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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피터] 하이브리드 강아지 키우기 14

Raising Hybrid Puppies 번역본

"나 그냥 좀..."


피터가 문 쪽으로 제스처를 해 보이며 말했지만 그의 두 친구들 중 듣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MJ는 블로그와 트위터를 순회하며 간간히 웃음을 터뜨리고, 네드는 피터의 팔꿈치가 TV에 출연한 것에 대해 아는 사람이란 아는 사람에게는 모두 문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피터는 복도로 나서며 이어폰을 꺼내고는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그기도 전에 토니의 번호를 재빨리 입력했다. 재빨리 나간 걸로 봐서 지금쯤은 이미 차에 있어야 할 타이밍이니까. 아니나 다를까 토니는 바로 받는데—영상 통화 모드다. 이건 좀... 새로운데. 새로운 건 좋지만, 좀 더 기분 좋은 상황에서 일어나는 일이었으면 좋았을걸.


"와, 드디어 내가 정말로 받고 싶은 전화가 오네!"


화면 속에 보이는 건 토니의 머리와 목 뿐이고, 표정으로 보아서는... 기운이 없어 보인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드디어 자비스가 내가 바쁘다고 거짓말 할 필요가 없어졌네. 봤어?"


피터는 대답하려 입을 열지만—


"당연히 봤겠지. 동이 뜰 때쯤이면 빌어먹을 지구상의 모든 인간들이 이 개같은 상황을 다 봤을 테니까. 젠장, 그 재수 없는 자식. 처음부터 다 짠 게 틀림 없다니까, 그 멍청한 말장난부터 시작해서 페니스 비유라니—제기랄, 수력학을 인체 관련 비유 따위로 설명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인간들은 이미 충분히 멍청한데! 그리고 대본까지 무시하고 말이야, 그 비겁하고 멍청한 새끼가! 저질 수준의 저널리즘을 보인 건 그 쪽인데, 내가 AI를 개발하고, 그 기술을 전쟁에 쓸 킬러 로봇들 개발하는 데에 쓸 게 뻔한 이 세상에게 주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빌런이 되지. 인간들을 믿을 수가 없다는 게, 그게 그렇게 믿기 힘드냐고, 빌어먹을!"


토니가 말을 쏟아낸 뒤에는 정적이 흐른다. 피터가 할 말을 찾을 수가 없는 탓이다. '유감이에요'라고 하는 건 말도 안 되고, 그렇다고 토니를 위로해줄 다른 방법이 생각 나는 것도 아니었다.


"미안, kid, 이런 말을 들으려 전화한 게 아닐 텐데."

"아니에요, 괜찮아요!"


피터가 황급히 말했다.


"누군가한테는 쏟아내셔야 할 거고, 그리고, 음... 저한테 하시는 게 좋잖아요."


핸드폰 화면을 통해 둘의 눈이 마주쳤다. 먼저 시선을 돌린 것은 토니였다.


"그나저나, 음, 포츠 씨는 이 상황을 달가워하시지는 않겠죠?"


토니가 침을 꿀꺽 삼키는 게 보였다.


"전혀."

"그리고... 그리고 자비스도요?"

"오, 방금 그 말 들었어, 친구?"

[타워에 도착했습니다, sir.]


토니가 놀리듯 하는 말에도 자비스가 그렇게만 대답하자 그가 끙, 하는 신음을 냈다.


"으, 꼭 가야 돼?"


딸깍. 자비스가 문까지 열어준 모양이었다. 세상에.


"좋아, 들어가지. 기다려, 피터."


피터는 그 말대로 기다리며, 그 김에 MJ가 아직 트위터와 인스타그램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것을 확인하고 토니가 다시 핸드폰을 들어올릴 때쯤 지금까지 쭉 하고 싶었던 제안을 할 용기를 모으려는데—


"미친 거죠, 토니!"


젠장. 페퍼 포츠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토니의 팔은 단숨에 다리 옆으로 딱 붙어 피터의 눈에는 그의 옆에 있는 벽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벽이 대리석으로 되어 있어서, 살짝 뒤틀리기는 했지만 페퍼 포츠의 몹시 화가 난 얼굴이 반사되어 보인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몇 초가 걸렸다.


"이렇게 개판을 쳐놓고 연락 두절이 되다니, 정신이 나간 거냐고요! 토니, 혹시 정부 요원들이 들이닥치는 게 소원이에요? 콜슨 요원에게 다 드러내 보이고 싶어요? 캐런은 둘째 치고, 이 세상에 자비스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란 말이에요, 그럼 토니는 어떻게 되는지 알기나 해요? 법률 상 강간이고 뭐고, PATRIOT법*으로 기소될 수 있다고요, 토니, 테러리즘으로요!"

"페퍼."


그녀는 여전히 숨을 몰아쉬지만 빠르게 진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방송을 보셨으면, 토니가 함정에 걸려버렸을 뿐이라는 걸 잘 아실 텐데. 적어도 완전히 그의 탓은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인지 그녀가 다시 입을 열 때는 아까보다는 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더 잘하셨어야죠. 충분히 오래 해왔잖아요."


토니가 어딘지 매우 '그 개자식'처럼 들리는 말을 작게 중얼거리자 포츠 씨의 자세에도 힘이 조금 풀렸다.


"뭐, 이제 와서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최선을 다해 수습할 뿐이지. 레미와 야스민이 계획이 있다고는 해요. 우선 당신은 SNS 원천 금지예요. 트윗에 '좋아요' 누르는 건 물론이고, 인터뷰 끝난 기념으로 인스타그램에 게시물 올리는 것도 모두 금지라고요."


포츠 씨가 토니를 잠시 노려보기 위해 말을 멈췄다 다시 이었다.


"참고로 둘 다 사표 내기 일보 직전이고, 저도 그다지 막을 생각은 없어요."


피터조차도 이런, 음, 실수가 있고 나서 PR팀의 대표들이 회사를 떠난다는 게 불 난 집에 기름 붓기나 다름이 없다는 것은 잘 알 수 있었다.


"잠을 자든 작업실에서 밤을 새든 내 알 바 아니지만, 뭐든 가만히 있으라는 소리예요. 기자 회견은 오전 7시에 잡았어요."

"오전은—"


토니가 항의하려는 듯 입을 열지만, 그 행동에 다시 분노가 불타오른 것 같은 페퍼가 말을 단번에 막았다.


"네, 오전 7시요, 지금 이 순간에도 밖에 시위자들이 모이고 있는데다가 저널리스트들이 오는 건 시간문제니까요. 우리가 빠르게 이 상황을 통제할 필요가 있다는 건 잠깐이라도 뇌를 써서 생각이라는 걸 해보면 알 텐데요."


차갑게 쏘아붙인 페퍼가 숨을 깊게 들이쉰 뒤 말을 이었다.


"기자회견에서 당신이 낼 입장을 지금 쓰고 있는 중이니까, 단어 하나하나 그대로 말해야 할 거예요. 애드리브 치지 말고. 찍힌 문장 부호 하나하나까지 모조리 그대로 말하라고요.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CEO가 된 것처럼. 이해했어요?"

"네, 페퍼."

"좋아요. 6시 반에 메이크업 받으러 가요. 좀 많이 필요해 보이니까."


마지막으로 그렇게 공격하고 나서 페퍼 포츠는 빠른 발걸음으로 사라졌다. 토니가 미동도 없이 서있는 동안 피터는 소리 하나 내지 않으려 애썼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토니의 손은 마치 피터가 아직도 연결되어 있었다는 걸 지금에서야 기억했다는 듯 움찔했다. 화면 속에 다시 토니의 얼굴이 담기지만 토니는 피터의 눈을 마주하지 않았다.


"다 들었겠네."

"네, 그... 죄송해요."


피터는 그 말이 실수로 엿들은 것에 대한 사과인지, 이 상황에서 도움이 될 수 없는 것에 대한 사과인지는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토니가 어깨를 축 내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다 맞는 말이었어."


이렇게 무력한 토니를 보는 것은 피터에게는 물리적인 고통처럼 다가왔다. 피터는 뭐든지 해보려 하는데, 토니가 기운 내게 할 수는 없을 것 같지만... 차라리 주의를 돌려볼까?


"그치만, 어, FBI가 왜 토니한테 들이닥쳐요?"


불행하게도 피터의 뇌와 입 사이의 필터가 없다시피 한 것이 그의 인생 최대의 골칫거리라서인지 나오는 말은 저따위였다. 하지만 토니는 딱히 타격을 입지 않은 듯 고개를 으쓱였다.


"울트론 사태 이후에도 왔었거든. 자비스를 들킬 뻔했지. 현재 법률 상으로 자비스는 위험 요소에 들어갈 테니 큰일이었어, 내가 하도 대놓고 거짓말을 해서 더더욱 그렇고. 정부 요원들은 거짓말하는 걸 싫어하거든. 아, 판사들도."


욕설을 내뱉은 토니가 고개를 젖혀 벽에 기대며 눈가를 마사지하듯 문지르다 당연한 소리를 내뱉었다.


"그래, 오늘 밤 자기는 글렀군."

"같이 있어 드릴까요?"


불쑥 말해버린 피터가 재빨리 말을 정정했다.


"제 말은, 음, 저 지금 나가지 않으면 또 네드가 제가 싱크대한테 잡아먹히는 악몽을 꾸겠지만, 어, 집에 도착하면 다시 전화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원하신다면, 제 말은, 제가, 음, 거슬리지 않으신다면...? 차라리 혼자 있고 싶으시다면, 저 그냥..."


피터는 스스로의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냥 땅바닥이 날 집어삼켰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도 했다.


하지만 토니는 피터를 향해 미소 지으며 낮게 웃고 있으니 결론적으로 이렇게 창피하게 주절대는 것도 나름 가치 있는 일이었다. 토니가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진심이야? 내일 학교 가야 하잖아."

"저도 오늘 잘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피터가 씨익 웃었다.


"새벽 5시까지 인터넷이나 하다가 그 뒤로도 깨 있어서 CNN에서 기자회견 생방송하는 거나 볼..."

"직접 볼 수도 있잖아."

"네?"


놀라 그렇게 되묻자 토니는 조금 겸연쩍은 표정인 것도 같았지만, 피터는 그건 스스로 그렇게 믿고 싶은 거겠거니 하고 무시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래도 토니는, 뭐랄까... 멋쩍어하긴 하는 것 같았다. 마치 피터가 그 자리에 있길 바란 것이 저도 모르게 빠져나온 말인 것처럼.


"그래, 뒷쪽으로 숨어들어오면 브랜든(Brandon)이든 인(Yin)이든, 그때 경비 서고 있는 사람 보고 너한테 뱃지 주라고 할게. 페퍼만 피해서 들어오면 돼, 너한테서 손 떼겠다고 했거든."


피터는 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처음엔 토니가 함께 있어달라고 하고, 그 다음엔 피터가 자신의 작은 비밀이라는 걸 명시하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는 없었다.


둘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잘라낸 건 피터의 문에 누군가가 노크하는 소리였다.


"야, 우리 가야돼!"

"갈게!"


피터가 크게 외치고는 토니를 보며 속삭였다.


"갈게요. 그리고 집에 가자마자—"

"그래, 알아, 통금 지켜야지. 나중에 봐."


전화가 끊기고 피터는 자신의 잠금화면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채로 남겨졌다.





*





서둘러 끝난 대화에도 불구하고, 45분 뒤 피터가 전화를 걸자 토니는 신호음이 세 번도 가기 전에 받는다. 작업실을 한가롭게 돌아다니면서도 인터뷰에서 입었던 옷을 갈아입지 않은 모습에 조금 많이 정신이 팔렸지만 피터는 최대한 대화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토니가 주차되어 있는 아우디를 지나쳐가며 중얼거렸다.


"저건 탈락, 집중력을 너무 많이 요해. 좀 더 작은 프로젝트를 찾아야 하는데... 내가 일하다가 쉬고 싶을 때마다 건드리는 것들처럼."

"그걸 재보정하시는 건 어때요? 그 뭐더라, 그, 홀로그램 큐브 어쩌고 저쩌고 하는..."


피터도 제 고대 유물같은 랩탑을 손에 들고 영상통화 앱을 킨 채 방을 왔다갔다 하며 걷고 있었다. 물론 메이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생일이 기다려지는 또 하나의 이유가 바로 이것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의 친구들과 메이가 다같이 돈을 모아서 피터가 원하는 단 한 가지 물품인 새 랩탑을 사주기로 했었어서. 이 일에 대해 버키는 '대체 왜 그냥 스타크한테 달라고 부탁 한 번을 하지를 않는거야?'라고 물었었고, 피터는 그에 대한 대답을 찾지 못해 허둥댔었다. 그런 식의 생각은 전혀— 아니, 솔직히 말하면 해보기는 했었지만, 항상 어쩐지 많이 찝찝하고 기분 나쁜 생각이었으니까.


"그거 할 시간은 없어."


토니가 그렇게 말하자 피터는 다시 회상에서 현실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름은 프로큐브 H(ProCube H)야, kid, 홀로그램 프로젝션 큐브의 줄임말이라서. 그리고 그래, 약자가 순서에 안 맞다는 건 알지만, 포커스 그룹에서 실험했을 때 이 편이 더 반응이 좋았거든. 그나저나 그 학교에서 너한테 뭘 가르치길래 이런 것까지 아는 거야?"

"음, 자립적인 생각?"

"하."


토니가 짧게 웃었다.


"아니면 그냥 네가 들어온 게 그 학교한테 행운이거나."


피터가 고개를 숙이고 잠깐 고민했다. 뭐, 지금 아니면 평생 못 할 말이니까...


"저, 어, 저 뭔가 아이디어가 있는데요."


토니가 걷던 것을 멈추고 화면을 향해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좋아... 브라운스빌에 내 아크 리액터 기술을 공짜로 기부하라는 식의 말도 안 되는 소리만 아니라면."

"아뇨,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역사 공책에 써뒀던 공식들은 절대 말씀 드리지 말기, 라고 피터는 머릿속으로 필기했다. 대신 그는 아까부터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그 풀같던 거 기억하세요? 그거, 저 물리 시간에 요즘 접착제에 대해 배우고 있는데, 음..."

"네 과민성 뇌가 응용에 응용을 거듭했다는 거겠지. 좋아, 들어보자."


피터는 그제서야 그가 토니 스타크, 전세계가 인정한 천재이자 뛰어난 과학적 두뇌를 가지고 있는 그 토니 스타크와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는 자신이 그에게 정말 쓸모있는 정보를 제시할 거라는 생각이 얼마나 멍청한지, 또 그 시간에 차라리 다른 아무 주제에 대해서나, 말 그대로 아무 주제에 대해서나 이야기하는 게 더 나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지난 몇 달간의 경험에서 추출해낼 게 단 한 가지 있다면, 때로는 멍청한 생각들이 예상 외로 좋은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이라서.


그래서 피터는 가방 속에 있던 공책을 꺼내고는 준비 자세를 취하듯 어깨에 힘을 줬다.





*





최고 같았던 4시간 후, 토니는 샤워하러 떠나야 하고 피터는 이제 자신도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기에 숙모에게 변명할 거리를 찾아야 했다. 메이에게 숙제를 깜빡했다는 변명을 한다는 것은 MJ의 집에서 Last Week Tonight을 보는 걸 앞으로 다시는 못할 것이라는 뜻이기에 피터는 대신 유진과 만나러 간다는 식의 메모를 끄적이고, 이번주 일정이 조금만 달랐어도 메이가 이미 가서 변명할 필요가 없었을 테니 일정을 좀 원망한 뒤에 집에서 살금살금 빠져나왔다.


로비까지 가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이름이 인이라는 경비원이 뒷문의 보안 데스크—보통 피터가 밤에 몰래 나갈 때쯤에는 비어 있는—뒤에 앉은 채로, 어디에나 들어갈 수 있는 '올 액세스' 카드를 건네주는 것을 받은 피터가 입고 있는 자켓에 그것을 클립으로 붙였다. 이곳 외에도 세 군데에서 접근을 허가 받고 나서야 그는 포디움과, 몇 개의 줄로 정렬되어 있는 의자와, 멋진 인테리어 디자인이 배경으로 쓰인 스타크 인더스트리 배너가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었다.


피터의 주변에는 대형 언론사들의 단정하고 고지식해 보이는 리포터들부터 그의 고등학교에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작은 블로거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서 있지만, 그들 모두 거의 진동하다시피 할 정도로 신이 나 있다는 사실은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 헐렁한 후드티를 입은 저 세 명은 어디선가 봤던 것 같은데...


하지만 그걸 확인하기도 전에 피터의 핸드폰에서는 딩 소리가 나 그를 방해한다. 핸드폰을 꺼내든 피터가 토니로부터의 문자인 것을 보고 미소 지었다.



From: TS

메이크업에서 탈출 완료. 잘 들어왔어?


06:52 AM

네, 카드 감사해요! 저 오른쪽에 있어요, 맨 뒷쪽에.


06:52 AM

네 오른쪽 아니면 내 오른쪽?


06:53 AM 

제 오른쪽이요, 죄송해요!


06:53 AM 

더 자고 왔어야 했나보네.


06:54 AM 

아뇨, 여기 오는 게 훨씬 나아요 :)



그리고 끊기는 문자. 피터가 고개를 들어보니, 과연 줄 지어 있는 의자들 사이사이로 정신 없게 퍼져있던 사람들이 슬슬 자리를 찾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피터의 얼굴 위에 떠올랐던 미소는 그 사람들의 눈이 악의로 반짝이는 것을 보고 조금 희미해졌다. 아무리 토니라 해도 주무르기 힘든 관중일 것이 뻔했다. 


토니가 등장하는 것은 7시 정각에, 포츠 씨와 함께다. 피터가 아는, 현재 매우 짜증이 나있고 피곤한 토니 스타크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차분하고 무덤덤한 사람처럼 보이는 모습으로. 피터는 토니를 알게 되고 나서 처음으로, 이제서야 토니가 '가면을 쓴다'고 표현한 것이 무슨 뜻인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기분이 이상한 일이다. 피터가 15년하고도 반년을 그 가면 자체가 토니의 진짜 모습이라고 생각했을 때, 사실 진짜 토니는 그보다 훨씬 더 단면이 많은 사람이었다는 게.


페퍼가 모두를 환영하고, 모든 말이 끝난 다음에 질문을 받겠다고 선언하자 모인 리포터들에서는 난리가 나지만, 토니가 직접 포디움으로 다가서자 장내는 조용해진다. 토니는 주저 없이 모두의 눈을 한번씩 마주치고, 조금 겸손한 눈빛을 하는 것도 잊지 않고, 마지막쯤— 피터는 숨을 참았다. 토니의 눈이 자신의 눈을 정확히 마주봤다.


대놓고 활짝 웃는 것은 너무 티날 것 같아 절제하려고 노력하지만, 그의 눈과 마주치자마자 토니의 어깨에서 힘이 빠지는 걸 보니 스스로를 막기도 미친 듯이 힘이 들었다.


페퍼는 티나지 않게 슬쩍 첫 줄을 관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미 고양이처럼, 언제라도 뛰어들어 중재할 준비가 되어있는 것 같은 그 모습에 피터는 페퍼에게 엄청난 감사함을 느꼈다. 비록 토니와 그가 아직도 서로, 음, 만남을 가진다는 것을 알게 되신다면 토니의 내장을 적출해 버릴지도 모르겠다지만.


"너무 일찍 깨워서 죄송하다는 말을 해야할 것 같기는 한데, 솔직히 오늘 어차피 안 주무실 예정이었잖아요."


몇 명은 피식 웃지만 그걸 제외하면 모인 사람들은 조용하다. 그 정적은 토니가 진중하고 겸손하게 자신에게 쏟아지고 있는 분노와 비난을 모두 이해한다고 할 때에도 변치 않았다. 


하지만 토니가 시의 수력 공급 시스템이 인공지능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이 맞다고 컨펌을 하자 산산조각이 난다.


"여러분, Q&A 시간을 드리는 게 다 이거 때문이잖아요. 비논리적인 기우는 나중에 합시다."

"비논리적인 기우요?!"


후드티를 입은 블로거 한 명이 소리쳤다.


"지구상 가장 똑똑한 남자가 완전한 인공지능의 개발이 인류의 멸망을 불러올 수 있다고 한 적도 있습니다!"

"동시에 인류의 가장 뛰어난 발명품 중 하나라고도 했죠."


토니가 즉답했다.


"제가 부드럽게 다음 부분으로 넘어가려고 했던 걸 이렇게 성심성의껏 막아주시다니 참 감사하네요, 성함이...?"

"스와츠입니다. Singularity-watch.org (특이성 관찰) 에서 나온."


이제서야 피터는 왜 그들이 낯익었는지를 기억해 낸다. MJ가 제일 좋아하는 출처 중 하나였지. MJ는 그들을 "젊고, 시끄럽고, 걱정하는" 사람들이라고 불렀었고, 피터도 안 좋은 쪽으로는 동의를 하지만, 확실히 초석이 단단한 기사들과 유투브 영상들을 만드는 곳이긴 했다.


무대 위에서는 토니가 곁눈질로 페퍼의 눈을 마주했다. 그 새로 어떤 말없는 대화가 오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뭐든 간에 토니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게 만드는 내용이었다.


"네, 스와츠 씨, 그럼 다음부터는 스티븐 호킹을 문맥에 벗어나게 선택적으로 인용하는 대신 좀 더 대단한 활약을 기대하겠습니다. 캐런, 그때 그분이 정확히 뭐라 말하셨는지 좀 띄워봐."


1초가 지나지 않아 스티븐 호킹의 그 인터뷰는 홀로그램으로 띄워진다. 장내는 기묘할 정도로 조용하게 굳는다. 피터도 토니의 의도를 알지 못했다면 그랬을 터였다.


"고마워, 캐런."

[천만에요, boss.]


토니가 씨익 웃으며 사람들을 둘러봤다.


"이쪽은 캐런, 여러분의 샤워를 책임지고 있는 인공지능이죠. 트집 잡으실까봐 미리 선수 치자면, 800만명의 물을 책임 지는 동시에 작은 홀로그램 하나 띄우는 정도보다도 훨씬 많은 걸 할 수 있는 친굽니다. 자, 이제 좀 자세히 설명해드릴까요, 아니면 자랑하는 걸 좀 더 보셔야겠어요?"


이후 토니가 하는 행동은 피터가 본 이래 그가 무대에서 한 짓 중 가장 멋진 일이었다. 캐런의 우수함을 설명하는 동시에 전력을 제공하는 아크 리액터, 안전을 보장하는 프로토콜의 절반 정도 (물론 매우 기본적으로만 설명하지만), 그리고 캐런이 왜 울트론처럼 미쳐 날뛰며 기계들의 반란을 꿈 꿀 일이 없을지를 모두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며 일부분만 발췌해 들어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정교하게 말을 하는 일. 피터는 토니가 평소에 저런 식으로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잘 짜여진 대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보통 토니는 일반인들은 알아듣기 힘든 이야기를 남들이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자각도 없이 마구 해대지만, 오늘은 '바보들 전용' 같은 말들이 부드럽게 나오니까. 


하지만 제일 최고인 부분은, 토니가 말을 이으며 그렇게도 단단했던 그의 가면을 조금씩 벗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눈은 열정으로 반짝거리고, 자부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스타크 인더스트리가 인공지능을 마스터한 지금 얼마나 많은 기술적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모습이— 이렇게 말하면 청소년 로맨스 소설의 주인공처럼 들린다는 건 피터도 잘 아는 사실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정말 어쩔 수가 없었다. 토니와 이렇게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어떻게 그와 이렇게까지 오래 함께한 뒤에도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피터의 머리가 순간 얼어붙었다.


아, 안돼.


지금까지 정말, 정말 잘 부정해왔는데. 정말 뛰어나게 부정해왔는데, 더 이상 디나이얼에 빠져 있을 수가 없다. 

이렇게 바로 앞에서 그를 보면서는.


토니는 그 순간 질문 파트로 넘어가기 시작한다. 장내의 분위기가 그와 함께 스위치를 누르듯 변하자, 피터 또한 누군가가 머리 위로 얼음물을 부은 듯 자신의 자각에서 서둘러 빠져나올 수 있었다. 토니가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아, 네, 스와츠 씨, 머릿속에 질문이 가득 차셨겠어요. 공포감 좀 조장해주실 준비는 되셨나요? 본인 특기 같은데."

"그것보다 더한 걸 준비해 왔죠."


그리고 그는 포디움에 동그란 물체 하나를 던진다.


피터는 아직도 아까 든 생각 때문에 반응 속도가 좀 느린 상태여서, 그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알기 전에 그 물체는 토니의 머리에 정확히 맞았다. 그리고 맞는 순간— 터졌다. 

물풍선이었다.


와, 꽤 당돌하네, 라고 피터가 생각하고 있을 동안 보안 요원들이 던진 이에게 몰려들었다. 피터는 토니가 던진 사람을 비웃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포디움으로 다시 시선을 돌리는데—


아니, 아니었다.


토니는 더이상 포디움 위에 있지 않은—아니, 있긴 하지만, 아까처럼 서있지 않다. 무릎을 꿇은 채로 한쪽 손은 바닥을 짚고 반대쪽 손은 가슴을 움켜쥐고 있는 상태로—잠깐, 저거 아크 리액터가 있는 곳이잖아. 피터는 그 자각에 머릿속이 끔찍한 빛으로 물드는 것을 느꼈다. 그 뒤로는 수트를 입은 경호원들이 토니를 에워싸고, 포츠 씨가 마이크를 대신 쥐고 뭐라고 말하기 시작하지만 피터에게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의 발은 이미 움직이고 있고—대체 왜 맨 뒤에 서있었던 거야—다른 이들은 무대 위로 쓰러진 듯한 천재 엔지니어를 보기 위해 무대로 더 가까이 다가서고 있었다.


피터는 대신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며 좀 돌아서 가야겠다고 생각하지만, 관중을 벗어나기도 전에 무대는 이미 비워지고 토니가 어디로 갔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아니면 어디로 갔든 간에 어떻게 따라갈지도. 그렇지만 꼭 토니가 괜찮다는 걸 확인해야 하는데, 꼭 직접 보고 도와주고 그리고—


아, 펜트하우스.


토니의 집이고, 토니가 작업실 다음으로는 가장 안정을 찾는 곳이다. 그 곳이 확실했다. 기자 회견도 끝났는데 백스테이지에 남아있을 리도 없으니까. 


난장판이 된 로비를 빠져나가는 것은 피터에게는 무척 쉬운 일이었다. 돈 많은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뒷배경에 스며들듯 숨어서 가는 건 예술로 해내는 데에 익숙한 그는 (플래시에게는 먹히지 않는 것 같지만) 곧 시선을 끌지 않고서도 뒷문으로 접근하는 것에 성공했다. 하지만 피터가 뒷문을 열면서부터 이미 자리에서 일어난 것 같은 인은 그가 들어설 때쯤 이미 전기충격기에 한 손을 얹고 있었다. 피터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저, 저, 어, 저, 그냥,"


피터가 토니의 개인 엘레베이터를 가리키며 말하자, 인은 입술을 가늘게 말고 고문과도 같은 삼 초동안 피터를 바라보기만 한다. 하지만 결국, 피터의 뱃지를 한 번 흘긋 본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피터는 드디어 도착한 엘레베이터에서 등 뒤로 두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엘레베이터는 움직이지 않는다.


대체 왜...

아, 세상에. 자비스.


피터가 다시 '위' 버튼을 눌렀다. 제발...


여전히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피터는 입을 황급히 열었다.


"저를 엄청 좋아하시지는 않는다는 건 아는데요, 자비스 씨, 제 생각에는 지금 토니가 공황 상태인 것 같은데 누구든 가서 괜찮은지 확인을—아니, 물론 토니가 진짜 엄청 괜찮은 건 아니겠지만서도 제가 꼭 봐야 하거든요, 제가 도울 수 있어요, 제가 이 쪽으로는 경험도 있고 토니는 지금 혼자 있으면 안 될 거란 말이에요."


여전히 아무것도.


"제발요, 자비스 씨, 올려주세요. 자비스 씨는 육체가 없지만 저는 있잖아요! 우리 지금 같은 팀인 거란 말이에요, 진짜로요."


피터가 숨을 크게 몰아쉬며 말을 멈췄다. 사방의 쇳덩이로부터는 아무 답이 들려오지 않아 그의 귀에 들리는 소리라고는 자신의 심장이 거세게 뛰는 소리 뿐이었다. 울고 싶고, 애원하고 싶고, 또 협상하고 싶지만 피터로서는 제시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이렇게까지 스스로가 속수무책으로 느껴진 적은 없었다.


그래서 피터는 전부를 걸기로 한다.


"제발요, 자비스 씨."


속삭이는 목소리로.


"제가 토니를 사랑해요."


피터가 눈을 꽉 감았다. 이것마저도 안 된다면, 정말—


위잉.


엘레베이터가 움직이는 소리였다. 피터가 쓰러지듯 벽에 등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감사해요."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는 않지만 괜찮았다. 어쨌든 올라가고 있기는 하니까, 위로, 그리고 또 위로, 펜트하우스까지 위로. 엘레베이터의 문이 열리자마자 피터는 뛰쳐나오지만, 텅 빈 거실 앞에서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Sir은 현재 침실의 욕실에 계십니다.]

"고마워요!"


피터는 아드레날린이 솟구쳐오르는 상태에서도 놀라 응답하고는 재빨리 그쪽으로 뛰었다. 묘한 데자뷰 감각 때문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냐, 메이가 아니시잖아, 메이가 아니시잖아, 하고 기도하듯 반복하며 피터가 거실을 지나쳐 침실로 달려갔다. 그러나 도달한 침실의 문은 전자석 잠금 장치가 걸려있어서, 비밀번호를 알지 않는 한 자비스만이 열 수 있는 장치였다. 


피터는 모르는 그 비밀번호.


하지만 피터가 올려다보며 애원할 수 있기도 전에, 키패드의 불빛의 색이 바뀌어 그는 가장 가까운 센서가 있을 곳으로 짐작되는 곳을 보며 감사의 뜻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가쁘게 몰아쉬던 숨을 진정시키는 데에는 조금 시간이 걸리고, 스스로를 진정시키는 데에도 그만큼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토니가 신체적으로 위험에 빠져 있다면 자비스가 페퍼나 배너 박사님을 불렀을 테니, 적어도 그런 걱정은 덜하고.


문이 열리자 피터의 눈에는 토니가 들어온다. 옷을 다 차려입은 채로 욕조 안에서 물을 틀고 앉아있는 토니가. 피터의 오른쪽에 놓인 거울에 김이 잔뜩 끼고 있는 것을 보면 물은 아플 정도로 뜨거울 텐데도 토니는 미동도 없었다. 평소에 잘 정돈되어 있는 머리는 그의 셔츠가 가슴팍에 붙듯 이마에 착 달라붙어 있어 아크 리액터의 끄트머리가 선명히 보였다. 토니가 빠르고 얕게 숨을 쉴 때마다 아크 리액터가 움찔하듯 앞으로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게 보이지만... 토니의 눈은, 그 두 눈은 생명력같은 건 없이 초점을 잃은 채였다.


지금의 토니는 피터가 본 이래로 가장 연약해 보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평생 토니의 이런 모습을 볼 거라곤 상상도 못 했던 피터는 우선 등 뒤의 문을 똑똑 두드리며 목을 가다듬는 것으로 제가 왔다는 것을 알렸다.


토니는 반응이 없다.

그래, 그래도 피터가 어떻게든 할 수 있지 않을까.


피터는 문을 닫고, 문이 닫히며 딸깍 자동으로 잠기는 소리를 들으며 최대한 자연스러운 발걸음으로 욕조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다 토니의 이름을 불러봤지만 여전히 그의 눈은 멍하니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피터가 한숨을 쉬었다. 공황 상태는 사람마다 다른 형태로 나타나니까, 그의 숙모가 소리를 들으면 다시 현재로 돌아올 수 있는 공황 상태를 겪는다고 해도 그게 토니에게 도움이 될 지는 미지수였다. 그래서 물을 틀어놓으신 건가? 그런데 애초에 물 때문에 공황 상태가 일어났잖아? 피터는 거기까지만 하고 궁금증은 접어두기로 했다. 어떤 기억이 트리거가 되었든, 최소한 지금 당장은 피터가 신경 써야 할 일이 아니니까.


사람을 돕는 것에 있어서는 본능이 좋은 편이라고 들어온 피터는 우선 본능이 시키는 대로—물론 지금 본능 외에 딱히 할 수 있는 게 있는 것도 아니지만—겉옷과 후드티, 신발과 양말을 모두 벗어 던지고 청바지와 두 겹으로 입은 긴팔 티셔츠만을 남겼다. 그리고는 샤워실의 유리문을 한 번 더 두드리고, 기다린 뒤, 답이 없자 먼저 들어섰다. 


덥다. 편안한 느낌으로 따뜻한 게 아니라, 화상을 입겠다 싶을 정도로 뜨겁다. 피터는 이를 악물고 앉아있는 토니의 시야로 들어서기 위해 몸을 낮춰 스스로도 욕조에 앉았다. 


몇 초가 지나간다.


피터의 몸은 몇 분 새에 축축하게 젖지만, 결국 고온에 적응을 하기는 했다. 그동안 피터는 토니의 자세를 비롯해 스스로의 무릎을 꽉 쥐고 있는 토니의 손가락을 관찰했다. 


토니가 반응하는 것은 순식간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다른 세상에 가 있는 것 같았던 그의 눈은 갑자기 또렷해지더니 현재로 돌아오고, 그의 두 눈동자가 피터에 도달하자 토니의 몸 전체가 깜짝 놀라듯 솟쳐 타일에 닿았다. 

피터가 손을 들어 펼쳤다.


"안녕하세요."


토니가 이 상황에서 놀라 욕설을 내뱉지조차 않는다는 사실에 그가 얼마나 피곤한지를 알 수 있었다. 대신 토니는 그저 잠시 숨을 가다듬더니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고 피터를 건조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여기 있는 건 썩 좋은 선택이 아닌 것 같은데."


피터가 고개를 저었다.


"베이비시터는 필요 없어."

"그보다는, 그저 곁에 있어드리고 싶어서요. 보아하니 통제가 되시는, 아니, 음, 그보단 전략이 있어보이시는 것 같긴 하지만..."


피터가 힘없이 웃으며 말하자 토니는 그 말이 의심스럽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잠시 그 상태로 바라보던 토니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페퍼가 보냈을 리가 없지. 자비스는 네가 아직도 오스본 사에서 보낸 애라고 생각하고 있고—"

"네?!"

"그래도 누군가가 들여보내주긴 했을 거 아냐."


피터가 볼을 붉혔다.


"자비스 씨요."


피터는 그 대답에 토니가 내짓는 표정처럼 그가 정직하게 어리둥절해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사실 앞머리가 이마에 달라붙은 모습이나, 옷이 축축하게 젖은 모양과 종합해서 봤을 때 좀 웃기기는 했다.


"어떻게 설득했어?"


스스로가 지금 느끼는 감정을 숨길 정도로 포커 페이스에 능숙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피터는 토니의 시선을 피하며 작게 대답했다.


"어, 음... 논리적으로요."


그 말에 토니는 한쪽 눈썹을 치켜들며 천장 가까이의 한 구석을 바라본다.


"그래, J?"


피터는 일순간 패닉에 싸여 숨을 멈췄다. 그가 알기로는 자비스는 토니에게 아무것도 숨기지를 않고, 이렇게 되는 건, 젠장, 이렇게 말할 계획은 없었는데... 하지만 자비스는 그저 침착한 목소리로 말한다.


[파커 씨는 그저 본인이 물리적인 신체를 보유하고 있고, 따라서 sir이 필요하신 도움을 제공하는 데에 본인이 더 적합하다는 사실을 지적하셨을 뿐입니다.]


피터는 제 운을 믿을 수가 없었다. 토니는 자비스의 말에 그의 말투와 목소리를 따라하며 대꾸했다.


"하지만 파커 씨는 오늘 학교에 가셔야 하거든, 그러니까 지금 당장—"

[물론 공식적으로 결석 사유를 제공하셔야 합니다. 따라서, 제가 이미 파커 씨가 오늘 발목을 접질러 전문적인 치료를 받아야 하고, 그렇기에 오늘 수업에 참석할 수 없다는 내용을 학교에 전달했습니다.]


발목을 접질러? 피터는 자비스가 보여주는 묘한 결속감에 감동하면서도 그 사유는 복수겠거니 하고 짐작했다. 그나저나 컴퓨터의 서브루틴이나 알고리즘 어디에 하얀 거짓말을 해낼 수 있는 기능이 내재되어 있는지가 진심으로 궁금하기도 했다. 언젠가 자비스가 허락해준다면, 한번 그의 생각을 읽어보고 싶은... 아니, CPU를 분석해보고 싶다고 해야 하나?


"그래, 알겠어."


토니가 궁시렁대듯 중얼거리더니 무릎을 꽉 쥐고 있던 손으로 대신 젖은 바지 너머로 허벅지를 문질렀다. 


"하지만 도움은 필요 없어."


피터는 제가 무슨 말을 했어도 토니가 들었을 것 같지 않아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토니의 눈이 인형의 유리 눈처럼 멍해졌기 때문에. 방금까지만 해도 멀쩡히 대화하다가, 다시 다른 세상으로 가고. 사실 공황 상태가 극복되셔서 다시 반응하신 게 아니라 그의 둔주 상태가 나아졌다, 악화되었다 하며 오락가락하는 걸지도.


피터는 더 편한 자세로 앉기 위해 몸을 뒤척였다. 다시 옷이 마르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릴 것만 같았다.





*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절대로요."


해피가 일곱 번째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페퍼가 직접 세어봐서 알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sir, 그리고 ma'am. 그래도 아직 조사 중이니까..."


그렇게 대답하는 보안 부팀장, 페카트(Péquart)는 키가 크고, 희끗희끗한 머리와 콧수염을 지니고 있는 남자였다. 페퍼는 그의 그 콧수염을 볼 때마다 '볼 때마다 보는 사람의 눈이 고통 받는 수염은 기를 수 없다'는 내규를 만들어지고 싶어지지만, 어쨌든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그 콧수염의 소유자가 오늘 보안에 펑크가 나 토니가 육 개월만에 처음으로 공황 상태에 빠지게 된 이유를 전혀 설명하지 못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저도 조사 중이었지만—저는 뭔가를 찾기는 찾았거든요!"


야스민 맥케나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짜증을 내는 소리에 세 명이 한꺼번에 고개를 돌렸다.


"여자화장실에서 물을 채운 모양이에요. 페이퍼 타올을 버리는 곳 밑에서 찢어져서 못 쓰게 된 풍선 하나를 찾았거든요."


페카트는 잠시 해피와 대화를 나누다가 다시 여자화장실로 가려는 맥케나의 뒤를 서둘러 쫓아가고, 페퍼는 그제서야 빌어먹을 정도로 필사적으로 유지하던 침착한 외양을 벗어던질 수 있었다. 해피는 순식간에 페퍼의 옆으로 다가서서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고 문질러 주고 있었다.


"그래도 페카트는 잘라버릴 수 없나?"


해피가, 아마 페퍼를 웃게 하려는 목적으로, 중얼거렸다. 


"진짜 여자화장실에서 그런 거라면 자를 근거가 없잖아."

"근거는 만들면 되고."

"그럼 나보고 또 누구 한명 승진하는 거 결재까지 하라고? 이번 주는 안 돼, 해피, 할 일이 너무 많아."


페퍼가 한숨을 쉬며 피로에 찌든 눈가를 문질렀다.


"토니가 괜찮은지 확인해야겠어, 이미 너무 오랫동안 방치해둔 것 같아서. 잠깐동안만 이 난장판을 좀 관리해줄 수 있을까?"

"물론이지! 내가 무려 보안 팀장 아니겠어?"


굿바이 키스를 하는 입술 새로 페퍼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미소를 개인 엘레베이터까지 유지하던 그녀는, 엘레베이터에 들어서고 자비스가 말없이 위로 올려주는 것을 느끼자마자 벽에 쓰러지듯 기대며 신발을 벗어던졌다. 거의 18시간동안 하이힐을 신고 있었고, 그녀조차도 한계는 있기 마련이었다. 


벌써 다들 공황 상태였겠거니 추측하고 있었다. 녹화 중인 카메라는 충분히 많았고, 증상을 눈치 챈 사람들 몇 명이 짜증나게 전문가랍시고 TV에 등장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토니가 정말 잘 회복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거실 바닥을 밟는 그녀의 발걸음은 고요했다. 아침 햇살이 어쩐지 어색했다. 평범한 일주일의 시작을 알리는 아침보다는 길고 힘겨운 전투를 겪고 난 한밤중처럼 느껴졌다. 침실의 문이 이미 조금 열려있는 것을 본 페퍼가 더 열려고 손을 뻗는 순간, 한 쌍의 목소리가 귀에 닿아왔다. 하나는 잊고 싶어도 절대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는 토니의 목소리고, 또 하나는...


"...제 무릎이 그렇게 편안하지는 않겠지만, 제 숙모는 사람의 손길이 닿는 게 좀 더 진정되는 걸 돕는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러니까, 어, 그냥, 그냥 해보실래요?"

"껴안는 것에 너무 가까운 자세 같은데, kid."

"그래서요?"


피터 파커. 11월에 작업실에서 본 그 열 여섯짜리. 피터가 절대 손 대지 않겠다고 약속한 미성년자.


페퍼는 이런 순간들일 수록 더더욱, 그냥 사표를 내버리고 NGO 단체나 하나 책임지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하게 된다. 적어도 그러면 첫 번째 심장 마비가 올 때 마흔은 넘긴 나이일 수 있을 텐데.


방 안에서 천이 들썩이는 소리에 페퍼는 피곤함 반, 호기심 반으로 열려있는 문 틈으로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개를 앞으로 내밀었다. 정말 피터 파커가 있어다. 머리는 젖은 채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상체는 아예 옷을 입지 않은 채로. 하체도 알몸인지는 모르겠지만, 만일 그렇다고 해도 마찬가지로 상체에 옷을 입지 않은 토니의 어깨와 가슴이 그 사실을 잘 가려주고 있었다. 피터는 한 손은 토니의 머리칼을 쓸어넘기고, 다른 손은— 글쎄. 피터가 아크 리액터 근처의 살결을 만지는 그 손길을, '쓰다듬다'는 단어 이외의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토니?"


그때 피터가 속삭였다.


"음?"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방금 물어봤잖아."

"저 진지해요."

"그럴까봐 무서웠던 거야."


토니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 뭐, 해 봐."

"어... 답하기 싫으셔도 아무 문제 없어요, 정말 제가 알 바 아니라는 거 잘 알고 있는데 계속 머릿속으로 이유를 생각해보고 있었는데 잘 떠오르지를 않아서..."


피터가 마음을 다스리듯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왜 샤워예요?"


페퍼는 숨을 날카롭게 들이쉬었다. 너무 개인적인 일인 것만 같아서 물어볼 엄두조차 내지 못 했던 사안이다. 너무 취약한 부분인 것만 같아서. 게다가, 그들이 연애하고 있을 때에 토니가 알려주기 싫어도 연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억지로 알려줄 것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고, 그런 식으로는 알고 싶지 않았다. 상대방을 자연스럽게 제 공간으로 들이는 것이 연애고 관계니까. 


따라서 페퍼는 토니가 '그래, 네가 뭔데 그걸 알려고 들어'라고 말하기를, 그래서 자신이 이제서야 방에 들어설 기회가 생기기를 기다리지만—그 말은 나오지 않았다.


"꽤 한심한 이유지, 사실. 터무니 없거든."


피터가 듣고 있다는 듯 음, 하는 소리를 냈다.


"샤워를 트는 게, 그게... 내가 통제할 수 있다는 확신을 줘. 물을 말이야. 내가 그 동굴 안에 있는 게 아니라는 확신을. 그 자식들이... 뭐, 지금쯤이면 너도 유추해낼 수 있겠지."


한 박자 동안 정적이 흘렀다.


"...토니를 고문했어요?"


토니가 피식 웃었다.


"'고문'이라는 건 너무 끔찍한 단어고. 따지고 보면 물고문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어. 어차피 그쪽에서는 날 살려둬야 했으니까. 하지만 물이 너무 차가웠고..."


토니는 어깨를 작게 으쓱였다.


"그래서 너무 나빠지면, 회상 말하는 건데, 그게 너무 나빠지면... 자비스가 허용하는 데까지 물 온도를 높이고 그냥... 틀어 놔."


페퍼는 토니에 대한 연민으로 심장이 아파오다시피 하는 것을 느꼈다. 비록 토니가 이, 이, 이 미성년자에게 자신의 가장 취약한 속내를 털어놓고 있다는 게 믿겨지지는 않아도. 


"전혀 한심하지 않아요."


다시 입을 연 피터의 목소리는 속삭이는 것만큼 조용했다.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니까, 엄청 말이 되거든요. 스스로한테 도움이 된다면 무슨 방식이든 좋잖아요."


토니가 그 말에 자조하듯 웃었다.


"아뇨, 제 말은, 토니가 버틸 수 있는 방법은 토니가 찾아야 하는 거고, 그걸 아무도 대신해줄 수가 없잖아요, 비록 정말 대신해주고 싶..."


피터는 스스로의 말을 자른다. 그 목소리 속에 담긴 공감을 잡아낸 페퍼는 스스로의 눈썹이 찌푸려지는 것을 느끼며, 동시에 제 반응이 토니의 얼굴에도 그대로 떠오르는 것을 지켜봤다. 토니의 침대 위에 앉아있는 소년은 제 나이대라면 낼 수 없어야 할 무게감 있는 한숨 소리를 냈다.


"저는 보석 가게에는 못 들어가요."


토니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보통 그런 가게는 멀리서 봐도 뭘 파는지가 분명하니, 다행이네."

"아뇨, 제 말은..."


피터가 입술을 깨물었다.


"보석 관련 용품을 파는 가게라면 몽땅이요. 악세사리에 많잖아요, 요즘은 옷가게도 악세사리 많이 팔고 다른 곳도 그러고, 진짜 이상하지만, 뭐. 어쩔 수 없어요."

"왜?"

"그, 지금 말씀 드리려고 한 게 그건데요."


페퍼는 토니가 참을성 없는 손짓이나 할 거라고 예상했지만, 이번에도 예상을 빗겨가는 토니는 그저 피터가 말을 이을 수 있도록 고개를 끄덕였다. 피터가 목을 가다듬더니 말했다.


"제 삼촌이 보석 가게에서 돌아가셨거든요. 제가 거기 있었어요. 메이도요."

"그 부분은 예상했어."


피터가 어깨를 움츠렸다.


"네. 숙모는, 네. 숙모는 본인 책임이라고 생각하세요. 벤이 숙모 생신이라고 귀걸이를 선물해 드렸는데, 색이 마음에 안 드셔서 교환하려고 다같이 보석 가게에 갔었거든요. 그때 강도들이 들어왔던 거예요."


피터는 잠시 조용했다. 페퍼의 눈에 그의 어깨가 경련하듯 잘게 떨리는 것이 들어왔다.


"총이 있었어요. 저는... 뭔가를 했어야 하는데, 그 사람들이 메이랑 벤을 잡아채고 저보고 가만히 있으라고 했어요. 그리고..."


피터는 더 말을 이을 수 없다는 듯 목이 콱 막힌 소리를 내자 토니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더 말할 필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 삼촌이 눈 앞에서 총에 맞아 돌아가시고, 그래서 보석 가게는 못 가고. 대체 그게 왜 한심한지도 모르겠고 특히나 내 경제성 없는 습관과는 비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누가 이기고 지는 게 아니잖아요!"


피터는 제 목소리가 얼마나 거셌는지에 스스로도 놀란 듯 움찔하더니 더 조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제 말은... 다들 다르잖아요. 극, 아니, 견뎌내는 방법이."


그들이 시선을 진하게 주고 받는다. 페퍼는 숨을 참았다.

하지만 토니는 다시 피터에게서 눈을 떼어내고 다시 소년의 무릎을 베기 위해 상체를 도로 내렸다. 


페퍼는 손을 뻗는데—스스로도 그 행동이 문을 완전히 열기 위한 것인지, 아예 닫기 위한 것인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그 동작이 생각보다 더 눈에 띄었는지, 피터 파커의 눈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페퍼의 눈과 마주친 피터의 눈이 당혹감으로 허둥대는 것을 보며 그녀는 아주 짧은 순간 동안 지금 그들 앞에서 완전히 제 모습을 들어내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를 상상했다. 두 남자 다 깜짝 놀랄 테고, 다급하게 옷을 찾을 것이고 결국 토니와 페퍼는 언성을 높이며 싸울 것이었다. 왜냐하면, 토니가, 세상에, 미성년자의 허벅지에 머리를 기대고 있고, 그건 정말이지—


하지만.

하지만, 페퍼는 토니가 공황 상태를 겪은지 단 두 시간이 되었을 때 이렇게까지 편안해 보이는 것을 본 적이 없었고, PR 관련 재난이 있고 나서 이렇게까지 안정감을 되찾은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는, 고민할 거리도 아니었다는 거다.


페퍼는 피터 파커의 시선을 한 순간만 더 마주한 뒤 소리 하나 내지 않고 문에서부터 멀어져 갔다.











*PATRIOT ACT (애국자법): Uniting and Strengthening America by Providing Appropriate Tools Required to Intercept and Obstruct Terrorism ACT (테러리즘을 차단하고 방해하기 위해 적절한 도구를 제공하여 미국을 통합하고 강화하는 법)의 약자로, 911 테러 이후 생긴 미국의 테러방지법.



-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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