '대화'가 기본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지금 내가 이렇게 화내는 건 널 위해서가 아니라고, 날 위해서야. 네가 괜찮아도 내가 안 괜찮다고. 우리가 다시 그런 식으로 연애하면서 바뀐 게 전혀 없어진다면 넌, 다시 그 때처럼—"


  이 다음에 나올 말은 하면 안돼. 아무리 두려워도 이 말은 하면 안 될 것 같은데, 하지만 토니는 원래부터 이미 반쯤 나온 말실수를 주워담는 데에는 남들보다도 더더욱 소질이 없었다.


  "—달아나기나 할 테니까."


  이미 반쯤은 그 전 말에 할 대꾸를 준비해둔 것 같았던 피터는 토니의 문장의 끝맺음을 듣고 할 말을 잃은 듯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토니의 머릿속은 또 실수를 한 것 같다는 경보음과 계속 잠재워뒀던 두려움이 드디어 터져나왔다는 해방감이 지저분하게 뒤섞여 난잡했다. 피터로부터 고개를 돌린 토니가 빗줄기를 핑계로 아머의 헬멧 해제를 풀고 다시 헬멧을 머리에 썼다. 차갑고 건조한 헬멧 안에서 프라이데이의 목소리가 걱정스럽게 흘러나왔다.


  [보스, 불안 증세를 보이고 계세요. 심박수가 상승했고 비를 맞고 계신데도 불구하고 땀이 나셨어요.]


  딱히 놀랍지도 않았고, 그 말에 대꾸를 했다가는 피터도 들을 터여서 토니는 고개를 살짝 저음으로서만 프라이데이의 말을 무시했다. 그는 대신 비를 피해야겠다는 식으로 말을 하며 먼저 일어섰다. 여전히 가만히 앉아있던 피터는 토니가 일으켜주기 위해 손을 내밀자 그 손을 빤히 쳐다보더니 말없이 손을 잡고 일어났다. 그래도 손을 잡긴 했다는 사실에 안정감을 느끼던 토니는 피터의 손으로부터 제 손을 빼려다 그가 자신의 아머 낀 손을 꽉 잡고 놔주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Kid?"

  "...그 이유에 토니가 바쁘셨던 게 아예 없다고 하지는 않을게요. 하지만 그건 제가 감수했어야 할 부분이었어요. 그러니까, 제 말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는 소리예요."


  피터의 조용한 음성. 토니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거다. 지금 이 순간이다. 지금, 피터는 제게 자신이 도망쳤던 이유를 말해주려고 하는 거다. 편안한 실내를 목전에 두고 소나기가 강렬하게 그들의 몸을 적시는 이 때에. 지금이 바로 그토록 오래 미뤄왔던 2차전이었다. 아니, 이미 2차전의 중반으로 와있던 걸지도 몰랐다.


  "들어가서 하지."


  토니는 저도 모르게 발을 뺐다. 하지만 피터는 고개를 저었다. 토니는 마음만 먹으면 아무리 메타휴먼일지라도 아머를 입은 자신의 힘이 더 세니 손을 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리에 붙박혀 있었다.


  "아뇨, 여기서요. 얼굴 보고 할 자신이 없어요."

  "그럼 들어가서 슈트 입고 해."

  "싫어요. 지금이 딱 좋아요. 비가 세게 내려서... 감각이 일반인 정도가 된 것 같단 말이에요."


  보고 듣기가 무섭다는 소린데, 그 말에 제가 무슨 할 말이 있을까. 토니는 결국 그의 말에, 터질 듯이 뛰는 심장에도 불구하고 침착한 척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옥상 바닥에 떨어져 흩어지는 소나기가 거세게 그들을 감싸안아, 정말 그들 뿐인 그 공간에서, 피터는 천천히 슈트의 거미줄 용액을 넣어놓는 곳으로 손을 뻗었다. 때아닌 거미줄 용액을 꺼내는 데에 의아함을 느끼기도 전에 토니는 그 공간 중 하나에는 용액 병 대신 작게 말린 종이가 있다는 걸 알아챘다. 젖지 않게 하려는듯 두 손으로 종이를 말아쥔 피터가 다시 토니를 올려다봤다. 스파이더맨의 흰 눈과 아이언맨의 푸르게 빛나는 눈이 서로를 마주했다. 


  "토니는 항상 제게 책임감을 논하셨어요. 무작정 뛰어드는 제게 책임감이 없다고 하셨었던 거, 기억 나세요?"

  "안 날리가 없지."

  "아무래도 그렇겠죠... 그래도 이건 기억 안 나실 거예요."


  무슨 말인지 듣기도 전에 이미 제가 다른 일에 신경을 쏟느라 그 '무언가'를 기억하지 못 할 거라는 건 확연했다. 피터의 작은 손이 토니의 아머 낀 단단한 손에 종이를 쥐어주고 조심스럽게 떨어졌다. 토니는 종이를 펼쳐보자마자 종이가 세찬 비에 거의 녹아들어가는 것을 목격했지만, 그 전에 그 종이 위의 내용을 확인하는 게 먼저였다. 누군가 펜으로 꾹꾹 눌러쓴 것처럼 글씨가 굵고, 엉성했지만 반듯했다. 


Massachusetts Department of Children & Families (DCF)

매서츄세츠 가정과 아이 부서

Child-at-Risk Hotline 800-792-52*0

위기 아동 발견 시 연락 주세요 800-792-52*0


  "토니가, 음, 제게 만약 애를 낳으면 CPS에 맡기라고 하신 적이 있었어요."


  피터의 목소리는 조곤조곤하고 낮았지만 떨리고 있었다. 토니는 이제 흔적도 남지 않은 채 녹아내려간 종이를 보고 머릿속이 하얗게 표백된 상태로 멍하니 그의 말을 들었다. 손은 여전히 어정쩡하게 종이를 든 그 자세 그대로였다. 


  "비유였어요. 제가 책임감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하실 때 하셨거든요. 토니는 제가 책임지지 못 할 일이라면 처음부터 책임 지지 않고 더 능력 있는 사람에게 일을 넘기는 게 진정한 책임감이었다는 소리를 하고 싶으셨던 거예요."

  "......"

  "우리 둘 다 그때는 정말 애가 생길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까요."


  그래. 토니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거친 목소리로 피터의 말에 동의했다. 그래, 그게 전부야. 내가 정말 애가 생길 줄 안 게 아니잖아. 그건 그저 책임감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선배 히어로로서 후배 히어로에게 책임감을 알려주기 위해....


  "하지만 정말 애가 생겼을 때는, 우리는 아직도 그때 그 일로 정전 상태여서, 토니의 그 말이 맴돌 수밖에 없었어요."


  네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 받기 위해...


  "그러니까, 저는요... 토니에게 말을 한다면 토니가 이 애를 당장 CPS에 데려다 놓을 거라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저는, 저는... 여러가지 의미로, 억울했던 것 같아요. 만약 그 소리를 듣는다면 저는 따라야 할 테고, 근데 그건 제가 생각하는 책임감과 아예 어긋나는 행동이니까요.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어요."

  "......"

  "저는 지금도 여전히... 제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해도, 누군가를 부르는 게 더 현명한 일이라고 해도, 제 앞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꼭 뛰어들 거예요. 죽는 한이 있어도."


  토니가 그 말에 주먹을 꽉 쥐느라 아머에서 위잉 하는 기계음 소리가 났다. 피터의 시선이 토니의 꽉 쥔 주먹으로 튀었다가 다시 고요하게 토니를 마주했다. 토니는 이를 악다문 채로, 피터에게는 보이지도 않을 걸 알면서도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분노 따위의 감정이 아닌 온갖 것의 혼합물로 얼룩진 눈빛이었다. 그는 이런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는 영 능숙하지가 않았다. 다만 피터의 입에서 나오는 '죽음'에 자신의 면역력은, 그때도 지금도 전무할 것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방수 처리가 된 스파이더맨 마스크 위로 빗방울이 굴러떨어졌다. 금-티타늄 합금의 제 마스크에도 물이 맺혀있을 터였다. 이미 타격감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피터의 말은 이어졌다.


  "그렇다고 그걸 말하면, 저는 토니에게는 '애'일 뿐일 테니까, 적어도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결국 토니 뜻대로 됐겠고, 그럼 저는 그 죄책감을 안고 살아야 하겠죠. 그게 제 책임감이니까. 그리고 저는... 무엇보다도... "


  피터의 손은 서서히 올라가며 단 한 순간만 망설이는 듯 하더니 이내 스스럼 없이 마스크를 벗었다. 토니의 반쯤 올라갔던 손이 막을 새도 없이 빠른 손놀림이었다. 피터의 손에 마스크가 힘없이 벗겨짐과 동시에 드러난 피터의 얼굴은 세찬 빗줄기에 재빨리 젖어들어갔다. 어차피 어둡기도 하고 바로 앞에 놓인 물체가 아니면 잘 보이지도 않는 빗줄기 때문에 파파라치가 있다고 쳐도 피터의 얼굴은 보이지 않을 것이었지만, 토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터를 그 존재할 지도 모르는 파파라치들로부터, 이 거세게 내리는 빗방울로부터, 아예 토니 자신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다시 그 마스크를 씌워주고 싶었다. 그러나 피터는 언제나 그랬듯 절박하고 축축하게 젖어있으면서도 누구보다 맹랑한 눈동자를 지니고 있는 굳건한 아이였다.


  "토니에게서 우리의 애를 남에게 넘기라는 말을 들으면, 제가 무너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피터의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토니를 마주하고 있었다. 토니는 소년이 마주할 푸르고 단단하게 빛나는 아머의 눈 뒤에 숨은 제 사정 없이 흔들리는 눈동자를 상상했다. 지금 제 얼굴을 본다면 피터는 저렇게 침착하게 말할 수 없겠지. 아니, 실내에서 슈트를 입고 얘기한다고 쳐도 피터는 그 예민한 감각으로 토니 거칠어진 숨소리를 듣고 금세 눈꼬리를 축 내렸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피터는 빗소리에 파묻힌 토니의 불안 증세를 듣지 못 한 채 결국, 차분하게 가라앉은 두 눈으로, 마지막 한 방을 날려버렸다.


  "저는 토니를 사랑했으니까요."


  그때도 지금도 피터에게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토니는 그 말에 대답을 하기 위해 입을 열고 실제로 음성까지 냈지만, 나온 소리는 앓는 소리에 가까웠다. 입가에 올리는 단어조차도 형편없이 조각조각이 난 채여서, 토니는 한 순간 동안은 아머 새로 흘러나올 제 음성에 기계음이 50퍼센트만 더 섞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 이 갈라지는 목소리를 막을 수 있을 텐데.


  "왜... 그렇게 생각했어?"

  

  피터는 마치 토니가 아무 말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세찬 빗줄기에 인상을 찌푸렸다. 토니는 피터의 이마에 축축하게 달라붙은 앞머리를 쓸어넘긴 뒤 손을 이마에 대어 눈에 비가 들어오지 않도록 가려주었다. 유일하게 다행인 점은 나노슈트가 아닌 두꺼운 철제 슈트를 꺼내입은 탓에 그의 손의 미약한 진동이 피터에게는 닿지 않을 것이란 사실이었다.


  "내 말은, 왜, 네가 아이를 데려왔을 때 내가 바로 CPS로 보내라고 할 거라고 생각했냐고."

  "그야—"

  "그건 비유일 뿐이었을 텐데. 너도 잘 알고 있었다며."

  "......"

  "내가 실제로 우리 사이의 아이를 봤을 때는 다른 반응이 나올 거라는 선택지는, 왜, 고려하지 않은 거야?"


  하지만 피터는 오히려 의아한 눈을 하고, 토니가 막아준 덕에 비로부터 보호 받는 두 눈망울을 크게 뜰 뿐이었다.


  "제가 왜 다른 반응이 나올 거라는 생각을 해요?"

  "왜냐니, 당연히—"


  사랑하니까. 간단한 대답이었다. 토니 스타크가 피터 파커를 사랑한다는 게 피터의 그 치밀한 알고리즘에 변수로 작용할 수 있는 유일한 요소였다. 나 역시 너를 사랑하니까 막상 애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으면 다른 걸 제치고, 네가 생각한 대로 너와 나의 연결고리가 될 수 있는 그 아이를 처음부터 사랑해줄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토니는 그 잘 짜여진 대답조차 하지 못 했다. 알고 있었으니까.


  "...넌 내가 널 사랑한다고 확신할 수 없었던 거겠지."


  그래, 애초에 처음부터 끝까지 문제는 이것이었다. 토니는 바빴고, 피터 파커를 애 취급 했고, 책임감을 운운하다가 CPS에 애를 맡기라는 소리마저 해버렸고... 어리던 열 여덟 살의 피터 파커는, 토니 스타크의 애정에 목말랐던 피터 파커는 눈 먼 패닉 속에서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본인과 아이가, 그러니까 그의 생각에 토니와의 가장 확실한 연결고리가 가장 온전할 수 있는 방법을 택했던 거였다.

  토니 스타크는 약속 따위를 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약속을 막상 한다고 해도 지킨 약속보다 깬 약속이 훨씬 더 많았다. 8시 반에 예약한 레스토랑을 취소했고, 뉴욕의 별장에서 함께 보내기로 한 밤을 이탈리아 호텔에서 혼자 보내야 했던 날도 많았다. 그리고 아이를 가진 열 여덟 살의 고등학생은 그 무엇보다도 약속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었을 거다. 문제는 하필 그 열 여덟 살의 고등학생이 피터 파커라는 인물이어서 토니 스타크가 그런 남자가 될 때까지 기다리기보다는 스스로가 그런 약속이 필요 없는 사람이 되어서 달아나 버린 거고.

  

  "그건 토니 잘못이 아니에요."


  토니는 다시 피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토니가 제일 싫어하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그 눈빛. 토니의 경험 상 저런 눈빛은 늘 약간의 체념을 동반했다. 체념이라니, 피터 파커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처음부터 토니와 저는 속도가 같을 수 없을 거였으니까요. 토니가 저를 안 시간보다 제가 토니를 안 시간이 10년이 더 되잖아요?"


  솔직히, 토니가 지금으로부터 저를 사랑하는 데에 5년이 더 걸린다고 하셔도 빠른 거예요. 우스갯소리랍시고 그렇게 가볍게 덧붙인 피터의 얼굴에 잠깐 스쳤던 웃음기는 빠르게 가셨다. 그 자리에 금세 도로 떠오른 긴장감과 함께 피터는 말했다. 그냥, 제가 묻고 싶은 건 단 한 가지예요.


  "토니... 저는요. 아까부터 말했듯이 토니가 생각하는 책임감과는 조금 다른 책임감을 지니고 살고 있어요. 이건 피터 파커이기 이전에 스파이더맨으로서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이에요. 그러니까, 토니는 생각할 틈이 없었던 걸 감안하면 이건 좀 반칙이지만, 제가 2년동안 열심히 책임감에 대해 생각해본 결과, 아이언맨과 스파이더맨은 조금 다른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전 제가 생각하는 책임감을 양보할 수 없어요."

  "...그래, 스파이더맨."

  "그게... 스파이더맨으로서 전하는 제 생각이고요."


  철퍽. 피터가 토니에게로 한 발짝 다가오자 빗물이 고인 바닥은 그의 발자취를 질척한 소리와 함께 반겼다. 


  "피터 파커로서의 제가 묻고 싶은 게 따로 있는데요."


  피터가 토니의 아머 낀 손을 들춰올렸다. 더이상 자취조차 남아있지 않은 종이가 들려있던 손이었다.


  "저 토니 말 잘 따랐거든요. 저 진짜 열심히 그 종이 들고 다녔거든요? 저, 제가 혹시, 혹시 모르니까, 조금이라도 제게 빈틈이 보이면, 저 바로 제가 살던 섬이 속한 주의 아동 보호 서비스에 전화 걸 준비 해놓고 한 시도 제 몸에서 그 종이 떼놓지 않았어요... 혹시 제가 틀렸을까봐, 혹시 토니의 방식이 필요할까봐, 혹시 모르니까, 어느 순간 갑자기 제가 통제할 수 없어질까봐 토니가 말한 대로 다 할 준비 다 해놨거든요."

  "......"

  "그러면— 이 정도면—"


  결국 피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꾸준히 유지되던 침착한 외양에 금이 가는 듯 하더니, 스위치 하나를 뒤집듯 침착하고 차분한 피터 파커로부터 토니가 잘 아는, 감정을 제어하는 능력이 부족한 피터 파커로 돌아오는 건 한 순간이었다. 피터는 입을 꾹 다물었지만 차마 막지 못 한 울먹이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저... 그럼 저... 꽤 괜찮게 키운 거 맞죠, 스타크 씨? 스타크 씨 기준으로도, 저 최선을 다하지 않았나요?"


  피터는 불안할 때 극존칭을 쓰는 버릇이 있었다. 언젠가 불안함이 극도로 치달았을 때는 토니를 꽉 껴안고 그를 sir이라고 부르며 엉엉 운 적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지금 피터가 '토니'가 아닌 '스타크 씨'로 토니를 부른다는 건 그가 미친 듯이 불안하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저 충분히 책임감 있었던 거... 맞죠?"


  피터. 그 누구보다도 견고한 신념의 소유자인 피터, 그리고 동시에 그 신념을 꺾지 않으면서도 토니의 범위를 벗어나고 싶지 않았던 피터. 토니는 피터의 얼굴을 보호하던 오른손이 아닌 왼손으로 피터의 허리를 감고 끌어당겼다. 허리에 닿는 차가운 금속에 움찔하던 피터는 곧 토니의 얼굴을 더 가까운 거리에서 순순히 올려다보았다. 토니는 제 얼굴이 얼마나 복잡한지, 제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에 얼마나 과도한 힘이 실려 떨리고 있는지, 그 모든 걸 알고 있었다.


  "피터, 너는."

  "......"

  "너는... 대단한 사람이야."


  피터가 숨을 들이쉰 채로 내뱉지 않고 참는 게 보였다. 토니가 피터가 자신에게 이유를 알려주기를 기다렸듯 피터 역시 이 순간을 기다리며 내내 긴장했을 것이 뻔했다. 그래서 토니는 자신이 느끼고 있는 불안함을 그만큼 여실히 느끼고 있을 피터를 위해, 그가 자신만큼 그 때문에 스스로를 좀먹지 않게 하기 위해 그를 더 단단하게 고쳐잡고 고개를 숙여 눈높이를 마주했다. 


  "네 말이 맞아. 넌 훌륭했고, 기대 이상이었어."

  "......"

  "나보다 훨씬 뛰어났지."


  눈에 눈물이 고인 채로 토니를 응시하던 피터가 헛웃음과도 같은 소리를 내며 제 이마께에 얹어져 있던 토니의 아머 낀 손을 두 손으로 잡았다. 서서히 그 손을 내린 피터가 토니의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며 젖은 소리를 냈다. 조금씩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는 그것을 필사적으로 참는 피터 탓에 간헐적인 신음과도 같은 음성이었다. 토니가 피터의 얼굴로부터 손을 치우자 피터는 맥없이 그의 손을 놓고 제 눈물과 비로 함께 젖은 얼굴을 토니 앞에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토니는 그 발개진 눈과 온통 젖은 그의 볼을 견딜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눈을 떼지 않았다. 피터가 미약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 웃는 얼굴을 보며 토니는 돌이킬 수 없는 하나의 결심을 했다.


  "그 말을 듣고 싶었어요. 그거면 됐어요, 저는 이제. 토니에게 충분히 잘 해왔다는 소리를 들었으니까 저는—"

  "사랑해."


  피터의 두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대로 커짐과 동시에 토니는 강력한 추진력의 엔진으로 날아오르듯 한 폭발적이고 요란한 성취감을 느꼈다. 토니와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서 입 안이 먹으면 안 되는 걸 삼켜버린 것처럼 까끌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 수 있었다. 잔뜩 어긋났던 퍼즐을 모두 바르게 고친 것처럼, 이 순간은 딱 맞아떨어지는 정답이라는 것을. 이게 정답이었다. 이게 그들이 그렇게나 오래 보류해둔 그들의 순간이었다.


  "늦어서 미안해. 아니, 미안한 걸로 따지면 그것만 미안한 게 아니지."

  "토니—무슨—...진심이세요?"

  "진작 말했어야 했는데, 네가 내게 지치기 전에. 하지만.... 지난 일을 후회하려면 나같은 사람은 평생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못 하고 딱 후회만 해야 하거든. 우리에게 그럴 만한 시간은 없잖아?"


  과거보다는 미래를 봐도 될까? 넌 그걸 허락해줄까? 너의 미래를 나와 기꺼이 공유해줄까? 

  토니의 심장은 그 모든 의문들로 뛰고 있었지만, 그 동시에, 사실 토니는 꽤 약아빠진 부분이 있어서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을 모두 알고 있었다. 이런 순간에서 으레 가질 만한 자신감이 아니었지만.


  "그리고, 너도 나를 사랑하잖아."


  그건 의문형이 아니었다. 피터 역시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 것으로 그 말에 말없이 긍정했다. 들켰다고 놀라는 기색도 없었다. 여전히 울먹이며 눈물을 참으려 애쓰고 있기는 했지만.


  "너를 달아나게 한 그 사람은 결함 투성이었어. 아니, 사실 지금도 결함 투성이지. 대중이 알고 있는 그 길고 긴 목록을 제외해도, 바빠서 주변인들을 못 챙기지를 않나, 하지 말라는 걸 계속 하지를 않나, 아주 만신창이가 따로 없어."

  "......"

  "그리고, 그래서, 지금부터 내가 할 말이 얼마나 염치 없는지는 나도 잘 알고 있는데."

  "......"

  "어쩌면 네가 또 떠나는 게 미치도록 무서워서 아무 말이나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는데,"


  피터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토니의 표정은 여전히 피터로서는 가늠하기 어려웠겠지만, 동시에 그의 표정이 진중함에 가깝지 부정적인 선은 단 한 줄도 없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을 것 같았다. 피터는 그런 걸 말없이 알아주는 사람이었다.


  "나를 기다려줘, 피터."


  '기다려줘'. 피터가 그 말을 조용하게 입모양으로만 따라했다. 실감이 나지 않는 얼굴이었다.


  "나는 여전히 겁이 많아서, 너 뿐만이 아니라 모든 걸 재고, 고려하느라 바빠. 그래서 널 위해 모든 걸 걸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할 수가 없어."

  "그렇...죠."

  "너는 토니 스타크를 만난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날 감당해야 했고, 그 모든 게 이 사태를 낳았고.... 그러니까 내 말은, 젠장, 내 말은, 네가 그 때처럼 나를 감내할 필요가 없게, 나는 많이 노력할 테니까,"


  토니가 피터를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차가운 아머 위로 피터의 상체가 겹쳐졌다. 토니는 이 작은 아이가 지금 제 품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믿겨지지 않는다는 감상을 다시 짓이기듯 머릿속에 넣었다. 어떻게 이렇게 선함으로만 빚어진 것 같은 사람이 제게로 와주었는지, 아무도 이해하고 포용할 수 없었던 토니를 포용했는지, 그런 생각들이 돌림노래를 부르듯 다시 머릿속에서 깜빡거리며 나왔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토니가 비에 축축히 젖은 피터의 머리칼에 입을 맞췄다.


  "널 위해서라면 내 모든 걸 걸 수 있다는, 감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소리는 내가 아직은 할 수 없지만.... 할 수 있게 될 그 날까지."

  "......"

  "뉴욕 타임스가 나를 도청했다가 그 말을 듣고 토니 스타크가 드디어 돌아버렸다고 기사를 낼 수 있을 그 날까지."


  피터가 그 말에 울음 섞인 웃음을 낮게 터뜨리는 목소리가 토니의 심장을 달랬다. 피터가 제 말에 웃고 있다는 건 벌써 선방한 셈이었으니까. 울다가 웃느라 딸꾹질 소리를 내듯 숨을 몇 번 급히 들이쉬기도 한 피터는 토니가 다시 입을 열자 그의 입에서 나오는 단 한 글자도 놓치기 싫다는 듯 와중에 눈을 부릅 떴다.


  "나를 기다려줘. 내 모든 걸 기다려줘. 부탁할게."

  "네..."

  "...내가 늦는 저녁 약속 빼고. 그럴 땐 가차 없이 가버리는 거야."


  그런 일에는 더이상 널 기다리게 하지 않을 거니까. 진심이야, 웃지 마. 나름대로 진지한 목소리를 내봤지만 얼굴에 떠오르는 미소는 참을 수 없던 토니가 역시나 고개를 숙이고 웃고 있는 피터의 턱을 슬며시 들었다. 얼굴에 한가득 웃음을 담고 있던 피터는 토니의 손에 마주친 눈을 피하지 않고 또렷히 쳐다보았다. 토니는 그 두 눈에 담긴 지난 이 년을 훑었다. 내가 놓친 너의 시간동안 너는 이렇게나 자라버렸구나. 아직은 에드라고 불리는 그 작은 아이의 빠른 시간보다도 피터의 훨씬 더 느렸을 그 이 년이 훨씬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네 눈에 이런 빛이 띌 때까지 너를 한 번도 보지도, 안지도, 함께 입 맞추지도 못 했다니.


  그래서 토니는 조금의 조급함과 매우 큰 갈증으로, 피터의 허리를 양 손으로 꽉 안고 그토록이나 오래 기다려왔던 입맞춤을 했다. 조금 놀라는 듯 움찔하던 피터의 허리가 토니의 아머 낀 손의 센서에 감겨오고, 조금 주춤하던 피터의 팔은 그를 거세게 몰아붙이는 토니 탓에 허우적거리다가 그의 목에 급하게 둘러져왔다. 피터의 젖은 입술이 제 입술에 맞닿아온 순간부터 몸 속에 치솟다 못해 그의 몸을 잠식하던 아드레날린은 토니로 하여금 몇 년은 젊어진 기분을 느끼게 했다. 너무도 오랜만에 입에 침입한 토니의 혀에 뻣뻣하고 조심스럽게, 마치 토니가 다치게 하기 싫다고 생각하나 싶을 정도로 천천히 움직이는 피터의 혀를 건드리고 헤집던 토니는 이내 조급한 낮은 신음을 내고 손을 들어올려 아머를 해제했다. 갑자기 그에게 쏟아지다시피 한 피터의 몸이 놀라 토니의 목을 더욱 꽉 안아왔다.


  "쓸데없는 생각하지마."


  다시 아머가 닫히도록 손짓한 토니가 피터와 자신의 몸을 돌려 피터를 닫힌 아머의 앞부분에 기대게 하고는 입맞춤을 이어갔다. 토니가 아머로부터 빠져나오는 순간부터 그 자리에 고정되도록 설계되어 있는 아머와 자신 사이에 완전히 가둬진 피터가 자신이 기댄 딱딱한 벽이 무엇인지를 간파하기도 전에 토니의 입술이 성급하게 닿았다. 그리고 피터가 낮은 신음을 내는 순간부터 토니는, 그가 드디어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토니에게만 집중하기 시작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에게 어울려오는 입술과 혀의 움직임, 그 테크닉 하나하나가 모두 제가 몇 년 전 가르쳐준 그대로라는 걸 발견한 토니는 그 사실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큰 희열을 느꼈다. 네가 아는 모든 걸 내가 가르쳐줬구나. 그 자각이 그 무엇보다도 제 소유욕을 만족시켜준다는 걸 부정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몸이 납작하게 눌린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거세게 키스를 하고 키스를 받던 피터가 토니의 가슴팍을 급하게 밀었다. 힘이 하나도 담기지 않은 손에도 불구하고 순순히 밀려나준 토니가 한 손으로 피터의 뒷목을 쓸며 피터의 눈을 진하게 맞췄다. 피터가 숨이 차서 밀어낸 거라면 아주 조금의 텀만 주고 다시 그를 몰아붙일 생각이었다. 토니는 그 정도로 마음이 급했으니까. 하지만 피터는 토니의 눈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사랑해요, 토니."


  그리고 그 말에, 예전 같았다면 난감한 얼굴을 애써 감추며 알고 있어, 라고 대답했을 토니는 피터를 보며 마주 웃어줄 수 있었다. 쥐에 젖은 생쥐 꼴을 한 연인과 자신의 처지를 재밌어하기도 하고, 어서 그 연인에게 다시 입을 맞추고 싶어 안달이 나있기도 했지만, 그는 이번에는 아예 다른 대답까지 해줄 수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피터. 사랑해."


  그런 말에 으레 따르듯, 행복해서 안 그래도 환한 웃음을 더 환하게 키우는 연인에게 하는 나긋하고 로맨틱한 입맞춤까지도, 모두.











    *




 





  3, 2, 1. 속으로 카운트다운을 하는 피터는 이런 순간일수록 토니에게 자신만큼 예민한 감각이 없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자신이 토니의 아머 디렉토리에 갑자기 쳐들어가서 토니를 확 놀래킬 거라는 사실을 미리 들키지 않을 수 있다는 건, 사실 연인에 가려졌을 뿐이지 장난끼가 꽤 있는 편인 피터에게는 그만큼 다행인 일이었다.


  "토니!"

  

  '마크 50'이라고 쓰여있는 아머 칸을 인상을 찌푸리고 먼발치에서 쳐다보고 있던 토니는 피터의 예상대로 놀라며 리펄서를 쏘려는 듯 반쯤 손을 올리며 등을 휙 돌렸다. 그 반응에 큰 소리로 웃으며 토니에게로 달려가 안기다시피 한 피터는 토니가 앓는 소리와 함께 그를 받아주는 것에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며 웃었다. 너무 어리광을 부린다 싶기도 했지만, 뭐. 피터는 요즘 자신이 선을 넘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함이 들 때마다, 자신이 저번에 토니에게 그 고민을 토로하고 들은 말을 상기했다.


  '그럴 때는, 뭐 어때, 토니 스타크가 나 사랑하잖아, 라고 뻔뻔하게 생각해도 돼, kid.'


  "에드는?"

  "릴라랑요."


  클린트의 딸인 릴라는, 일주일 전 클린트가 한 번 에드를 돌봐줬을 때 영상통화로 에드를 한 번 본 이후로 거의 매일을 그와 함께 놀고 싶다고 성화였다. 에드 역시도 그런 릴라가 마음에 든 건지, 지난 일주일 간 클린트가 그를 데리러 올 때마다—무려 세 번—좋다고 웃어대는 걸 보면, 꽤 그녀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 설명을 하지 않아도 대충 내용을 짐작한 듯한 토니가 씨익 웃으며 피터의 허리에 팔을 감고 그를 끌어당겼다. 피터는 작업을 하느라 검은 나시티를 입은 그의 단단한 팔뚝이 허리에 닿는 걸 느끼며 터져나올 듯한 심장을 필사적으로 달랬다.


  "그럼 오늘도 우리 둘만 있는 거네, 허니."


  토니는 호칭을 고쳐나가는 중이었다. 피터는 토니가 자신을 애 취급 한다고 한 건 'kid'라는 호칭이 아니라 다른 부가적인 요소였다고, 그 호칭은 괜찮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토니는 우선 완전히 네가 애 취급을 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될 때까지는 이러고 싶다며 고집을 부렸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습관적으로 몇 번 새어나오긴 했지만 피터는 그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어차피 에드는 거의 토니 분신 수준인데, 다른 데 가있다고 그렇게 대놓고 좋아할 거예요?"

  "에드가 문제가 아니라, 너와 단 둘이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중요한 거라고. 그리고 분신인 건 그 잘생긴 얼굴 뿐이지. 자꾸 들먹이기는 싫지만 솔직히 유년기에 성격 형성할 때에 내가 전혀 없었으니까— 아, 이건 다행인가?"

  "분신인 게 왜 얼굴 뿐이에요? 이름도 있잖아요!"

  "뭐?"

  "네?"


  토니가 눈을 깜빡이며 저를 쳐다본지 3초는 지나서야 피터는 아, 맞다, 토니는 전혀 짐작도 못 하고 있었지, 하는 생각을 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피터가 당황한 표정으로 그 말을 정정하기도 전에 토니는 그 빠른 두뇌 회전으로 이미 다 알아챈 듯 앓는 소리를 내며 피터의 어깨에 이마를 풀썩 내리고 있었다. 어, 아니, 토니, 잠깐만— 하는 피터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뺐지만 토니는 피터의 두 팔을 꼭 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젠장..."

  "어, 음, 토니로서는 모를 수밖에 없었지 않을까요?"

  "아니, 나니까 제일 먼저 알아챘어야지."


  잘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젠장. 토니가 낮게 신음하며 피터의 어깨에 더 깊숙히 얼굴을 파묻었다.

  피터가 토니의 아름다운 헤이즐넛 눈 중에 유일하게 싫어하는 눈이 있다면 깊은 죄책감에 안절부절 못 하는 눈일 터였다. 피터는 토니의 머리를 찬찬히 쓰다듬다 토니의 손에 힘이 풀린 틈을 타 조금 몸을 뺐다.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든 토니의 눈은 보는 사람마저 마음이 아파지는, 마치— 토니의 표현을 빌리자면, 잘못을 저지른 강아지처럼 촉촉한 광경이었다.


  "Anthony Edward Stark."

  "네."

  "그래서... Ed Stark."

  "풀네임은 에드워드 스타크로 할 걸 그랬나봐요. 그게 더 멋진데."

  "프라이데이가 그렇게 해놨을 지도 몰라. 젠장, 이쯤 되면 나보다 프라이데이가 더 똑똑하대도 믿을 거니까."


  거칠게 머리를 헤집으며 스스로에게 짜증을 내던 토니는 잠시 아머 디렉토리의 한쪽 구석을 노려보다 다시 피터에게 고개를 돌렸다. 피터는 토니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어떤 행동을 취할지 머릿속에서 잠시의 토론을 거치고 이내 어정쩡하게 오른손을 내려 그의 등을 토닥이는 것을 택했다. 토니가 피터보다 흉통이 넓어 피터가 어색하게 팔을 벌려야 하는 구도가 되자 토니는 어이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피터를 내려다보며 속눈썹이 풍성한 눈을 깜빡이며 고민하던 듯한 토니가 더 낮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앞으로 많은 게 달라질 거야, kid. 새로운 프로토콜이 생기고, 새로운 장치를 많이 설정할 거야."

  "무슨 식으로요?"

  "허술하기만 한 내 손을 네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일종의 안전망을 세우는 식으로."


  토니가 피터의 뒷통수의 곱슬머리를 한 손으로 스르륵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며칠 전부터 준비한 거긴 하지만, 역시... 네가 내 이름을 우리의 아이에게 붙이고 있는 그 순간을 못 본다는 걸 상상하면, 앞으로 이런 일은 방지하지 않으면 안 되겠어."

  "...이제 어디 안 간다니까요."

  "안전망이야."


  위치추적에 도청까지 했는데 더 이상 안전망이 있을까 싶기도 했지만, 피터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토니의 등을 토닥이던 손 그대로 그를 끌어당기자 토니는 피터를 한 품에 쏙 껴안고 그의 목에 입술을 묻었다. 토니가 숨을 깊게 들이쉬는 것을 느끼며 피터는 눈을 서서히 감았다. 역시 숨을 들이쉬니 토니의 시원한 체향이 피터를 자극했다. 선선하게 에어컨이 틀어져 있는 아머 디렉토리의 찬바람이 그들을 감싸안고 단 둘만의 고요한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피터는 자신이 토니의 품 안에 안겨 있다는 게, 목에 그의 입술이 닿아오는 것을 느끼고 있다는 게, 팔을 그의 몸에 두르고 있다는 게, 그 모든 게 믿기지 않았다. 뉴욕으로 돌아가 구질구질하게 울며 제발 받아달라고 무릎을 꿇어서라도 토니를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을 때에도 이런 것까지는 바라지 않았었다. 아니, 토니와 한창 뜨겁게 연애할 때에도 그들에게 이런 순간이 밤 늦게 침대에 누워있을 때를 제외하면 있을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 했는데.


  하지만 토니는. 


  "토니."

  "응?"

  "다시 한 번만 말해주세요."


  이런 말을 듣고도 아무런 질문 없이, 순순히 피터의 등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조금 숙여서 그의 두 눈을 똑바로 보며, 미소를 머금고 똑똑히 일러줄 정도로.


  "사랑해."


  피터를 사랑했기에.

  

  피터는 눈밭과도 같던 알 껍질을 떠올렸다. 그 껍질을 깨고 나오던 희고 작은 팔도. 그 작은 아이가 모두 커서, 본인이 알에서 나왔다는 사실에도 익숙해질 정도로 성숙해질 때가 되면 그때 그들은 에드에게 뭐라고 말을 해줄 수 있을까? 네 신분증이 태어나고 2년이 한참 지나서 생긴 이유, 네가 네 '다른 아빠'를 실물로 처음 본 게 그 정도 시간이 지나고였던 이유, 그 모든 걸 뭘로 설명해줄 수 있을까. 미안해, 네 아빠들이 좀 삽질이 심했어? 미안해, 네 한 아빠는 너무 부족한 게 많았고, 더 어린 아빠는 그만큼 부족했던 주제에 너무 무모했어? 


 그 무엇이든 간에, 그 아이가 모두 성장한 어느 날, 피터보다도 나이가 많아지는 어느 날. 피터가 그가 태어난 날 급하게 들어갔던 보스턴의 한 편의점은 아닐지라도, 어느 날 한 편의점에 가서 맥주 한 병을 살 수 있을 때, 신분증을 제시해달라는 직원의 말에 당당하게 그렇게 쓰인 신분증을 내밀 수 있다는 건. 어쩌면 그때쯤이면 이미 그가,


         Edward Stark 


  토니 스타크의 아들이라는 게 하도 유명해져서 그것마저도 필요 없을 수도 있다는 건.

  그건 이미. 평생 숨어살아야 할 거라고 생각했던 피터에게 그게 상징하는 바를 고려하기만 해도, 피터는 충분히, 그리고 기꺼이, 그의 아들에게 그렇게 말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도 사랑해요, 토니."


 아무리 많이 헤맸어도, 아무리 오래 걸렸어도, 아이의 두 아빠는 항상 서로를 향해 있었다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신분증을 제시해주세요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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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달 하고도 절반 정도가 걸린 신분증 시리즈가 드디어 완결을 맺었네요! 

극악의 연재텀에도 불구하고 (ㅋㅋㅋㅋㅋㅋ 읽어주신 분들 정말 감사하고, 완결편인 7편은 무려 3만 4천 자가 되는데 성실하게 읽어주신 점도 정말 존경합니다^~^ 피드백 남겨주신 분들도 정말 너무 감사해요!


앞으로 약간의 외전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당분간 신분증에는 작별을 고해야 할 것 같아요! 

신분증 시리즈에서 더 보고 싶으신 부분이나, 아직 커버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시는 떡밥이나, 그냥 궁금한 점이라거나, 리퀘라거나, 아니면 아예 신분증에 관련이 없지만 궁금한 부분들 모두 질문해주세요! 완결 기념 Ask.fm을 팠는데 곧 댓글에 링크를 올려놓을 테니 그 편으로, 혹은 트위터 멘션/디엠, 혹은 편하게 댓글로 해주시면 되니까 부담 갖지 말아주세요.


그럼 모두 행복하시고, 다시 한 번 읽어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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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피터] 신분증을 제시해주세요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